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85
85. 프레스티시모 (Prestissimo, 아주 아주 빠르게)
지은이는 병원으로 향하기로 했다.
괜히 정신이 산만해질 수 있으니 과제 곡은 나중에 확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얼른 가자. 태워줄게.”
책임감 있는 어른답게 정석 선배는 곧바로 지은이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그런 정석 선배를 말렸다.
“아, 아니에요. 엄마가 오고 계신데요.”
듣자 하니 이미 전화가 걸려온 시점에 M스튜디오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던 것 같았다.
“그럼 얼른 입구로 가자”
나는 어찌할 줄 모르는 지은이에게 그렇게 말하고 우리 셋은 함께 M스튜디오 입구까지 걸었다.
거짓말처럼 지은이의 어머님으로 보이시는 분이 자동차 경적을 울리며 지은이를 크게 불렀다.
지은이는 그 길로 어머니의 차를 타고 가버렸다.
모리스 슈만 콩쿠르 역시 정말 중요한 일이긴 했지만, 아직 결선 무대까지는 2주가 남아있었다.
그러니 반년간 의식 불명이셨던 할머님이 깨어나셨다는 소식에 이렇게 슉 사라지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마음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어딘가 불안하고 가슴 한쪽에 찡한 감각이 사라지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나는 지은이와 함께 병원에 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 지은이 할머님에 대한 소식은 낭보였을 텐데 말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음, 성현아 우리는 들어갈까?”
내가 멍하니 지은이가 탄 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자 정석 선배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네.”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어차피 당장 내가 지은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둘러 결선 무대를 준비해서 경황이 없을 지은이를 도와줄 준비를 하는 게 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행동이던 것이다.
나는 정석 선배와 함께 다시 M스튜디오 사무실로 돌아왔다.
***
공개된 과제는 이러했다.
일단 내가 원하는 자유곡을 한 곡.
모리스가 지정해준 세 곡 중에서 하나를 택해 두 번째 곡으로 연마하고, 마지막으로 모리스의 자작곡이 한 곡이었다.
그중에서 작곡가 모리스가 쓴 곡은 오늘로부터 다시 7일 뒤, 개별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무진장 모리스 다운 방식이네.”
나와 함께 과제를 확인한 정석 선배의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모리스 다운 방식이요?”
“그래. 그 양반은 옛날부터 자유곡 하나랑 자신이 작곡한 곡 하나를 결선 과제로 줬었거든.”
모리스가 이 ‘모리스 슈만 콩쿠르’를 반쯤 자신의 자작곡을 발표하는 무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건 이미 지은이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왜 굳이 자유곡과 지정곡을 과제로 지정한 것일까?
내가 그러한 의문에 고개를 까딱이고 있자 어떻게 알았는지 정석 선배는 말했다.
“굳이 자유곡을 과제로 내는 이유는 아마, 실력과 분위기에 차이를 보여주고 싶은 걸 거야.”
“실력, 분위기 차이요?”
“그래. 원래 그 양반은 자유곡을 일주일 연습시키고 그걸 연주하는 영상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거든. 내 선배 때는 직접 불러서 연주를 시켰었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데요?”
“모리스는 네가 택한 자유곡을 듣고 그 곡과 비슷하거나, 너한테 더 어울리는 곡을 줘. 그러니까 연주자가 주특기를 선보이면 그 주특기에 훨씬 더 어울리는 곡을 골라준다는 거지.”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자유곡은 보통 가장 자신이 있고 완성도가 높은 곡을 택하기 마련이니까.
모리스는 연주자가 택한 ‘최선의’ 연주법을 보고 자신이 작곡한 ‘최고의’ 곡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연주자가 앞서 선보였던 ‘자유곡’ 보다 더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존에 존재하던 곡보다 훌륭한 곡을 써냈다는 걸 더 직관적이고 직접적으로 들려주고 싶었던 거겠지.
자신의 곡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비평가나 기자, 전문가들에게 말이다.
거기까지 머리가 굴러가자 왜 모리스가 자신의 곡을 발표할 때 굳이 준프로들을 선호하는지도 이해가 갔다.
기존의 곡을 너무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들 불러버리면, 자신의 곡보다 기존의 곡이 더 두드러질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신곡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비교 대상이랍시고 부른 기존의 곡이 더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만한 창피가 없을 것이다.
나는 정석 선배를 통해 알게 된 모리스의 속내를 하나씩 파악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걸리는 것이 하나 생각났다.
