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94
94. 피아체볼레 (Piacevole, 귀엽게)
나 자신의 역량과 수준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퍽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거만해지면 도를 넘게 되고 반대로 너무 옹졸한 태도로만 남게 된다면 자신의 역량을 펼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나를 아는 일은 참 중요한 일이다.
왜 갑자기 내가 이런 공자왈맹자왈 같은 소리를 하냐면, 짝짝짝짝짝짝-!
눈앞의 광경 때문이었다.
내가 모리스가 직접 작곡한 곡인 ‘가을의 눈’을 끝까지 연주해내고, 갑작스러운 탈력감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자, 박수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뜨문뜨문 작게 들려오던 박수는, 점점 커졌고 끝내는 지금 모든 청중이 일어나 내게 박수를 보내는 엄청난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하, 하하.”
장장 1분,
내가 지친 몸을 일으켜 피아노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고개를 푹 숙여 깊은 감사를 표했을 때마다, 객석에 계신 부모님, 봉사 센터의 분들, 기자, 관계자, 일반 관객들은 다 같이 더 큰 박수 소리를 들려주었다.
정말, 내가 스타라도 된 것 같은 상황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하.”
기뻤다.
내 생의 그 어떤 순간을 뒤져봐도 이 정도로 압도적인 객석의 반응을 끌어낸 적은 없었다.
관객들은 알 수 없겠지만, 오늘 나 정말 힘들었다.
불현듯 떠오른 지은이의 기사 내용 때문에 지은이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부터 엄청 고민했다.
지은이와 할머님의 관계가 잘 풀릴 수 있게 그 방법을 계속 고심했다.
모리스에게 당당하게 1등을 하겠다고 선언해놓고서는 형편없는 연주를 들려줄 순 없으니 나 자신의 연습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번 콩쿠르는 정말 바빴다.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고, 고민해야 할 것도 많았다.
내 몸은 두 개가 아니니까.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잠을 줄여야 했고, 휴식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피아노까지 말썽을 부리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아마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닐까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해냈다.
내가 이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들은 다 보여주었고, 지은이에 얽힌 문제들도 풀어냈다.
피아노도 지은이의 도움이 없었다면 조금 삐걱거렸겠지만, 전문 반주자로 내가 몇 년을 살았는데, 자기 셈여림에 상대적으로 알맞은 셈여림을 못 찾겠는가.
짝짝짝짝짝-!
휘이이-!
그리고 그 모든 노고를 지금, 치하받는 것 같아서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하···.”
아까부터 입에서 나오는 게 ‘하’ 밖에 없지만,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 다리가 후들거려서 큰일 날 뻔했다.
다행히 무대 뒤에서 힘이 풀린 거라 창피를 당할 일은 없었다.
“서, 성현아?”
마침 나를 마중 나와준 선배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는 나를 받혀줬다.
이렇게, 길고 길었던 모리스 슈만 콩쿠르가 끝이 났다.
***
모리스 슈만 콩쿠르는 예로부터, 결선 당일에 1위, 2위, 3위를 발표한다고 한다.
아마 심사위원이 자신 혼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
그 때문에 콩쿠르 결선 참가자들은 다시 정장과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걸어 무대에 올랐다.
“결과 발표에 앞서 주최자이신 독일의 작곡가 모리스 슈만 선생님의 특별 무대가 있겠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사회를 맡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별 무대?”
나는 의아한 태도로 바로 옆에 서 있는 지은이에게 물었으나, 지은이도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별 무대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그것을 듣고 객석에 정석 선배를 찾아봤는데, 선배도 많이 놀란 눈치인 것을 보니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다시 보니 무대 위에 피아노는 내가 연주했던 남청색 피아노가 아니라 리허설 때부터 무대를 지키던 새카만 피아노가 되어있다.
“뭘 보여주려는 거지?”
나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모리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로 올라왔다.
휠체어에 오른 상태가 아닌, 지팡이를 짚은 모리스 슈만.
그는 한쪽 다리와 한 손에 문제가 있는 거로 아는데, 어떻게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나의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 터벅, 터벅 잘도 걸어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참가자들은 물론 객석도 고요한 가운데,
딩-
모리스는 다치지 않았다는 손들 들어 건반을 눌렀다.
그리고 다친 한 손으로는 간단한 음계가 반복되는 반주를, 멀쩡한 손으로는 복잡한 주 멜로디를 연주했다.
