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92
92. 돌체 (Dolce, 부드럽고 아름답게) -4
할머니가 오셨다.
지은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오시면 좋을 텐데···.
객석에 앉아 무대에 오른 지은을 보고, 그녀가 연주하는 선율을 듣고, 달라진 자신에게 말해주시는 거다.
-그간, 정말 많이 노력했겠구나.
-정말 고생했구나.
-이 할미는 너를 믿고 있었단다.
-장하다. 장해.
다정한 어조에 따스한 말투, 거기에 할머니만의 걸걸한 목소리를 더해 그런 말을 해주시면 좋겠다고 지은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성현에게 말해왔다.
그리고 성현은 지은의 그런 어린아이 같은 소원을 듣고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말을 해줬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지은은 자신감 있게 무대에 올라 멋진 연주를 선보이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하.”
그렇게만 된다면 아니, 그런 시도를 해볼 수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실은 차가웠다.
지은의 몸은 스스로 떠올리던 이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준 것이다.
로비에서, 연습실에 없는 성현을 찾아 아트홀의 정문이 있는 곳으로 가봤다가 지은은 마주치고 말았다.
휠체어와 링거에 의지해,
고모의 도움을 받아 이곳까지 찾아오신 할머니.
할머니는 성현과 짧은 대화를 나눴고, 이내 모리스 슈만이 있는 2층으로 이동을 하고 계셨다.
지은은 분명 자신이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말로 할머니를 마주하려 하니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목청 높여 할머니를 부르고 항상 당당한 김민호나 언제나 상냥한 성현처럼 말하면 될 일을.
-기대해주세요.
-제가 꼭 놀라게 해 드릴게요.
지은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시선은 끝까지 사라져가는 할머니를 쫓고 있었는데 하필 우연히 고개를 돌린 할머니가 지은이 서 있던 쪽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지은은 그 순간, 할머니의 눈빛이 정말 차갑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런 짧고도 최악인 만남을 겪고 나니 지은의 마음에는 작은 불안이 싹을 틔웠다.
‘할머니는 내가 어떤 연주를 들려드려도 나를 인정해줄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닐까.’
그 작은 불안은 성현과 함께 M스튜디오에서 연주를 거듭하며 지은이 간신히 잊고 지내던 많은 걱정을 끄집어냈다.
‘할머니는 어떤 연주를 들어도 화를 낼 거다.’
‘준프로들 사이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을까.’
‘성현이는 왜 그렇게나 나를 믿어주는 걸까.’
‘이번 무대를 망치면 성현이도 나를 떠나는 게 아닐까. 할머니처럼···. 나를 믿어주지 않게 되는 것 아닐까.’
이윽고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읍···!”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배 속이 아프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도록 앉아 있던 바른 자세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띠이-
그때, 대기실에 짧고 날카로운 신호가 울렸다.
지은은 자연스레 그것이 무대가 첫 번째 연주자를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재상,
무서운 사람이다.
피아노도 정말 잘 친다.
하필 기습 본선에서 자신이 연주했던 곡을 골라 눈앞에서 수준 차이를 보여준 남자.
솔직히 지은의 기분은 좋지 못했다.
자신이 이 정도 되는 무대에 올라올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쯤,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아는데···.
왜 그는 굳이 그런 짓을 한 걸까.
“아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은은 어느새 구두를 벗고 드레스가 주름지는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자세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자신이 어쩌다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가.
문득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은은 아직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일 뿐인데, 왜 자신의 할머니와 동 세대 연주자가 주최한 콩쿠르에 나와 있는 걸까.
핑핑 도는 머리가 서서히 아파졌다.
필시 스트레스에 약한 몸이 반응하는 것이리라.
이럴 때는 항상 챙겨 다니던 약을 먹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려왔지만, 오늘은 그것마저 들고 오질 않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약에 의존하는 자신을 할머니는 나약한 아이라고 말했었으니까.
단 한 알도 먹지 않고 성공적인 연주를 선보여, 인정을 받고 싶었다.
인정을 받고 싶다.
언제나 자신을 편들어주고, 칭찬해주시던 과거의 할머니를 다시금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힘들다고 투정도 부리고 어리광도 마음껏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는 이제 존재하지 않기에 해소될 수 없는 스트레스는 지은의 몸속을 한없이 돌아다니며 고통을 일으켰다.
“하아아···.”