“어, 지금까지 자유곡에 모리스의 곡이 끝이었다면, 왜 이번에는 지정곡이 있는 건가요?”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정석 선배에게 그리 묻자, 선배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답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아마 비공개로 진행하던 콩쿠를 공개적으로 바꾸게 된 계기랑 연관이 있지 않을까?”
정석 선배도 그것만큼은 확신이 서지 않는지 좀 모호한 말투로 그리 말씀해주셨다.
비공개에서 공개로 바꾼 계기라···.
모리스는 분명 내 영향을 받았다고 방송에서 직접 언급했었는데.
나랑 지정곡이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모리스가 공개한 지정곡 파일을 다운로드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음.”
[Beethoven](베토벤)
-Piano Sonata No. 14 ‘Moonlight’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Piano Sonata No. 17, ‘Tempest’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Piano Concerto No.5 ‘Emperor’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베토벤이라고?”
이게 나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나는 지정곡들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모르겠다.
“와. 명곡들뿐이네?”
뒤에 서 있던 정석 선배도 뒤늦게 화면을 봤는지 그런 목소리를 냈다.
명곡들이라.
확실히 위 세 곡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곡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들으면 아, 하는 소리가 나올만한 곡들뿐이었다.
이전 기습 본선에서도 그렇고, 예전에 나와 ‘대중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렇고, 아마 모리스는 유명한 클래식 곡이 곧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 단순하게 바라보면 그럴지라도 분명 모리스 슈만 정도 되는 사람이니 뭔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대체 뭘까.”
나와 정석 선배는 잠시 그렇게 생각에 빠졌다.
***
삐비빅-
알림이 울렸다.
“후우, 휴우우.”
그 소리와 함께 나는 한껏 들이쉬고 있던 숨을 차분하게 고르며 내쉬어 땀과 짙은 열기로 뒤덮인 몸을 차분히 정돈했다.
알람을 끄기 위해 핸드폰을 들자 시간이 보였다.
현재 시각은 저녁 7시.
정석 선배가 또 연습에 몰두하느라 끼니를 거르게 될까 봐. 아예 저녁을 같이 먹자고 약속을 잡은 시간이었다.
정석 선배와 모리스 슈만의 의도를 파악해보고자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 연습실에 틀어박히는 걸 택했다.
그의 의도가 어찌 됐든 사실 결선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는 걸 새삼 인지한 것이다.
그래서 정해진 오늘의 목표는 자유곡 선정.
악보 하나 없이 연습실에 들어가 눈을 감아도 악보를 떠올릴 수 있을 만한 곡들을 연주해봤다.
대략 연주 시간은 4시간 반.
전생에서부터 연습 중독자였던 내게 떠올릴 수 있는 악보는 많았다.
완성도를 끄집어 올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딱, 한 곡을 지정하고 나면 언제든지 단 이틀 만에 그 곡을 내가 가능한 최상의 수준으로 연주할 자신이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자유곡을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최근 피아노를 연습할 때마다 손끝에서부터 계속 느껴지던 기이한 감각이 내 이목을 끌었다.
“대체 뭐지?”
심지어 그 감각은 ‘봉사 센터’를 돕거나 모리스의 본선 연주를 할 때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그걸 인지한 나는 그 순간부터 목표를 바꿨다.
자유곡보다는 그 기묘하게 친숙한 느낌에 더 집중해본 것이다.
왠지 알 것도 같은데, 끝까지 그 명확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느낌.
느낌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누구에게 뭐라 설명해도 ‘뭔 소리야?’라는 대답을 들을 것 같은 감각이었다.
선배한테는 죄송하지만, 나는 그 감각의 정체를 딱 한 번만 더 연주하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피아노 의자에서 궁둥이를 때지 않았다.
차분하게 건반으로 향하는 손.
나는 눈을 감았고,
내가 연주할 음색을 떠올려,
디테일한 악보를 구현했다.
그러자 눈을 감고 있음에도 보이는 악보.
그리고 전생의 내가 그것을 두드리는 움직임에 맞춰 지금의 나도 건반을 눌렀다.
오랜만에 연주해보는 피아졸라의 ‘봄’.
얼음을 부수는 감각,
땅을 가르고 솟아오르는 푸름.
끝없는 봄의 악상이 내 손끝에서 음악으로 구현되었다.
그렇게 피어난 화사한 봄.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그 친숙하면서도 기이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아쉬운 마음에 어깨가 축 처지며 한숨을 픽 내쉬려는데, 정석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오. 대단한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선배.
나는 아쉬워서 한숨을 쉬려는데, 오히려 칭찬을 들은 것이다.
“어떤 부분이요?”