“이건?”
“네가 연주한 곡 아냐?”
내 중얼거림에 지은이는 질문을 던졌고 나는 그녀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Maurice: Schnee im Herbst](모리스: 가을의 눈)
그가 연주하는 곡은 다름 아닌, 내가 피아노 때문에 반음 높여 연주했던 그의 자작곡이었다.
“어? 좀 다른데?”
곧바로 알아채는 지은이.
아마 그녀뿐만이 아니라 객석에서까지 이를 인지했는지 웅성거림이 있었다.
그렇게 연주를 마친 모리스 슈만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다.
“과거, 바이올린의 귀재라고도 불리는 연주자, 니콜로 파가니니가 있었습니다.”
그런 말로 입을 연 그는 파가니니의 유명한 일화 하나를 언급해주었다.
연주 도중에 줄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으나 그 상황에도 멈추지 않고, 곡을 연주해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그가 왜 파가니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도, 이성현 참가자가 연주하던 도중 피아노 현이 끊어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스가 힘을 주어 말하고는 잠시 숨을 고르자 객석에 있던 관객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연륜이 느껴지는 언변의 기술인 것 같았다.
“이성현 참가자는 제가 방금 들여드렸던 ‘가을의 눈’이라는 곡을 즉석에서 편곡해 연주해버렸죠.”
모리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의 빠른 상황 판단 능력, 임기응변 능력에 대해 계속해서 찬사를 쏟아내는 모리스.
“무서운 사고조차 자신의 능력을 빛낼 기회로 만들어버리는 연주자. 그는 파가니니의 환생이라 불려도 전혀 아쉽지 않은 연주자가 분명합니다!”
모리스가 힘을 주어 외치자 객석에서는 내가 연주를 끝마쳤을 때처럼 힘찬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모리스는 그 뜨거운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듯 말했다.
“그리고 제게 있어서 1등이라는 말은 이성현 같은 연주자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죠.”
갑작스러운 찬사와 낯부끄러운 호칭에 정신이 없던 와중, 나는 깜짝 놀랐다.
“이번 콩쿠르의 우승은 이성현입니다.”
모리스가 이렇게 갑자기 결과를 발표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말이다.
나는 결국 우승을 거머쥐었다.
***
그로부터 벌써 이틀이 지났다.
뜨거운 열기와 귀를 찌릿하게 만들 만큼 폭발적이었던 박수까지.
방금 있던 일처럼 생생했다.
“후우우.”
그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던 나는 현재, 우리 집 내 방에 누워있는 중이었다.
저번 콩쿠르가 아니, 더 나아가서 이번 1학기 전체가 너무나도 급박한 일정에 맞춰 움직여왔기에 그런 것인지.
나는 어제부터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연주를 끝내고 무대 뒤에서 다리가 풀렸던 것처럼 왠지 모를 탈력감이 한순간에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호, 혹시 집에 혼자 있는 거면 내, 내가 간호하러 갈게.
어제 대략 13시간을 잠만 자다 일어난 나와 통화할 때, 지은이는 그렇게 말했었다.
어째 예린이보다 말을 더듬는 일이 늘어났다 싶은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그런 허술한 모습을 보이질 않다가 나와 둘이 있을 때만 그러는 것이니 아마, 연애감정 때문이겠지···.
“으어어어.”
다시 생각하니 괜히 또 얼굴이 뜨뜻해져서 괴상한 앓는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요새 지은이와 단둘이 있다 보면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인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내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지은이는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녀를 좋아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 전생은 피아노와 연애를 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여성과 인연이 없었다는 것.
있다고 해봐야 이수정인데, 걔가 원체 걸걸하고 터프해야 말이지.
전생에도 소중한 친구라는 생각은 계속 있었으나 여자로 느낀 적은 없었다.
그에 반해 지은이는 너무 예쁘다.
연주할 때나 걸을 때도 귀티가 흐르는 데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습은 내 안에 없는 줄 알았던 연애 세포를 깨울 만큼 매력적이었다.
지금은 키가 적당한 차이지만, 훗날 내가 180을 넘기니 보는 시선 같은 것도 달라질 것이다.
내려다보면 지은이 정수리가 보이려나, 그건 좀 재미있겠다.
거기에 평소 강건하고 단단한 행동들과 비교해 실상은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한 데다 외로움까지 많이 탄다.
