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99
99. 리솔루토 (Risoluto, 결연하게) -3
“왜 여기 있어요?”
내가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마주 본 그곳에는 휠체어 한 대가 있었다.
모리스가 타고 다니던 것보다 훨씬 신식의 형태로 불편함 없이 링거를 휴대할 수 있게 개조된 휠체어.
등장을 예견조차 하지 못했던 의외의 대상. 그는 다름 아닌 김순이 할머님이셨다.
“내가 못 올 곳에 온 게냐? 뭘 그리 놀라는 게야.”
내 반응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할머님이셨지만, 표정은 오히려 밝아 보였다.
“아뇨, 아뇨.”
마음에 짐을 덜어낸 후련함이 엿보이는 표정.
지은이와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으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얼굴이 좋아지셨을 줄은 몰랐다.
“그러면, 그래. 내가 어떻게 네가 오는 시간에 맞춰 나타난 건지 그게 궁금한 것이렷다?”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장난스럽게 그런 말을 하시는 할머님.
딱히 궁금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콩쿠르가 끝난 뒤에 주혁이에게 말해뒀었단다. 네가 스튜디오에 오면 연락을 달라고 말이야.”
주혁이?
나는 순간 못 알아들을 뻔했다.
M스튜디오의 마주혁 원장을 주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지금껏 내 주변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김순이 할머님은 국내 피아노계의 지평을 넓혔다는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오 선생님과 동시대 사람 아닌가.
세계 3대 피아노 콩쿠르 반열까지 오르지 못했을 뿐 지금도 김순이 할머님을 존경하는 사람은 많이 있다.
너무 ‘전설’의 반열이라 내 눈앞에 그 대상이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을 뿐 김순이 할머님은 그런 존재였다.
“이 늙은이에게 시간을 좀 주지 않으련? 오래 붙잡고 있지는 않으마.”
그리고 그 ‘전설’인 할머님은 사뭇 진중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전의 나를 볼 때 ‘어린 것’을 대하던 태도를 보이셨던 것에 비교해 보면 할머님이 얼마나 진지하신지는 바로 알 수 있다.
나는 방금까지 연주하던 악보를 단번에 모아 정리하고는 연습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튜디오의 1층으로 내려간 할머님과 나는 그 길로 이 커다란 건물 뒤편, 절반 정도는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한 공터로 향했다.
날씨는 푹푹 찌는 듯한 더위로 아지랑이가 보일 지경이었지만, 할머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 모든 풍경을 천천히 필름에 새기듯 그윽하게 바라보며 움직였다.
이윽고 한 커다란 나무 그늘에 들어가자 드디어 김순이 할머님은 휠체어를 멈춰 세우셨다.
그렇게 멍하니 다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바라보시던 할머님은 문득 입을 여셨다.
“고맙구나.”
무엇을, 이라는 질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지은이에 대한 것,
지은이와 화해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드린 것.
거기에 예선에도 발탁되지 않았던 지은이를 데려와 모리스 슈만 콩쿠르 결선에 올라갈 기회를 제공한 것.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는 걸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부모라는 것들도 지은이를 이렇게 올곧게 바라봐주지 않았단다.”
아주 느긋하게,
숨을 쉬는 것처럼 이야기를 꺼낸 할머님.
나는 차분히 그분의 옆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말을 들었다.
“선생이라는 놈들도, 기자 놈들도 다들 지은이 본인이 아니라 지은이의 등수, 연주만을 봤지.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란다. 하지만 그 여린 것에게 필요했던 건 그게 아니었지.”
지은이는 믿음과 애정을 원했다.
칸타빌레의 경지라는 목적을 얻고 처음으로 출발선에 선 나와 달리, 지은이에게 피아노란 그 믿음과 애정을 얻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아무리 피아노를 쳐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면 그 연주자는 언젠가 피아노를 놓게 되어있지. 아느냐?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은 사람을 메마르게 만드는 법이니 말이다.”
알다마다,
딱 전생의 내가 그랬다.
갈증에 시달려 돈과 술을 찾았던 적도 있으나 그 타는 목마름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았고, 나는 결국 서른 중반의 나이로 오케스트라를 떠났었다.
만일 할머님이 지은이를 위해 극단적인 시도를 하지 않다가 세상을 떠나셨다면, 분명 지은이는 전생의 내가 겪었던 그 끔찍한 갈증에 빠졌을 것이다.
“나는 불안했단다. 내가 떠나고 나면 혼자 남을 지은이가 너무 가엽고 안타까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게다. 하지만,”
할머님은 그렇게 말을 끊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선 나를 응시하며 느긋하게 말을 이으셨다.
“이젠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단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네.”
