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69
69. 플래시 몹 (flash mob) -3
‘라 엘라’
전생에도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어째 기억이 남았었다.
미향예고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정식 동아리였으며 교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동아리.
실제로 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인터뷰에서 언급하면서 그 입지는 더 커졌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전생의 나는 그 동아리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라 엘라는 미향중 출신의 미향예고 학생들 우선시해서 동아리원을 받는다. 전생의 나와 미향중 출신의 학생들은 사이가 나빴으니 괜스레 더 눈에 거슬려 나도 모르게 다양한 정보를 알게 되었었다.
그리고 화요일,
오늘 나는 드디어 시간이 생긴 엘리나와 그녀를 ‘라 엘라’로 초대한 장본인 성악과 수석 김성아, 이렇게 셋이서 어딘가로 향했다.
“그래서 무슨 플래시 몹을 도와달라고?”
날카로운 눈매에 당장이라도 계산기부터 들이밀 것처럼 생긴 한 학생, 그는 다름 아닌 이 ‘라 엘라’에 동아리장이었다.
내 부탁이었다.
어제 아트홀에서 엘리나에게 부탁했고, 엘리나가 그 날밤 김성아에게 부탁해 ‘라 엘라’의 동아리장과 이렇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네.”
탐탁지 않은 표정의 사람들을 정면에 두고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흐으으음.”
하지만 시원스러운 나의 대답에 동아리장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야 썩 내키진 않을 거다.
이 동아리는 역사가 깊고, 실제 걸출한 뮤지컬 배우들도 많이 배출했으니 콧대가 자존심을 찌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좀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해도 1학년의 학생이 대뜸 나타나 ‘내가 뭐 좀 하려는데 좀 도와줘’라고 말하는 것이니 환영해주는 것이 더 이상하리라.
다시 말하지만 나와 그는 초면이었다.
나야 그가 무용과 3학년의 강백진이라는 걸 알지만, 그는 나를 모를 것이다.
알면 그게 더 소름이고···.
“네가 요새 말 많은 그 이성현이지?”
그런데, 이 백진은 나를 알고 있었다.
“SNS로 버스킹도 하고,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 모리에게 협주 제안도 받고, 홍진태님과도 알고 지내는 데다가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준우승까지 차지한 그 이성현, 맞지?”
심지어 아주 자세하게 말이다.
뭐지? 그 정도로 내가 유명해진 건가···?
아니, 하지만 백진의 표정을 보면 미간이 좁아 보일 정도로 꽉, 인상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대충 그거다.
아마 이 잘난 동아리의 선배님은 나를 많이 나대는 1학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나였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내가 떠올리던 우상, 그래 미래의 김민호를 생각해보자.
“네, 맞습니다!”
나는 평소보다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말이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더 인상을 바짝 구기는 동아리장 강백진.
아무래도 이 자존심 강한 3학년에게는 오답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사인 좀 해줄래···?”
이어지는 그의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사···. 사인이요?”
차갑게 생긴 인상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정말로 주섬주섬 펜과 종이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뭐지?
나는 당황스러워 잠시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
사인을 마치고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플래시 몹’에 대한 일정을 공유한 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서프라이즈’ 계획에 대해서까지 말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쉽게 허락을 받아냈고 반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일의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부장 많이 긴장했었죠?”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 엘리나, 그녀가 말해주길 그 강백진 동아리장은 예전에 내가 엘리나와 협주를 했을 때부터 나를 좋게 보고 있었다고 했다.
“뭐? 부장이 네 팬이라는 거 몰랐었어? 나야 당연히 엘리가 말했을 줄 알고, 말 안 했지···.”
그리고 내가 억울하다는 투로 왜 먼저 말해주지 않았냐고 묻자 김성아는 그렇게 답했다.
거기에,
“성현, 서프라이즈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나도 장난쳐 봤어요!”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는 엘리나. 그녀의 저 순박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뭐라 할 의지도 사라졌다.
동아리장이 냉정하게 득과 실을 따지는 사람이라는 걸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알고 있는 나였기에,
김백찬 기자의 협조에 홍진태나 복지 센터가 통째로 엮여있을 만큼 큰일이라는 것 거기에 우리 ‘2만’짜리 SNS로 홍보까지 해주겠다는 다양한 카드를 준비해두었었는데, 참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아무튼, 그렇게 아주 간단히 내 ‘서프라이즈’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다음날,
이번에는 지은이까지 데리고 셋이서 복지 센터를 방문했다.