긴 한숨을 내쉬다가 그제야 자신의 뺨이 흥건하게 젖어있다는 걸 눈치챘다.
무대에 올라야 하는데, 퉁퉁 부은 눈은 안 되는데 걱정에 이은 걱정이 샘솟는다.
이러다 몸 상태만 더 악화되서 아예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러면 할머니도 그리고 성현이마저 자신을 격멸하겠지.
그렇게 돼버리면 자신은,
그러면···.
“지은아?”
문득,
자신을 부르는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들려와 지은은 눈물을 감추지도 않고 고개를 휙 들어 앞을 바라봤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성현.
그는 아주 올곧은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예전에 지은이를 달래주던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성현은 그런 질문을 해주었다.
“나,”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은은 성현을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나, 너무 무서워···.”
자신의 말을 스스로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재상에 대한 불만도,
배나 머리가 아프다는 것도 모두 변명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하지?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할머니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나, 나는···.”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의 믿음과 피아노만이 전부였던 일생인데, 그걸 송두리째 부정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기에 자신은 할머니가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성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속내가 그대로 튀어나온 까닭은, 성현이라면 끝내 자신을 괜찮다, 괜찮다 하며 달래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그렇게 되면 지은은 ‘할머니의 믿음’이 아니라 ‘성현의 믿음’을 원동력으로 다시 무대에 오를 용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은 그런 자신이 좀 많이 역겹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라도 무대에 오를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그럼 너는? 그렇게 되면 지은이 너는, 어떻게 되는데?”
성현은 다정하지도, 따스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지은이 자신을 부정해도 한없이 용기를 줄 것만 같았던 그 성현이 말이다.
“어?”
그래서 지은은 자기도 모르게 맹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은이 네가 그랬잖아. 할머니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그··· 그렇게 되면 나, 나는. 피아노를···.”
“치면 되잖아. 이번 콩쿠르가 잘못돼도 너는 피아노를 칠 수 있어. 넌 실력이 있고, 피아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
성현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지은의 두려움을 부정한 일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야.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너야. 지은아.”
그래서 큰 소리를 내서라도 자신의 절실한 감정을 표하려 했으나 성현은 그런 지은에게 직설적인 어조로 단언했다.
“할머니에게 부정당한다고 네가 해왔던 연습이 다 쓸모없어지거나 하지 않아.”
지은은 너무 당황스러워 맹한 눈으로 성현을 바라보았다.
“너는 노력했고, 이렇게 결선에 올랐어.”
“그건··· 네가 모리스를 설득해서···.”
“전에도 말했잖아. 내가 만든 건 기회고, 그걸 잡은 건 네 실력이라고.”
지은은 성현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네가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 않을 거야. 꼭 우승할 거라든지. 할머니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든지. 그런 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야.”
“…왜”
“나는 지은이 네가 스스로 원하는 연주를 했으면 하거든.”
“내가 원하는 연주?”
“옛날에 입기 고사를 치르기 직전이랑 똑같아. 민호도 안 되고, 나도 불가능한 너만의 연주가 있잖아. 그건, 누가 믿어준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 네가 너를 믿어야지.”
“내가, 나를?”
“그래.”
성현의 긴 이야기를 듣던 지은이는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아주 오래전, 지은이가 처음으로 민호를 이겼었던 ‘입시 고사’.
그때의 얼굴과 참 닮았다고 성현은 생각했다.
그 얼굴을 마주한 성현은 드디어 작게, 미소를 지었다.
***
인터미션,
풀어 말하자면 중간 휴식시간이 끝났다.
아트홀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다시 객석에 앉아 무대에 오른 정민주의 연주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었다.
드르륵.
나는 ‘일반인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무시하고 2층으로 향했다.
이 모든 무대에 점수를 매기고 있을 모리스 슈만과 이제 곧 여섯 번째로 무대에 오를 지은이를 기다리는 김순이 할머님이 계신 2층으로 말이다.
잔인한 일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나는 지은이라는 아이가 어떤 것을 원동력으로 힘을 내서 살아가는 아이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어떤 믿음을 받고 그 믿음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살아온 아이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잘 치리라는 할머님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피아노를 연습하던 것이 그 시작이었을 것이다.
후에 지은이는 ‘천재’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에 부응하려 피아노를 치는 아이로 자랐고 주위의 ‘기대’, ‘믿음’ 따위가 없다면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가 되고 만 것이다.
