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98
98. 리솔루토 (Risoluto, 결연하게) -2
고등학생의 여름방학은 짧다.
1학기를 마치고 뒤풀이를 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8월이었다.
햇볕은 쨍쨍해졌고, 기온이 너무 높아서 사실 온종일 에어컨을 쐬며 멍하니 있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아. 죽겠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은 에어컨을 틀어주질 않거든.
그래서 반강제로 나는 매일 M스튜디오에 출근 아닌 출근을 해야 했다.
“후아아.”
버스에 탑승하자 안도의 한숨 따위가 절로 나왔다.
집에서 정류장까지 오는 길은 고작 10분 남짓인데 그사이에 땀이 흘러 몸이 찌뿌둥했다.
그래도 더위를 먹기 직전의 상황에 이렇게 축 늘어져 있으니 다행히 빠르게 정신머리가 돌아왔다.
이틀 전, 유키에 모리는 끈질기게 나와의 협주를 제안했다.
왜 모리스가 불편한 얼굴을 하면서까지 단칼에 거절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는 모르겠다만 꽤 질척거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저랑 협주만 해준다면 일본에 왔을 때 경비 전액을 부담해줄 수 있어요. 만약 일본으로 유학을 온다면 학비까지도요.”
“싫습니다.”
“그럼 혹시 도쿄의 센터 아트홀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제 제자들과 함께 그 무대에···.”
“죄송하지만 일본에 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 그러면 그냥 돈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전생에서부터 황소고집이라고 불리우던 나다.
나는 유키에 모리의 파격적인 제안을 모두 거절해버렸다.
미안하지만 독주회를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한데, 유키에가 정말로 절박한 표정까지 짓고 있던 터라, 상황이 거기까지 흘러가자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궁금해졌다.
유키에 모리는 실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인망도 두텁고 젊은 나이에 정 교수가 될 정도로 실력도 있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나한테 이토록 집착하는 걸까.
필시 거기에는 분명히 아주 중대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예상했다.
그래서 모리스가 있던 그 자리에서는 그녀를 돌려보냈으나 이틀 뒤인 바로 오늘, 유키에를 만나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따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유키에 모리를 만나기로 약속한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본래라면 M스튜디오에서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나는 사당역 인근까지 버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윽고 도착한 카페에 들어가자 말끔한 정장을 잘 차려입은 유키에가 보였다.
가볍게 뒤로 묶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서류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모습은 유능한 커리어 우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뭐, 바이올리니스트지만.
“안녕하세요.”
내가 서슴없이 다가가 말을 건네자 유키에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가 대상이 나라는 것을 보고는 표정이 풀렸다.
“아, 성현군. 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어차피 한일 공동 주최 콩쿠르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아마 그녀는 나를 기다리면서도 일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표정이 어두웠던 것도 납득이 간다.
연주자로서만 살아온 그녀에게 갑작스러운 서류 뭉치는 큰 골칫덩이일 테니까 말이다.
“자, 그럼. 제가 아무리 매달려도 매몰차게 내버렸다가 이제 와서 보자고 한 이유를 들어볼까요?”
“누가 들으면 저희가 무슨 특별한 사이인 줄 알겠어요.”
“어머 아니었나요? 제자로 삼으려다 실패했고 협주를 하기로 했던 약속도 깨졌죠. 이 정도로 특별한 사이는 그다지 없을 것 같은데요.”
내가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던 일이 역시 유키에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일까.
그녀의 말투에는 은근히 날이 서 있었다.
때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일이 잘 풀리려나 고민하던 찰나, 유키에가 먼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화 안 났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 서류랑 계속 씨름하다 보니 날카로워졌었나 봐요. 미안해요.”
진심으로 사과하겠다는 듯, 손에 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고개까지 꾸벅 숙이는 유키에.
나는 그런 그녀가 상당히 피곤함에 절여져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뭘 원하신 거예요?”
그래서 나는 유키에가 조금이나마 편하게 반응할 수 있게 단도직입적인 어조로 말했다.
