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0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04화(105/412)
#104. 올스타전
회귀 후 내가 불편을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뭔가를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온다는 거다.
진짜 내 모습, 그러니까 15년 묵은 베테랑의 자아를 억누르며 스무 살 애송이의 태도를 연기해야 할 때 나는 종종 현타를 느끼곤 한다.
그나마 워리어스 안에서는 사정이 좀 낫다. 반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며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덕이다.
하지만…….
“여! 홈런왕! 악수나 한번 해보자. 응?”
지난 시즌까지 밥 먹듯이 홈런 타이틀을 차지했던, 올 시즌에는 내게 밀려 조금은 감정이 상했을 수도 있는 대구 1루수 이수영이라든지.
“넌 나쁜 놈이야… 알지?”
“제가요?”
“저기 경재, 겁먹어서 이쪽으로 오지도 못하는 거 봐. 애를 얼마나 괴롭혔으면.”
“제가 최경재 선배님을요?”
타석이 아닌 곳에서 얘기를 처음 나누게 된 수원의 정대한, 최경재 배터리라든지.
“수혁아. 올스타 축하한다.”
“형님도요.”
“와, 수혁이가 형님이라고 부르네? 준영이 형님, 언제부터 둘이 친한 사이가 된 거예요?”
임준영과 내가 편하게 말을 터놓는 걸 신기해하는 인천의 외야수 강우찬이라든지.
“안녕하세요, 선배님.”
“…….”
먼저 인사를 했음에도 대꾸조차 하지 않는 인천의 꼰대 3루수 민주현이라든지.
이런 다른 팀 선수들 앞에서 나는 또 스무 살 애송이의 모습을 연기하는 중이다.
젠장.
이게 그라운드에서 시합 중에 스쳐가며 입을 터는 거랑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차라리 내게 적대감을 보이는 민주현 같은 놈은 상대하기가 쉽지만, 호의적인 태도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대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자, 다들 모여봐. 거기 구석에 잡담 중인 아저씨들도 이쪽으로, 올스타전이라고 해도 그래도 시합인데 작전은 한번 세워봐야지.”
“그냥 한수혁, 저놈 1번에 박아놓고 홈런 4개 치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오늘 우리 팀의 감독을 맡게 된 인천의 구용식 감독이 얼굴에 미소를 활짝 띄운 채 나를 바라보았다.
드림 올스타와 나눔 올스타, 두 팀으로 나눠 치러지는 이번 올스타전에서 워리어스는 1위 인천, 3위 수원, 9위 대구, 10위 부산과 함께 드림 올스타에 속하게 되었다.
팀이 최하위에 처박힌 데 분노하고 실망한 부산 팬들이 올스타 투표에 흥미를 잃으며 타이탄스 선수라고는 중간 계투 한 명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현 리그 1, 2, 3, 9, 10위, 이렇게 다섯 팀이 연합을 하게 되었다.
“농담이 아니라 홈런 더비 취소된 것 때문에 한수혁 홈런 못 본다고 팬들 난리인데, 진짜 1번에 서 볼래? 수혁아, 어떠냐? 이대준 감독, 괜찮겠어요?”
구용식 감독의 말에 오늘 3루 주루 코치를 맡게 된 이대준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네요.”
“오케이. 그럼 1번 한수혁.”
정규 경기 라인업 작성의 목적이 승리라면, 올스타전 라인업은 최대한 팬들에 대한 서비스가 담겨 있어야 한다.
가뜩이나 올해는 WBC 때문에 홈런더비를 포함한 전야제가 취소되었으니 더더욱 팬들은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1번이라… 뭐 상관없겠지.
“자, 라인업 완성이다. 다들 확인하고, 선발 출전 못 한 선수들도 교체로 골고루 기회 줄 테니까 몸 풀어 두고. 아, WBC 나갈 선수들은 부상 안 당하게 최대한 조심해. 이게 제일 중요하다. 내 말 알아들었지?”
“네! 감독님.”
“좋아, 그럼 내 잔소리는 여기까지. 오늘 하루라도 다들 축제를 즐겨보자고.”
프런트 운영팀장 출신으로 감독 자리에 오른, 현재 10개 구단 감독 중 가장 세이버매트릭스를 잘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구용식 감독이 다른 팀 감독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가 작성한 드림 올스타 팀 라인업은 이랬다.