-내가 나를 믿는다는 유치한 말 한마디가 저를 홀가분하게 해줬어요.
정확히 ‘천재, 부활하다.’라는 제목에 기사에서 봤던 지은이의 인터뷰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때 지은이의 나이는 26살이었나, 27살이었나.
아무튼, 나는 뜬금없이 이 짧은 인터뷰 기사를 떠올린 것을 계기로 현재의 지은이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래의 지은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으로 기나긴 슬럼프를 극복했었으니, 당연히 현재의 지은이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러면 지금의 지은이는 현재, 무엇을 원동력으로 열심히 결선을 준비할 수 있었던 걸까.
그건 아마도, 그녀의 성공적인 미래를 아는 나의 무조건적인 신뢰였을 것이다.
지은이는 겉으로 보이는 굳건한 모습에 비교해 심적으로는 상당히 불안정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은 그녀와 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드러났다.
의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에게 의존해 자존감을 얻어왔던 지은이는 최근, 내게 의존해왔던 것이다.
의존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실제로 전생에서 그녀는, 의존의 대상이었던 할머니에게 한마디를 툭 듣는 것만으로도 중3의 나이에서부터 무려 2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슬럼프를 맞이하지 않았는가.
내가 자신을 라이벌이라고 믿어주길 바랐다는 말도, 내가 의존의 대상이었기에 그런 말을 했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은이를 긍정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할 수 있다던가.
성공할 거라던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꽤 예전부터, 항상 말해왔던 입에 담은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봐.’
‘네가 원하는 연주를 해’
어쩌면 허울 좋은 말들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지은이는 그런 말을 듣고 고심한 끝에, 실제로 민호를 이겼던 경력이 있었다.
바로 그 ‘입시 고사’ 말이다.
그때,
그 순간의 지은이는 내 믿음에 부응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심사위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연주를 한다.
과거 성장하기 전의 지은이는 자신이 그걸 행한 뒤에도, 스스로 어떻게 했던 건지 기억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지은이는 성장했으니까.
끼익,
낡은 철문이 열리는 소음이 들렸다.
“네, 네가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게냐.”
당돌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리스가 나를 보며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특별관람석에 있어야 할 의자는 없고, 두 대의 휠체어가 나란히 놓여있다.
거기에 앉아 계신 모리스와 김순이 할머님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침 정민주의 연주가 끝이 났는지 무대는 비어있었다.
나는 연주에 방해되리라는 걱정 없이 말했다.
“꼭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질문?”
“네.”
당황한 모리스는 험상궂은 표정을 짓거나 하지 않고 내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아마 자신의 무대도 남은 내가 이런 장소를 찾아왔으니 필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질문을 할 대상은 모리스가 아니었다.
“김순이 할머님.”
“으응?”
모리스는 내 시선이 옮겨가자 놀란 눈치였고, 할머님은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다.
“할머님이 지은이에게 피아노를 관두라고 했던 건 지은이가 할머니에게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었나요?”
요근래 내가 계속해서 고심하고, 고민하던 내용을 입에 담자, 김순이 할머니는 정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런 일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는 것처럼 금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오는 할머니.
그리고는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 맞다. 애비랑 애미한테 제대로 된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우리 지은이는 죽을 날이 머지않은 나한테, 너무 심하게 의존하는 아이였단다.”
‘우리 지은이’라니, 막상 지은이가 앞에 있을 때 ‘못난 것’이라고 부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역시, 할머님은 지은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수명이 많이 남지 않은 할머님에게 의존하다가 갑자기 그 자리가 텅 비게 되면, 지은이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걸 걱정해서 일부러 정을 떼려고 했던 것이겠지.
병실에 곱게 모셔놓은 오렌지도, 심한 말을 할 때마다 지은이가 아닌 허공을 쳐다보던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이제 지은이는 내가 아닌 너에게 의존하고 있더구나. 그건··· 그건 좋은 게 아니란다. 절대로 지은이를 위한 일이 아니야. 네 나이에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아니요. 알고 있어요.”
슬픈 얼굴을 하고 이런저런 것을 알려주려고 하시던 할머님에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은이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연주는 하지 않을 거예요.”
내 말에도 할머님은 그런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처럼 나를 쏘아볼 뿐이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 아프게 말해서 뭐하겠는가.
직접 보고, 듣는 일이 필요하겠지.
마침, 지은이는 무대에 올랐다.
정민주의 연주가 끝나고, 지은이가 차례가 되기까지 5분.