나는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연주의 완성도는 워낙 오랜만에 연주한 것이라 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뛰어난 기교나 특수한 기술이 들어가는 곡도 아니었다.
정석 선배는 뭐가 대단하다고 말을 했던 걸까.
내가 그렇게 의문을 품고 있으니 정석 선배는 씩 웃으며 말했다.
“몸 쓰는 법을 알잖아. 보통은 다들 실수하는 부분인데, 누가 알려준 거니?”
“몸···. 쓰는 법이요?”
내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정석 선배는 더 의아하다는 식으로 답했다.
“설마, 의식하지도 않고 네 몸 성장에 맞춰서 주법을 바꾼거야?”
그는 참 오랜만에 놀라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얼굴로 내게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주법을 바꿨다니.
나는 원래 연주하던 그대로 연주했을 뿐인데 말이다.
“하핫, 그래. 성현이 넌 원래 그랬지.”
그리고는 납득했다는 것처럼 한바탕 웃어버리는 정석 선배, 나는 그의 사고를 따라잡지 못해 맹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어디가 대단하다고 하신 건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그래. 대신 일단 저녁이나 좀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앗! 넵!”
저녁 식사 알람을 내 손을 껐다는 걸 뒤늦게 생각난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선배의 차로 향했다.
“성현아, 최근에 키 컸다는 말 좀 듣지 않았니?”
선배의 차를 타고 음식점으로 향하는 길, 선배는 아까 나의 질문에 답을 해주겠다며 그런 말을 꺼냈다.
“키요?”
확실히 최근에 지은이와 부모님 모두 그런 말을 했었다.
나 역시 성장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찰나고 말이다.
“그래. 최근에 성현이는 처음 나를 만났을 때, 그리고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준비할 때랑은 또 다르게 덩치와 키가 커지고 있거든. 못 느꼈어?”
“어어,”
느끼긴 했다.
확실히 피아노를 치는 것도 전보다 더 수월해졌고 근육도 많이 붙어서 예전처럼 한계까지 밀어붙이듯이 하지 않아도 온종일 연습이 가능해진 것이다.
“몸이 커진다는 건, 전체적인 균형이 변한다는 거잖니.”
“그, 그렇죠?”
“그러면 당연히, 예전의 연주법을 그대로 고수하다간 악보를 틀리지도 않았는데 음이 미묘하게 다른 그런 상황에 부닥치게 돼. 보통은 말이야.”
몰랐다.
전생에는 몸이 완전히 성장한 뒤에나 피아노를 쳤기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리라.
자기 자신의 성장과 연주법에 변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건반을 보는 나의 눈높이가 변하고, 같은 힘을 주었을 때 뻗어지는 팔길이가 달라지는 것이다.
다리 길이 역시 늘어나니 페달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그런데 성현이 너는 요 두 달 사이에 눈에 띄게 커졌는데도 혼자서 연주법을 알아서 바꿨잖니 아니, 의식한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 미묘한 조절을 감각으로 해냈다고 봐야 하려나?”
정석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으셨지만, 나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전신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아아···!”
내가 최근 연습을 할 때면 점점 더 강해지던 그 기묘한 감각, 친숙한 느낌의 정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감각은 다름 아닌 전생의 내가 연주를 할 때마다 느끼던, 짜릿하면서도 공허했던 그 안타까운 감각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전생에서 연주하던 형식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을 경계했었다.
전생의 몸과 지금의 몸은 확실히 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내 몸은 절찬리 성장이 진행 중인 상태였다.
아까 연습을 할 때도 계속해서 전생의 주법을 떠올리고 그것에 맞춰 연습했으니, 자연스럽게 내 주법은 전생의 것을 따라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성장에 알맞은 연주를 하게 된 것이다.
기묘하게 친숙하던 느낌은 다름 아닌, 전생의 나를 되찾는 감각이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다시금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실패했던 작업.
반주자로서의 연주와 솔리스트로서의 연주.
전에는 둘 다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정확한 중간 지점을 찾지 못했었다.
그에 대한 방편이 바로 ‘두 가지 스타일이 공존하는 연주자’라는 것이었는데, 이젠 그런 기발한 아이디어에 기댈 필요가 없어지고 있던 것이다.
이제는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몸은 좀 더 성장해야 더욱 완전해지겠지만, 나는 당장에 솔리스트와 반주자의 장점만을 끄집어 온 연주법을 탐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성장할 수 있다.
지금보다 뛰어난 연주자로 거듭날 수 있다.
정석 선배의 조언으로 알게 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자신의 심장이 거칠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몇 달 전부터 멈춰 있던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킬 방법을 떠올리자 내 입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