“사실은 뭘 원했느냐고요?”
“네. 아무리 생각해도 유키에 모리씨 같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저같이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초짜 피아니스트랑 협주하고 싶다고 그렇게까지 찾아오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런가요?”
“그럼요. 그러니까 당연히 협주를 핑계로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뭔가 다른 것을 부탁하려고 했던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앞뒤가 맞죠.”
“그, 그래요?”
“네.”
당당하게 추론을 늘어놓는 나와 달리 당사자인 유키에는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허나, 잠시 그랬을 뿐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유키에.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기도 하네요.”
혼자서 뭔가를 결정한 듯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저는 성현군에게 따로 부탁하려고 했던 일이 있었어요. 정확히는 어떤, 상담 같은 건데요.”
그리고는 한 영상을 재생해 내 눈앞에 틀어주었다.
이어폰도 준비해둔 것을 보면, 애초부터 기회가 있을 때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게 이것을 보여주려고 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상은 한 콩쿠르 무대를 촬영한 것이었다.
아직 2010년인 만큼 화질도 나쁘고 음질도 좋지 않았지만, 상당한 실력자의 연주라는 것을 판별할 수 있을 만큼 영상 속의 연주자는 뛰어났다.
“이치카라는 아이에요. 제가 분수에 맞지도 않는 교수직을 역임하자고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되어준 아이죠.”
유키에는 따스한 눈초리로 영상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딱히 많이 만나보지도 않는 내가 단숨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절절한 그리움이 그녀의 눈동자에는 담겨있었다.
이내 영상이 끝났다.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가 끝도 없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니 영상 속 연주자의 인기가 엄청나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핸드폰을 집어넣은 유키에는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응시하며 하나씩, 이야기를 해주었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처해 있던 아이.
우연히 지인을 통해 유키에와 만나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짧은 카프리스 한번 연습할 수 없는 환경,
그러나 이치카라는 아이는 바이올린 하나에 사활을 걸고 매달려 ‘천재’라는 찬사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치카는 사고를 당했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이야기.
유키에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수술실에 들어가는 이치카와 그 아이의 봉변에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부모의 모습을 이야기할 때 유키에는, 당장이라도 카페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장장 1년이나 혼수상태에 있던 그 아이가 깨어났을 때, 이치카가 그러더라고요. 바이올린을 그만둘 거라고···.”
바이올린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다.
아이의 부모는 공부는 안 하고 괜히 돈만 나가는 일을 한다며 아이를 타박했고, 아이는 수없이 쏟아지는 자신을 향한 저주가 자동차 사고 같은 일을 부른 거라고 굳게 믿고 차라리 바이올린을 관두는 게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한다.
아주 서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유키에는 이치카라는 아이를 위해 무려 교수직을 받아 최적의 교육 환경을 조성해줄 계획이었는데, 아이가 바이올린을 내려놓자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혜선 아니, 성현군의 담임 선생님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건 바로,
나와 봉사 센터에 관한 이야기.
플루트를 놓은 플루티스트와 나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듣고 보면 민재가 처해 있던 상황과 유키에가 말하는 아이의 상황은 퍽 비슷했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한 번씩 큰 성취를 거뒀던 것도 그렇고, 특정한 사유로 더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게 된 것도 그랬다.
“그래서 성현과 무리하게라도 협주를 하면서, 대체 어떻게 악기를 놓은 연주자를 돌려놓은 건지. 그 이야기를 천천히, 차분하게 나눠보고 싶었어요.”
마침 대학에서 가르치던 학생들이 한국 콩쿠르에 출전하게 되어 한국에 방문하고 있던 것도 있었고, 앞으로 한 달 뒤면 그녀는 유럽으로 떠나 몇 달이나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도 유키에의 조바심을 자극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리하게 내 독주회를 협주회로 바꾼다는 억지까지 부리게 된 것이라고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으음.”
하지만 절절한 유키에의 이야기와는 달리 내 반응은 담백했다.
나는 우선 침묵하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악기를 스스로 내려놓은 연주자에게 뭔가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 연주자의 상처를 후벼 파는 행동이 될 수 있게 조심해야 한다.