예쁜 하늘색 계열의 드레스를 입은 지은이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짝짝짝-뜨뜻미지근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소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지은이의 눈앞에 있는 관객들은 그녀의 연주에 그 어떤 기대도 걸고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무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연주.
지은이에게 이런 상황은 확신하건대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면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처음인 무대에 임하는 지은이의 얼굴은 참, 담담해 보였다.
디잉-
[Ravel: 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 그녀의 자유곡이 식어가던 피아노에 열기를 더했다.
높은 음계와 낮은 음계가 정적인 조화를 이룬다.
오른손에서 피어나는 주 멜로디가 안타깝고 애잔한 감각을 몇 배로 일구어냈고, 마찬가지로 왼손의 반주는 그 깊이를 더했다.
내가 누차 좋다고 말해왔던 연주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중학생 때의 지은이가 추구하던 탄탄하고 정적이기만 한 연주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지금의 지은이는, 할머님이 좋다고 하던 연주도, 내가 좋다고 하던 연주도 아닌 다른 선율을 연주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흐으···.”
이를 두 눈과 귀로 듣게 된 할머님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은이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애잔함과 청아한 그리움.
그 선율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음색이 아니었다.
순백의 종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깨끗한 슬픔과 순수한 그리움이 선율을 타고 나의, 할머님의 가슴을 두드렸다.
지은이는 아직 울고 있었다.
담담한 얼굴에는 눈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고 있었으나, 지은이는 피아노에 감정을 담아 울고 있던 것이다.
홀로된 고독함과 막연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본래 애잔한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와 만나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만들어냈다.
잔잔한 수면과 달리 요동치는 수맥.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지은이의 속마음이 선율을 타고 흘렀다.
Dolce.
아주 부드럽고, 아름답게 말이다.
“하.”
객석은 전율로 물들었다.
그녀를 애써 의심하던 할머님조차, 그리고 냉정하게 무대를 평가하던 모리스마저 지은이의 울음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듯 울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까지도···.
“오랜만이네.”
연주하는 곡과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한‘솔직함’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훗날의 완성형 최지은의 편린이 엿보여 가슴이 찡한 울림을 느껴졌다.
그동안 움츠러들어 있던 날개를 활짝 편 것처럼, 지은이의 연주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
짝짝짝짝-!
두 번째로 지정곡이었던 ‘템페스트’의 연주를 끝내자 아직 모리스의 자작곡이 남아 있었음에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
그런데 정작 이에 당황하는 것은 객석을 당혹게 만든 장본인인 지은이었다.
그러면서도 지은은 현재, 자신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이 감각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묵히고 묵혀왔던 녹진한 자신의 감정.
지은은 이를 성현에게 믿음을 받는 것으로 잠시 잊어버리려 했었다.
하지만 전신을 타고 흐르는 끔찍한 감각을 그저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에 담아내자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지금껏 시도하는 일조차 피해왔던 추하고, 역겹다고 여겨왔던 자신의 일면을 그대로 선율에 엮어 연주해내자, 속이 시원해졌다.
단순한 시원함을 넘어 청량감이, 아주 깨끗하고 찌릿한 감각이 역겨운 감정을 대신해 자신의 전신을 채워나갔다.
지은은 아주 분명하게, 피아노로 노래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나를’ 믿어보라던 성현의 이해할 수 없던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어렴풋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연주하면 연주할수록 불안하던 감각은 이제 없다.
그녀는 할머니에게 부정당했던 이후, 처음으로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다.
그저 즐거워서 연주하는 그런 피아노.
지은은 이 감각이 뭔지 알고 있었다.
예전에 ‘입시 고사’ 때, 처음으로 민호를 꺾었던 그때, 자신이 연주하고도 어떻게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그 연주 감각.
그게 바로 이 자신에게 솔직한 연주였던 것이다.
이제는 알 것만 같다.
감정을 담아 연주한다는 게 뭔지, 그리고 피아노로 노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그렇게 세 번째 곡인 모리스 슈만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지은은 너무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 아름다운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열심히 곡을 연주하던 중.
지은은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자신이 연주하던 남청색 피아노에서 유독 한 건반이 소리가, 자신이 연주를 시작하기 전보다 약해진 것이다.
‘대체, 뭐야?’
지은은 연주를 모두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 그 기이한 현상이 신경 쓰였다.
왠지 모를, 불안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