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0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00화(101/412)
#100. 행복회로
육상, 수영, 사격, 양궁 등과 같은 개인 종목에 비해 야구에서 개인 기록을 쌓기 힘든 건 수시로 찾아오는 팀과 개인 사이의 선택지 때문이다.
연속 경기 안타에 도전 중인 타자가 9회말 무사 주자 1루, 동점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다면? 앞선 타석에서 아직 안타를 기록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누가 봐도 희생번트가 필요한 그 상황에서 과연 강공을 할 수 있을까?
벤치는? 감독은 과연 그 상황에서 선수에게 번트를 지시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거기에 시시각각 무너지려는 멘탈을 잡는 것 또한 문제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도 할 만큼 했잖아? 그냥 다 포기하면 편해지지 않을까?
이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런 경험을 쌓게 될 때쯤에는 정작 육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슬픈 일이다.
그래서 많은 선수들이 은퇴 전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같은 말을 남기는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수혁은 기록에 도전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아아아악!
– 아앗! 큽니다! 큽니다! 큽니다! 넘어 가느냐? 가느냐? 넘어! 갔습니다! 한수혁 선수가 승패를 결정짓는 시즌 35호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 대단하네요! 비록 어제 경기에서 패하며 워리어스의 연승 기록은 깨졌지만 오늘 다시 승리하면서 2위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 위원님, 팀 성적도 성적이지만 7월 둘째 주 현재 35개의 홈런, 어떻게 보십니까? 한번 기록에 도전해볼 만할까요?
– 물론이죠. 6월 한 달 동안 주춤했던 한수혁 선수의 홈런이 7월 들어 연달아 터지고 있지 않습니까? 시즌 초반 한수혁 선수가 몰아쳤던 홈런을 생각하면 국내 신기록인 56개에 충분히 도전해볼 만할 거 같습니다
수원을 밀어내고 2위 자리에 오른 워리어스의 약진이 계속되었다.
홈에서 열린 대구와의 3연전, 첫 번째 경기를 이기며 연승 숫자를 8로 늘린 워리어스.
하지만 2차전에서 대구에 일격을 당하며 8연승이 마감되었다.
일각에서는 연승이 끊긴 것에 대한 후유증을 걱정하기도 했다.
연승이 끝난 후 연패가 시작되는 건 야구계에서 아주 흔한 일이니까.
그러나 워리어스에는 한수혁이 있었다.
경기를 끝내는 한수혁의 시즌 35호 홈런.
끝내기 홈런을 쳐낸 그가 동료들에 둘러싸여 축하를 받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이대준 감독은 앞으로 한수혁의 타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수혁을 2번에 배치한 적이 몇 번 있었고, 결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 외 경기에서 3번에 배치되었을 때는?
그때도 역시 좋았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한수혁이 2번으로 들어섰을 때 중심타선에 배치되는 선수들, 그러니까 조성오, 월터, 장덕수, 안치욱 같은 선수들의 멘탈이 조금 흔들린다는 점이었다.
경험이 많은 조성오는 그나마 낫지만 다른 선수들은 앞에서 서형주와 한수혁이 만든 찬스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는 거 같았다.
그래서 이대준은 다시 한수혁의 타순을 3번으로 내렸다.
하지만 홈런이 추가되는 속도를 보니 그 생각이 자꾸 흔들린다.
지난 수원과의 경기가 끝난 후 한수혁과 가졌던 면담이 떠올랐다.
‘수혁아, 혹시 홈런 신기록 욕심나냐?’
‘홈런 기록이요?’
사실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세상에 홈런 신기록을 욕심 안 내는 선수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한수혁의 대답은 이대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글쎄요. 그냥 경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쌓이면 모를까, 딱히 기록을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음.’
이대준 역시 한때 리그를 대표하던 강타자였다.
홈런 신기록에 도전할 정도의 파워히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집중적으로 장타를 노리면 시즌 30개 정도는 가능했던 그런 선수였다.
그래서 안다. 저 나이 때의 선수가 홈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지, 그리고 그 욕심을 떨쳐 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한수혁이 홈런 신기록에 대한 욕심을 대놓고 드러냈다면 대처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팀에서도 너를 최대한 배려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홈런만 노리다 보면 밸런스가 흩어질 수도 있으니 주의하라는 둥, 개인 기록보다는 팀이 먼저라는 둥, 그런 뻔한 얘기를 하면서 긴장을 풀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앉은 루키는 정말 그런 신기록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대준을 바라보았다.