심지어 체구도 작은 편이라 무슨 고양이 같은 모습을 종종 보이는데, 그때마다 정말 엉뚱하다 싶으면서도 또 그게 귀엽게 느껴진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나, 계속 지은이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아차 싶은 생각이 곧바로 들었다.
멍하니 있을 때마다 계속 특정 인물을 생각하고 있다니 무슨 변질자 같지 않은가.
“하아아암.”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한번 켠 뒤에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내게,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나는 날이었다.
그 변화란 바로, 스마트폰!
이 2010년은 국내 기업의 첫 번째 모델이 출시되던 바로 그 시기였다.
부모님은 이번 모리스 슈만 콩쿠르의 우승 기념으로 내게 스마트폰을 사주기로 하셨다.
그동안 인터넷이 연결되는 피처폰을 쓰면서도 큰 불만은 없었지만, 솔직히 액정이 너무 작긴 했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불만까지 표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불편하긴 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게 반나절 나는 아버지와 함께 쇼핑을 나가 핸드폰을 바꿨다.
이제 인터넷을 확인하는데 굳이 컴퓨터를 찾아 헤매는 불편함이 확 줄어들었다.
난 그것만으로도 퍽 만족스러웠다.
그날 밤, 나는 바뀐 번호를 본래 연락처에서 쭉 뽑아 단체 메시지를 보내 알렸고, 지은이에게는 전화를 걸었다.
-몸은 괜찮아?
통화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자마자 지은이는 바로 내 안부를 물어봤다.
“응. 멀쩡해.”
어딘가 모르게 피로가 남아있던 것과 달리, 내 목소리는 그나마 가볍게 나갔고 지은이도 밝은 목소리를 듣자 안심한 것 같았다.
나는 지은이와 모리스 슈만 콩쿠르 결선의 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축하해.”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소식은, 바로 등수에 대한 것이었다.
모리스는 그날, 1등을 나라고 발표한 것과 동시에 2등과 3등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며 중대한 사항을 발표하듯 말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저녁 7시 반에 올라온 공지글을 통해 베일에 싸여 있던 2등이 공개되었는데,
“네가 2등을 할 줄 알았어.”
그건 다름 아닌 최지은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주 강력한 연주를 선보인 이재상이 3등.
그리고 계속 화난 얼굴을 하고 있던 정민주는 순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정말?
“당연하지. 그날, 네 연주 진짜 아름다웠거든.”
-아, 후후후 고마워. 그래도 그 말을 1등한테 들으면 조금 놀리는 건가 싶기도 한데 말이야~.
“응? 놀리는 거 아니야. 진짜야.”
지은이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내가 당황하는 소리를 내자, 그녀는 정말 신난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어울려주길 잘한 것 같았다. 후후.
-있잖아.
그러다가도 갑자기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지은이.
“왜?”
그에 맞춰 나도 침착한 어조로 답하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소원 같은 거 있어?
“소원?”
-응. 으음···. 이번 할머니에 대한 일도 그렇고, 콩쿠르 무대에 대한 조언 같은 것도 그렇고······. 나는 맨날 너한테 도움만 받고, 뭔가 도와주지는 못한 것 같아서. 그으.
즉, 내게 고맙다며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것 같았다.
-나한테만 부탁할 수 있는 거라던가. 아니면 막, 비싼 거라던가 아무거나 소원 말이야.
그 와중에 소원이라니 참 단어선택도 귀엽다.
내가 원하는 거에 지은이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
“어?”
불현듯 나는 머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게 좋겠다.
-왜, 뭐 생각났어? 뭔데?
“혹시 지은아. 앞으로 일주일 내에 혹시 너희 집에 찾아가도 될까?”
소원을 정하자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리고 한 5초쯤 지났나,
-뭐? 어?! 우리 집? 지, 지금 내가 있는 여, 여기!?
“응. 그리고 너만 있는 시간이면 더 좋을 거 같아.”
-어어?! 나, 나만 있, 있는 우, 우리 집에 오오오, 오고 싶다고?
“응. 안 될까?”
나는 원하는 게 생기면 꽤 직설적인 편이라, 거침없이 물었고 지은이는 매우 당황하는 목소리를 내다가 크흠! 크흐흠! 하며 목을 한참 가다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와 말했다.
-그으, 왜 나만 있는 우리 집에 오고 싶다는 건지. 호, 혹시 물어봐도 되겠니?
“그건···.”
나는 한껏 기대감에 부푼 목소리로 씩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