1번 유격수 한수혁(서울 워리어스)
2번 좌익수 최연우(수원 커맨더스)
3번 중견수 강우찬(인천 레인저스)
4번 1루수 이수영(대구 버팔로스)
5번 우익수 리암 앤더슨(대구 버팔로스)
6번 지명타자 조성오(서울 워리어스)
7번 포수 정대한(수원 커맨더스)
8번 3루수 민주현(인천 레인저스)
9번 2루수 손재후(인천 레인저스)
선발투수 임준영
이번 올스타전에 선발된 워리어스 선수는 모두 3명.
그중 나만이 유일하게 팬 투표로 뽑혔고, 장덕수 선배와 조성오 선배는 감독 추천으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팀 성적에 비하면 조금 아쉬운 결과다.
브룩스 파커와 천상진 선배의 이름이 거론되기는 했는데, 둘 다 전반기 막바지 자잘한 부상을 입는 통에 올스타 출전이 무산되었다.
내년에는 올스타 명단에 조금 더 많은 워리어스 선수들이 포함될 수 있을 거다.
민주현에 밀린 안치욱이라든지, 성장하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서형주라든지…….
음, 그놈들이 올스타에 선정돼서 기고만장하는 걸 별로 보고 싶지 않긴 한데.
“와아아아!”
“에코! 아이즈! 에코! 에코! 에코 아이즈!”
경기 시작에 앞서 축하 공연이 시작되었다.
원래 KBO에서는 최우선적으로 민예린을 초대하려 했단다.
이름값은 둘째 치고 그동안 잠실야구장에서 그녀가 보여준 축하공연 퍼포먼스가 가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운동경기장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공연이라나 뭐라나.
하지만 민예린은 KBO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싫은데요.’
‘네?’
‘워리어스 선수라고 해봐야 고작 3명이 전부인데 제가 무슨 힘이 나서 축하 공연을 하겠어요. 내년에 전 포지션 싹쓸이하면 그때 하는 걸로 하죠.’
‘…….’
뭐, 그녀 나름대로는 워리어스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였겠지.
어쨌든 그런 이유로 민예린을 대신해 에코아이즈라는 걸그룹이 무대에 서게 되었다.
“우아아아아!”
그렇게 걸그룹의 노래에 맞춰 선수들과 관객들이 몸을 들썩이던 그때.
둠칫둠칫
덕아웃에 얌전히 앉아 있던 장덕수 선배가 그 거대한 몸을 둠칫거리며 그라운드로 올라갔다.
몸이 너무 커서 도저히 같은 안무라고는 느껴지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확실히 퀄리티가 느껴지는 그런 춤, 아니, 몸짓이었다.
뭐지, 이거 깜짝 이벤트 같은 건가.
둠칫둠칫두둠칫
“오오! 덕수!”
“와아아!”
“장덕수! 장덕수!”
선수들의 호응에 신이 난 장덕수 선배가 덕아웃 바로 앞에서 신나게 안무를 따라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에코아이즈가 그를 향해 손짓하자 아무 망설임 없이 마운드 위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둠칫둠칫두둠칫
“크하하하하!”
“뭐야! 쟤 왜 잘해?”
“장덕수! 최고다!”
그렇게 노래 한 곡이 끝나고 에코아이즈와 호흡을 맞췄던 장덕수 선배가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선배……?”
“덕수야, 잘하네? 너 이런 건 언제 연습한 거야?”
“신나네유. 원래 에코아이즈 팬이에유.”
장덕수 선배의 표정이 유난히 개운해 보인다.
음, 이 선배가 걸그룹 팬이었구나.
겉모습만 봐서는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는 조폭 출신 사장처럼 생겼는데… 트로트 가수들 몇 명 데리고 지방 행사 돌고 막 그런.
저기에 옆구리에 일수가방 같은 거 하나 들면 완벽할 거 같기도 하고.
* * *
– 야구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길고 길었던 2027 KBO 전반기가 드디어 끝나고, 올스타전이 찾아왔습니다. 고척 돔구장에서 열리는 드림 올스타와 나눔 올스타 간의 경기, 저는 중계를 맡은 아나운서 박철민, 제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 고동식 해설위원님 나와 계십니다.