나는 편안한 얼굴의 김순이 할머님에게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신 할머님은 푸슉, 하며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나는 버튼을 누르시더니 다시금 입을 여셨다.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휠체어에 걸린 진통제가 투여되는 소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자, 그럼 다 죽어가는 노친네의 넋두리는 이 정도로 하고! 어디 이동해보자꾸나.”
“이, 이동이요?”
그런데 억양을 바꿔 큰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시는 할머님.
너무 갑작스러운 태도 전환에 내가 놀라 묻자 할머님은 이상한 것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셨다.
“그래. 얼른 연습실로 가야지 않느냐. 이번 독주회에 아주 사활을 걸었다고 모리스 그 노인네가 소리 소리를 치던데, 들어나 봐야지.”
“체력이 괜찮으신 거예요?”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할머니는 잠시 입을 우물우물하시더니 아, 입을 벌리고 소리를 치셨다.
“예끼 이놈아! 내가 왕년에는 내로라하는 남정네들 다 젖히고 스포츠카 타던 사람이다. 괜한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얼른 움직이기나 해!”
모리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귀청이 떨어지라고 소리를 치시는 할머님.
정말, 너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셔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받기만 하고 끝내는 것을 제일 싫어한단 말인 게다.”
“어? 그러면, 그 말씀은 다시 말해서···!”
“그래. 내가 네 독주회 연습을 봐주마.”
이렇게 정말 뜬금없이 나는 ‘전설’에 속하는 1세대 피아니스트에게 1대1 레슨을 받게 되었다.
“네에?!”
***
열병을 앓고 나서 이제 막 3일째.
솔직히 나도 현재의 내 상황을 그리 달갑게만 보고 있던 상황은 아니었다.
당장 오늘부터 나 자신의 연주 솜씨를 갈고닦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내가 아는 연습법을 도입하기에 나는 아직 완성된 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 이번 모리스 슈만 콩쿠르를 준비할 시기에는 나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커다란 벽 하나를 넘었는데, 그 위에는 또 말도 안 되게 큰 벽이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었다.
다시금 내 실력이 정체되었다.
그 사실은 깨닫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 신장이 180cm를 넘기게 되는 몸의 성장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야 완벽한 전생의 연주법과 현생의 연주법을 합친 새로운 결과물을 탄생시킬 것 아닌가.
즉, 당장 오늘부터 내 실력 향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게 내가 김순이 할머님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음? 방금 그 지오이오소(즐겁게)를 왜 그렇게 연주하는 게냐.”
“네?”
김순이 할머님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은 지적해주셨다.
“왜 1악장의 콘 아르도레(열정적으로)와 2악장의 지오이오소를 연주하는데,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야···.”
이렇게 연주해왔으니까?
라는 말을 이어서 말하려는데 할머님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쿵, 하고 바닥을 찍고 말했다.
“눕혀라.”
“네?”
“1악장과 2악장에서의 차별점을 어렵게 ‘표현’하려고 애쓰지 말고 악장의 변환에 맞춰서 건반을 누르는 네 손의 각도를 조금만 눕혀 보란 말이다.”
그래도 되는 건가?
나는 갖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일단은 할머님이 해주신 어드바이스에 맞춰 연주를 해봤다.
거센 악상을 쉴 틈 없이 밀어붙여 ‘열정’을 보여주고 이어지는 2악장에서 의도적으로 손을 비틀어 건반을 누르는 각도를 바꿔봤다.
딱, 손가락에 부담이 안 될 만큼만, 그러면서도 충분히 변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발적으로 말이다.
그러자,
정말로 변화가 생겼다.
손끝으로 꾹꾹 눌러 담듯 울려 퍼지던 음색이 손을 비틀자, 손이 건반 위에서 미끄러지며 의식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선율이 가볍고 통통 튀게 변했다.
“오오오?”
스스로 해냈음에도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변화.
“어떠냐. 재미있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손을 쳐다보고 있던 나를 보며 할머님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신기하네요.”
“후후, 그래. 알았으면 얼른 계속해 보거라. 네 연주는 꽤나 듣기가 좋으니까.”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놓고 최고의 칭찬을 날려주시는 할머님.
나는 감사한 마음에 더더욱 열심히 건반을 두르리며 연습을 속행했다.
할머님은 그 이후에도,
“더 깊게 밟아 보거라.”
“좀 더 의자를 당겨서 앉아 보아라.”
“허리를 펴고 위를 보며 연주해봐라.”
이처럼 단순한 지시만을 입 밖으로 내셨을 뿐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대로 몸을 움직이니 훨씬 곡을 연주하는 부담이 줄어들었다.