오늘도 봉사 활동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평상시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우선 플루티스트 황민재가 교습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싫어하던 점자 악보도 빠르게 습득하기 시작했고 비슷한 아픔이 있는 교습생들과도 금방 친해져 있었다.
“어, 형!”
그는 교실을 엿보던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내가 센터에 방문하지 않은 3일간 미용실도 다녀왔는지 머리도 말끔해져서는, 영상에서 보던 미소년이 되어 있었다.
참, 김민호도 그렇고 정석 선배에 민재까지, 주변에 잘 생긴 남자들만 있으니 영 자신감이 줄어든다.
민재를 비롯한 센터의 분들은 다들 내가 부탁드렸던 곡을 착실하게 연습하고 계셨다.
뭐, 사실 부탁드렸던 곡이라기보단 내가 찾아낸 수업 계획서에서 이미 그들이 두 달간 열심히 연습했던 음악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그 곡을 선택했던 것이지만 말이다.
내가 택한 곡은 다름 아닌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Vivaldi – The Four Seasons]누구든 듣기만 하면 아! 하고 알 수 있을 만한 곡이자, 센터에서도 그리고 ‘클래식 버스킹’ 팀에서도 이미 연주해본 경험이 있는 곡이라는 걸 알기에 일부러 택한 곡이었다.
홍진태씨의 팀에게도, 센터의 교습생들에게도 부담이 가지 않으면서도 훌륭한 연주가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약 2시간 정도로 평소보다 짧지만, 교습생분들의 레슨과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알맞은 시간을 교실에서 보내고 나는 예린이와 지은이를 데리고 원장실로 향했다.
원장님은 이번 플래시 몹에 꽤 적극적이셨다.
내가 ‘클래식 버스킹’에게 보낼 영상이 필요하다고 말하니 다음날 바로 찍어서 보내줬을 정도로.
그 정도로 내게 협조해주시는 이유는 나를 그만큼 신뢰해주시는 것도 물론 있었겠지만,
아마 원장님 역시 뭔가 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답답해하셨던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내가 민재를 변화시킨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되자 완전히 태도가 바꾼 것이다.
“….해서 끝이 날 예정입니다.”
“그러면 총 공연은 1시간 반 정도 진행되는 거니?”
“아마 그것보다 조금 더 걸리겠지만, 비슷합니다.”
“그래. 역시 성현이네 이 아줌마는 상상도 못 했던 걸 탁탁 해내고 말이야!”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내 어깨를 ‘탁’ 치며 연신 감탄사를 내뿜으시는 원장님.
나는 그런 원장님과 이 복지 센터에 고용된 강자님들 그리고 지은이와 예린이를 차례로 바라보고는 한시름 돌렸다는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정보 공유가 끝났다.
이로써 ‘클래식 버스킹’과 ‘리 하모닉 클래식 센터’는 가만히 있어도 어느 정도 합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저기···.”
잠깐의 휴식 뒤 아직 커피를 사러 간다며 돌아오지 않은 강사분도 계시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목소리를 냈다.
거의 의장 격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던 내가 입을 여니 괜히 이어지던 대화가 끊어지고, 이목이 쏠렸다.
“죄송한데 제가 일을 좀 벌여서요. 사실 이야기할 거리가 조금 더 있어요.”
“응?”
가장 놀란 반응을 보인 것은 방금까지 예린이와 대화를 나누던 최지은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애써 못 본 척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연히 김백찬 기자를 만나 이번 일에 대해서 알리게 된 일과 미향예고의 역사 깊은 뮤지컬 동아리를 부르게 된 일.
사실 끝까지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서프라이즈로 진행해볼까 하는 욕심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안전상의 이유로 포기하게 되었다.
“욕심 내지 않는 거 아니었어?”
내 얘기를 모두 들은 지은이가 가장 먼저 그렇게 물었다.
욕심,
솔직히 처음 계획은 나도 생각지 못했던 이런저런 욕심이 있었다는 점, 전부 인정하지만, 최고의 무대를 선물해주고 싶다는 내 욕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우연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해도, 현재 계획에 무리는 없도록 조정을 해두었다.