기껏 큰 맘 먹고 면담의 시간을 가진 이대준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면담 이후 이대준은 의식적으로 한수혁의 타순을 조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다.
그날 경기에 따라, 그리고 다른 타자들의 컨디션에 따라 2번과 3번을 오가며 자유롭게 라인업을 작성했다. 그리고 한수혁은 두 자리 모두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그렇게 한수혁의 타순에 대한 고민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하다.
고작 스무 살짜리 애송이가 저런 마인드를 가질 수 있을까?
야구선수라는 직업을 떠나,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내딛은 애송이가 저렇게 절제되고 냉철한 판단을 할 수있을까?
말이 되는 건가?
한수혁에 대해 알아갈수록 계속 의문만 더 쌓여가는 이대준이었다.
* * *
[한수혁의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 과연 가능할까?] [산술적으로는 가능, 다만 변수는 WBC 브레이크] [야구전문가 고동식 위원 “투수들이 피하지만 않으면 무조건 가능”] [KBO 야구팬들 “24년 된 기록, 이제는 깨질 때도 됐다” 한 목소리]내 홈런 신기록 도전 여부를 놓고 야구판이 벌써부터 시끄럽다.
현재까지 게임당 0.4개 꼴로 홈런을 쳤으니 남은 경기수를 감안할 때 22개 정도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론과 WBC브레이크, 그리고 하반기 체력 문제 등으로 인해 힘들 것이라는 부정론이 맞서고 있는 가운데. 한 가지 의외인 것은 워리어스 외 다른 팀 팬들의 여론이었다.
└갓직히 한수혁이 타석에 서면 짜증부터 나지만 홈런 신기록은 깨져야 맞지
└ㅇㅈ 24년이면 진짜 해도 해도 너무 오래 됐음
└기왕이면 56개가 아니라 60개도 넘겨서 아시아 기록까지 깨 버리길
└좆까는 소리 하고 있네. 오래 됐다고 무조건 기록이 깨져야 함? 누가 그런 걸 정함?
└응 대구 팬은 나가 있고, 아무튼 요즘 크보에서 홈런이 너무 안 나오긴 안 나옴
└ㅇㅇ 예전에는 일본 애들보고 스몰볼이라고 놀렸는데 요즘 보면 우리가 스몰볼임
└그 동네는 툭하면 160 던지고 50홈런 치고 그러더라. 예전의 일본이 아님
└2023년에 그 새끼들한테 개 발린 거 생각하면 하…
└일본놈들 생각해서라도 한수혁 잘되라고 응원은 못 하겠지만 훼방은 안 놓았으면 싶음
KBO 팬들의 여론이 이렇게 형성된 건 2020년대에 들어서며 심화되고 있는 세계 야구와 한국 야구 간의 수준 차이 때문이었다.
지난 2023년 WBC에서 참패를 당했을 때 한국 야구팬들이 충격을 먹은 건 단순히 경기에 져서가 아니었다.
우리 투수들이 140에서 145㎞/h의 공을 간신히 던지고 150만 던져도 강속구라고 칭찬을 받는 와중에 일본 대표팀의 투수들은 155, 160㎞/h을 펑펑 던져댔다.
그뿐인가.
홈런 30개만 쳐도 홈런왕 타이틀을 노릴 수 있을 정도로 KBO의 타자 수준이 하향 평준화된 상황에서 거대한 덩치의 일본 타자들이 홈런포를 펑펑 날리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한때 메이저리그와 한국 야구는 빅볼을 추구하고, 일본 야구는 작전 중심의 스몰볼이라는 인식이 퍼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옛 이야기다. 한국 야구가 현실에 안주하는 동안 세계 야구계는 엄청난 발전을 이뤄냈고, 이는 야구팬들의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 야구계 전체에 한수혁의 홈런 신기록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되는 가운데 워리어스는 팔콘스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1차전은 우천으로 취소되었다. WBC브레이크 때문에 어지간하면 취소 경기를 만들지 않으려 애썼지만 도저히 경기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그리고 이어진 2차전에는 류한결, 3차전 라파엘 블랑코가 등판해 필살의 의지를 다졌다.
반면 워리어스는 3선발 이만식, 4선발 천상진을 내세웠다.
약간은 미스매치업인 그 2연전에서 워리어스는 1승 1패를 기록했다.
국내 최고의 투수라는 자존심을 가진 류한결은 한수혁을 피하지 않았고, 결국 또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한수혁의 홈런 숫자가 또다시 늘어났다.
시즌 타율 0.430, 출루율 0.539, 장타율 0.985, 홈런 36개 74타점, 도루 18개.