어떻게 손끝을 움직일지,
어떤 악상을 무엇으로 표현할지,
오로지 그것만을 집중하던 내게 몸과 피아노의 거리를 바꾸고, 자세를 바꿔보라는 지시는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던 다른 지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정말로 이런 식으로 표현을 쉽고 단순하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깊이 있는 할머님의 연륜과 그곳에서 묻어나는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단번에 해결책을 떠올리는 통찰력.
할머님이 대체 어떻게 내로라하는 1세대 피아니스트들 사이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할머님은 딱 사흘간 나와의 레슨을 진행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다양한 것들을 배우는 사이 시간은 농담이 아니라 쏜살같이 흘러가 벌써 3일이 흐르고 말았다.
“그래.”
사흘 전 돌연 나를 찾아오셔서 날 데리고 갔던 그 큰 너무 그늘 밑에서 할머님은 입을 여셨다.
그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평온하고 따스한 어조로 말이다.
“어떻더냐?”
“어떠냐니, 뭘 말씀이신가요?”
“이 노친네의 다양한 잡 기술들과 얄팍한 지혜가 네 연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느냐?”
“조금이라뇨. 정말 상상도 못 한 방법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오늘이 레슨의 마지막 날이라는 게 너무 아쉬워서 하루라도 더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인데요.”
“핫, 하하하핫! 빈말이라도 고맙구나.”
빈말 아닌데···?
하지만 기분 좋게 웃으시면서 하신 그 말씀이 정중한 거절이라는 것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할머님은 사흘 전보다 눈에 띄게 수척해지셨다.
진통제를 계속 맞아가시면서 티는 내지 않으셨지만, 옆에서 지켜보니 정말 실감할 수 있었다.
할머님에게 남은 시간이 이젠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해봐라.”
“왜 지은이에게는 이런 레슨을 해주지 않으신 건가요.”
어젯밤의 지은이와의 통화로 들었다.
할머니는 일평생 단 한 번도 지은이를 직접 가르쳐주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 천재는 범재의 고충을 모른다더니. 네가 딱 그 격이구나.”
“네?”
“난 지금까지 쉰 명이 넘는 아이를 가르쳐 봤단다. 하지만, 너처럼 한 마디에 모든 의미를 다 이해하는 영리한 아이는 처음 봤다는 게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싱글벙글하신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할머님.
“넌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는 소리다. 내게 남은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아마 하루는 고사하고 한 달을 가르치겠다고 덤벼들었을지 모르지.”
“그건, 정말 감사한 말씀인데요?”
“핫! 그래. 네가 그리 말해주니 정말 편히 눈 감을 수 있겠구나.”
할머님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떠드는 것만으로도 체력적으로 무리가 오셨는지 계속 허파에서 바람이 세는 소리를 내셨다.
하지만, 김순이 할머님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보다 더한 안락함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너는 천재로서 앞으로도 너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들과 마주하며 지내게 될 게다. 그러니 나는 반대로 네게 아무도 해주지 않을 이야기를 해주마.”
결연한 태도로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 말씀하시는 할머님.
나는 그 말을 새겨듣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똑똑한 아이란다. 정말 똑똑하지만, 그래도 아직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것들이 아주 많아. 성현아. 이 사흘간 내가 지켜본바 너는 항상 어떤 해답을 찾을 때,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더구나. 그렇지?”
확실히, 나는 어떤 문제점이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기에 앞서 연습실에 틀어박혀 고민을 거듭해왔다.
내게는 전생의 경험이 있으니 지금까진 문제가 없었지만, ‘프로’의 레벨에 도달한 현재 이야기는 좀 달라졌다.
“네 안에 있는 해답도 물론 훌륭한 답이겠지만, 이따금 주변을 둘러보는 게 언젠가는 큰 도움이 될 거란다.”
“네.”
할머님의 진중한 말씀을 나 역시 결연한 언행으로 받아들였고, 할머님은 그런 내 모습을 흡족하다는 듯 바라보셨다.
갑작스러운 사흘간의 놀라운 특훈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할머님과의 특훈은 세상 그 어디의 그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기에, 나는 짧지만 아주 강렬했던 이 사흘간의 기억을 다신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후, 할머님은 무리하게 퇴원하셨던 것과 반대로 다시금 병원으로 향하셨다.
내가 그 의중을 묻자,
“우리 똥강아지가 내게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데, 이 노친네가 너무 일찍 눈을 감으면 안 되겠지.”
즉, 지은이를 위한 결정이셨던 것이다.
실제로 할머님은 의사가 진단을 내렸던 사망예정일까지 이제 고작 열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모리스 슈만이 준비해준 독주회는 단 3일을 앞두고 있다.
나도, 지은이도 그리고 이재상도 각자 다른 곳에서 사력을 다해 독주회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바로 오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결연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드디어 지은이와 나눈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