무작정 늘어놓은 계획이 아니라 순서에 맞춰 단계별로 진행하는 점을 특히 강조해 말했다.
그렇게 지은이의 질문에 긴 대답을 하고 있으니 주변에 있던 어른들조차 내게 딴지를 걸어오지 않게 되었다.
이것도, 지은이가 배려해준 걸까? 아니, 뾰로통한 입술을 보니 내가 상의 없이 이것저것을 진행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여차여차해서 내 계획은 이제 종막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번 주 토요일을 향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연습.
복지 센터에서는 특히 민재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역시나, 플루티스트로 명성을 떨쳤을 민재라서 그런가.
실력이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발전했다.
총 14명이 된 교습생들.
그중에서도 유독 빛이 나는 민재.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저 아이를 바꿔놓았다는 사실에 꽤 큰 자부심이 들었다.
그리고 이틀이 더 흘렀다.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솔직히 이건 내 실수였기에 누굴 탓할 수도 없다.
클래식 버스킹
리 하모닉 클래식 센터
‘라 엘라’ 뮤지컬 동아리
거기에 우리 셋이라는 팀까지.
네 개의 팀을 원활하게 그리고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내 모든 계획을 꼼꼼하게 알고 있는 우리 셋이 무대를 오르내리면, 중간중간에 비는 시간이 생겼다.
내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해도 무대 위에서 연주하며 통화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던 중, 선뜻 지은이가 말했다.
“그럼 나랑 예린이가 왔다 갔다 하지 뭐.”
물론 내가 계획을 세우며 가장 많이 상담한 대상이 최지은이다. 굳이 순서나 타이밍 같은 것을 설명해줄 필요도 없고, 그녀는 머리가 좋으니 알아서 잘 해줄 거라는 믿음도 생긴다.
“그래도 돼? 아니면 내가 할게. 나를 무대에서 빼면 거의 다 해결되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맞아 성현아. 성현이는 무대에 올라야지. 네가 준비하고 모은 사람들인데···.”
내가 대안을 제시하자 바로 만류하는 두 친구.
민재도 함께 연주하는 걸 기대하는 눈치였고, 사실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기에 우리가 가장 준비가 덜 되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오히려 연주하지 않는 쪽이 더 마음 편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총괄 진행을 원장님과 이수정, 그리고 최지은과 이예린 이 넷이서 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힘찬 연습과 함께 다시 이틀이 지나, 드디어 당일이 밝았다.
***
세브란스 병원의 아동 센터와 재활 센터 사이, 넓고 높게 비어있는 로비에는 어째서인지 스피커가 연결된 키보드형 피아노와 빈 의자 열 댓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들 긴 관심을 두지 않는 까닭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린아이들도 흥미를 느끼고 다가왔지만, 전원이 내려간 키보드에서 소리가 나지 않자 금방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주변에 하나둘 모이는 간호사들.
누군가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약속한 듯 어떤 시간에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는 그들.
마치 큰 통로를 지키듯 선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통로를 걸어오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과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아이.
둘은 삐걱삐걱 걸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키보드와 의자를 향했고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연주해볼까?”
“아직 다 안 오셨는데요?”
“괜찮아, 뭐든 좋으니까 네가 원하는 곡을 연주해봐. 내가 맞출게.”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딸깍.
키보드에 전원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럼 그때 그걸로 할게요.”
내려놓은 가방에서 작은 플루트를 꺼낸 아이가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해드에 입을 가져간다.
입에 대고도 천천히 숨을 고르던 아이는 이내, 힘차고 청명한 소리를 퍼트려 모든 무대의 시작을 알렸다.
언젠가 짙은 먼지 향이 나던 교실을 물들였던 그 곡.
[You raise me up]플루트의 아름다운 선율이 퍼짐과 동시에 기가 막히게 들어오는 피아노 반주.
얇았던 음색은 순식간에 피아노의 음에서 뛰노는 야생마처럼 힘을 얻었다.
그리고 툭, 툭,
하며 각기 다른 방향에서 그들의 눈을 대신하는 화이트 케인으로 바닥을 치며 다가오는 사람들.
악기 가방을 메고 한 분씩, 한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그들은 울려 퍼지는 선율을 향해 걸었다.
이윽고 그들 모두가 악기를 손에 쥔 순간, 알맞게 되돌아온 주 멜로디 타이밍.
웅장한 하모니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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