눈앞에는 지금도 유키에가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솔직히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민재에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동력은, 다름 아닌 그가 훗날 성공하는 연주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치카라는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연주자인지 알지 못한다.
“그 아이는 정말 천재인가요?”
그 때문에 나는, 꽤나 무례할 수 있음에도 그런 질문을 우선 던져봤다.
이에 유키에는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잠시 당황하는 눈치였다가도 차분히 말했다.
“물론이죠. 바다 건너에서 성현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제가 보증해요. 그 아이는 분명 엄청난 연주자가 될 겁니다. 제가 보는 눈은 있거든요.”
거기서 내 이야기가 나와버리니 쉽게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녀는 실제로 전생에도 현생에서도 나를 찾아왔었으니까.
보는 눈은 있다, 인가.
“그럼 제가 비슷한 입장에 계신 분들과 면담을 할 수 있게 도와드리는 건 어떨까요. 방금 이야기에서 나온 민재하고도 실제로 얘기를 나눠보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유키에가 그 이치카라는 아이의 재능을 믿고 충분한 시간을 꾸준히 노력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봉사 센터의 분들과의 대화에서 많은 것들을 얻어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다지 의미가 없는 시간이 되겠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이수정과 센터의 원장님은 내게 언제든지 부탁할 거리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수시로 말하고 있다.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해줄 수 있나요?”
다행히도 유키에는 나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궁금한 건 네 의견이지, 그 사람들 의견 같은 게 아니야! 하고 이상한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던 상황인데 말이다.
“물론이죠.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하핫. 역시 성현군은 대단하네요. 그 나이에 봉사 센터 하나를 움직이면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니.”
“대단한가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정말 엄청난 거예요. 당장 혜선이 아니, 담임 선생님께 물어보세요.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지.”
다행히도 유키에는 내가 내린 결론이 나름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서 어둑한 표정을 모두 지웠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
“눈이요?”
“그래요. 내 눈에 성현군은 분명, 피아니스트 김정석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처음에는 조금 잘못 봤지만요.”
“제가, 정석 선배보다 더요?”
유키에의 단언에 내가 흠칫 놀라 묻자 그녀는 뭘 그렇게 놀라냐는 식으로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성현군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고집불통 모리스 슈만에게도 인정을 받았고, 1학년의 나이로 벌써 학교에 3학년들은 물론이고 대학생들까지 그냥 꺾어버렸죠.”
“자, 잠깐만요···.”
갑자기 유키에서 내 칭찬을 늘어놓았기에 나는 낯부끄러워 그만두게 하려고 했으나, 유키에는 멈추질 않았다.
“거기에 성실하게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벌써 두터운 팬층을 만들었죠. 기자들은 또 얼마나 성현을 좋아하던지. 바이올린 콩쿠르에 온 기자들까지 제 앞에서 성현 이야기를 했어요. 이건 진짜 대단한 거예요.”
“그, 그만 좀요···.”
주변을 살펴보자 유키에의 열띤 연설에 이미 이목이 쏠려 있다.
동시에 내 얼굴은 더 화끈거렸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유키에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후후, 성현군이 너무 짓궂게 말해서 저도 좀 해봤어요.”
그 후,
한차례 차분히 커피를 마신 뒤, 나는 그 자리에서 봉사 센터와 민재 어머님에게 연락을 넣어 유키에의 사정을 설명해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나와 달리, 다들 즉석에서 괜찮다는 말을 해주었다.
-네가 소개해주는 사람이니까 이상한 사람일 리는 없을 거고, 그래 좋아.
-성현 학생의 부탁이니까. 민재도 좋아할 거예요.
모두 나를 믿으니까, 유키에도 믿는다는 반응이었다.
이로써 유키에 모리의 문제는 일단 내 손을 떠났다.
남은 일은 교습생분들과 관계자분들이 잘 풀어나갈 일이고, 나에게는 더 이상의 짐이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키에는 이런 상황을 내 생각보다 더 크게 받아들이는 듯 진심 어린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자칫 일이 커지고 길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 지금까지 내가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쌓아온 인연으로 금방 해결된 것이었다.