일반적인 타자들이 풀 시즌을 치르고도 달성하기 힘든 기록을 한수혁이 전반기 만에 달성했고, 워리어스는 여전히 2위 자리를 지켜냈다.
하지만 빡빡한 경기 일정이 계속 워리어스를 압박했다.
이쯤에서 하위권 팀을 만나며 승수를 좀 더 쌓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앞을 기다리고 있는 건 2위 자리를 빼앗기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수원 커맨더스였다.
그렇게 수원과의 3연전이 또 다시 시작되었다.
* * *
“다들 주목.”
주장 정대한의 말에 수원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지난 경기 때는 우리가 챔피언이었고 쟤들이 도전자였다. 그리고 우리는 3연패를 했지.”
“…….”
“혹시나 아직까지도 쟤들이 우리 밑이라고 생각하거나, 만만하게 보는 놈 있으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둔다.”
평소 어지간한 일에는 인상 한 번 찌푸리는 법 없는 주장의 엄포에 수원 선수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네, 주장!”
“좋아. 이번 3연전에서 우리는 워리어스에 도전하는 입장이다. 플레이 하나 소홀히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한다. 하나, 둘, 셋 하면 파이팅이다. 하나, 둘, 셋!”
“파이팅!”
선수들을 다독인 정대한이 전광판에 새겨진 워리어스 선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훑어 내려갔다.
1번 중견수 서형주
2번 좌익수 최민석
3번 유격수 한수혁
4번 1루수 조성오
5번 우익수 월터 스미스
6번 포수 장덕수
7번 2루수 이창모
8번 3루수 안치욱
9번 지명타자 강진석
선발 투수 라이언 스타크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온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시즌 초만 해도 엉성하고 헐겁게 느껴졌던 워리어스의 타순에 빈틈이 보이질 않는다.
오늘 선발인 좌완 최경재에 대응하기 위해 우타자 위주로 짜인 타선.
1번 같은 9번 타자 최민석이 2번으로 전진 배치되면서 마치 리드오프가 두 명이 된 느낌이다.
3번에 자리 잡은 괴물은 논외로 하자.
거기를 지나면 3할에 17홈런 60타점을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베테랑이 나온다.
그리고 5번과 6번의 거포, 끈질김 면에서는 그 누구보다 까다로운 7번 타자까지 3명의 우타자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부터 2번 혹은 5번 상위타순에 서던 안치욱이 8번에 배치되었고, 심지어 9번으로 나서는 강진석 역시 일발 장타력이 있는 우타자다.
‘미친, 크크.’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지난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워리어스를 상대해온 수원, 그 대부분의 경기에 주전 포수 마스크를 쓴 정대한은 알고 있다.
이 모든 변화가 저 3번 자리에 배치된 괴물의 입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걸.
“형, 그냥 1회에 저놈 등짝 한 대 맞춰버릴까? 그러면 뭐 선수 보호 차원에서 경기에서 빼거나 그러지 않을까?”
“경재야, 저기 관중석 분위기 좀 봐라.”
오늘 선발로 나설 최경재가 포수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분명 이곳은 수원의 홈구장이건만 원정석은 물론이고 거의 3분의 2 이상이 워리어스 팬들로 덮여 있었다.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 거기에 비인기팀의 슬픔이었다.
“여기가 홈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난다. 적진 한복판이다. 한수혁 맞췄다가 관중들 난입이라도 하면 나도 너 못 지켜준다.”
“…시발.”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최경재는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올 시즌 워리어스와의 경기에 등판해 단 한 번도 승리를 따낸 적이 없다.
한수혁에게 말도 안 되는 홈런을 맞고 지거나, 혹은 한수혁을 피하다가 다른 선수에게 맞거나.
하도 저 괴물을 신경 쓰다 보니 저 팀만 만나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된다.
그렇다면, 적으로 만나기 너무 버거운 상대라면.
‘차라리 한 팀이 되는 건 어떨까?’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자격을 취득하게 되는 최경재는 딱히 빅리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낯선 땅에 가서 새로 시작을 하는 것보다는 익숙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걸 더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대한이 형.”
“왜.”
“혹시 워리어스에서 뛸 생각 없수?”
“뭐? 그게 대체 뭔 소리야?”
FA취득이 다가오며 다음에는 어디에서 뛰게 될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맹세코 단 한 번도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악몽이 계속된다면.
저 한수혁이라는 괴물이 저 팀에 계속 버티고 있다면.
‘대한이 형 계약 기간이 2년 남았지?’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가 조금 이상한 곳에서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