유키에 모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영향력’ 자체가 나라는 사람의 대단함을 증명하는 척도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뭐, 그렇게 굳이 치켜세워주니 나쁜 기분만은 또 아니었다.
전생에는 가지지 못했던 ‘영향력’을 지금의 나는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사력을 다해 노력한 내가 그만큼 변했다는 건, 지금까지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얻은 것만 같아서 참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번 일로 나는 성현군에게 빚을 진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언제든지 일본에 오게 되면 연락해주세요.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다 건너에서 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추가되었다.
아마 이런 것도 하나의 자산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도 좋은 거겠지.
지금까지 그런 걸 의식하고 해왔던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유키에와 나는 저녁 시간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훗날에 대해 혹은 일본 생활에 장점들에 대해서 말이다.
뭔가 속이 뻔히 보이는 대화 주제였지만 일단 일이 좋게 끝난 직후이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이윽고, 그녀는 호텔로 돌아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제자들이 자유 연습을 끝내고 모여있을 시각이었기 때문이라고 유키에는 말했다.
그렇게 내 커피값까지 계산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다시금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 그런데, 하나만 오해를 풀고 싶은 게 있어요.”
“오해요?”
“네. 성현군이 끝까지 아주 큰 오해를 하나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게 뭔데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날 보며 살짝 난처하다는 미소를 짓는 유키에.
“제가 모리스에게 무례를 범하고서라도 성현과 협주를 하고 싶다고 한 이유는 이치카 때문이 아니에요.”
이상하리만큼 나와의 협주에 집착하던 이유가, 그 악기를 놓은 아이 때문이 아니라니.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이치카는 애초부터 두 번째 이유였고 내가 처음부터 원하던 건 정말로 성현군과의 협주회, 그 자체였거든요.”
“협주회 자체가 목적이었다고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이제 막 파가니니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피아니스트와 어떻게 해서든 협주회를 하고자 요청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또 그 얼굴이네요? 이해가 안 간다는 그 표정이요.”
“예?”
“놀랄 거 없어요. 나는 성현군의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로 움직이거든요.”
“단순한 이유라면요···?”
“성현군은 앞으로 1년 이내에 세계무대에 오를 거예요. 그리고 저하고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연주자가 될 거니까요. 그런 성현군과 지금 협주회를 열지 않으면 다음은 정말 먼 훗날이 될 것 같았거든요.”
내가, 1년 이내에 세계무대에 오른다니.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일까.
나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헛웃음을 터트릴 생각이었는데, 막상 전생에서의 그녀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그냥 이상한 소리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실제로 전생에서도 남들이 자질을 알아보지 못하는 숨은 영재를 발굴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었으니까.
“내 눈이 좀 좋거든요. 믿어봐요.”
그렇게 말하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유키에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일정도 그렇고, 나도 미향예고 생활이 있으니 사실상 앞으로 꽤 오랫동안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다시 금방 유키에를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정말로, 내가 1년도 안 돼서 세계무대에 오르려나.
그건, 썩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유키에와의 일을 마친 다음 날,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독주회 준비에 착수했다.
-대단하구나.
모리스에게는 꼭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아서 유키에의 사정에 대해 간략해 이야기하니, 그 괴팍한 모리스 슈만마저 내 대처방법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손에 쥔 패만을 이용해서 패를 하나 더 늘렸다는, 무슨 포커 플레이어 같은 비유를 했는데···.
솔직히 공감은 잘 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남들을 내 편의대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저런 일을 해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걸로 더는 내 독주회를 막아서는 장벽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나는 드디어, 순수하게 나 자신을 위한 연습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후후후후후.”
너무 기쁜 마음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숨을 쉬다보니 그런 음침한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딸깍!
그런데 하필 그때, M스튜디오 내 연습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왜 여기서 계세요?”
그 사람은 너무 예상외의 인물이었던 터라 나는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