– 안녕하세요, 고동식입니다.
– 오늘따라 유난히 표정이 개운해 보시네요, 위원님?
– 아, 네, 오늘 하루만큼은 제가 좀 더 자유롭게 입을 털… 말을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군요.
– 좋습니다. 그럼 선공에 나설 드림 올스타의 라인업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 오늘은 한수혁 선수가 1번 타자로 나서는군요.
– 당연하죠. 현 시점에서 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선수는 아무래도 한수혁일 테니까요.
– 하긴, 이번 올스타 투표에서 2위와 최다 득표 차를 기록했죠.
– 맞습니다. WBC 때문에 이번 올스타전 자체가 조금 축소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오늘 경기에서 양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길 기대하겠습니다. 팬들에게는 1년에 한 번뿐인 축제이니까요.
– 말씀드리는 순간, 드림 올스타의 리드오프 한수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상대할 투수는 나눔 올스타의 선발 류한결입니다.
* * *
‘저 녀석은 대체…….’
생각할수록 징글징글한 놈이다.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올 시즌 후 자신의 빅리그 진출이 실패한다면, 아니, 성공하더라도 계약금의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 저놈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괴물.
‘근데 재미있단 말이야.’
물론 류한결이 느끼는 감정은 미움이나 증오 같은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냥 흔한 1년 차 신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홈런을 펑펑 터뜨리고, 4할을 치고 해봐야 고작 신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올해까지 7시즌 동안 팔콘스의 에이스로 뛰며 별의별 꼴을 다 당했고, 또 많은 괴물 타자들을 상대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KBO를 폭파시키고 빅리그로 건너간 용병들도 있었다. 그런 괴물들과 치고 받은 시간이 무려 7년이다.
때문에 처음 한수혁에게 홈런을 맞았을 때는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조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을 뿐이다.
하지만 저 녀석과의 승부가 계속 누적되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는 걸.
이상하게 저놈만 만나면 속을 훤히 읽힌 기분이다.
애초에 타구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빗맞은 것 같은 타구가 훨훨 날아가 담장을 넘겨버리곤 한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자신과 함께 한수혁에게 제대로 호구를 잡힌 수원 최경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국가대표팀에서 친해진 둘은 사석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관계였다.
-한수혁, 저놈 왜 저렇게 잘 치냐? 경재야, 이게 대체 말이 되냐?
-류한결.
-왜.
-난 지금 심각하게 워리어스 고민하는 중.
-뭘 고민해? 워리어스를 고민한다는 게 뭔 소리야?
-FA 때 거기로 가려고.
-그게 무슨… 너 대한이 형 없으면 공 못 던지겠다며.
-ㅇㅇ 그래서 대한이 형도 꼬시는 중. 내년에 어차피 두번째 FA잖아.
-미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자신과 동갑내기이자 국가를 대표하는 좌완 하나가 한수혁에게 항복, 아니, 투항을 결심한 상태였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최경재가 한수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후 류한결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과 한수혁이 대결했던 영상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모르겠다.
아무리 돌려봐도 건지는 게 없었다.
처음에는 체인지업 타이밍을 읽힌 건가 의심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다른 공도 기가 막히게 받아 쳐 홈런으로 만들어버렸다.
전력분석팀, 그리고 포수인 안철용의 도움을 받아 영상을 분석하고, 또 분석해봤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찾아도 약점이 없는 타자,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공을 잘 치는 타자.
한수혁에 대해 그렇게 결론을 내린 류한결은 이후 그와의 승부를 피하는 중이었다.
일단은 팔콘스가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것, 지난 7년간 자신을 응원해준 팀에게 마지막 선물을 해준 후 미국으로 진출하는 것.
한수혁을 이기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류한결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남은 하반기 동안 저 녀석과 상대할 일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 순리대로 생각하면 그냥 피해 가는 게 맞다. 팀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하지만 지난 7시즌 내내 국내 최고 투수로 군림했던 류한결의 자존심이 스스로의 등을 떠밀었다.
승부하라고, 미국으로 진출하기 전 누가 최고인지 똑똑히 알려주고 가라고.
그렇기에 류한결은 지금 한수혁을 상대로 새로운 무기를 꺼내들 생각이었다. 하반기 만나게 될 저 괴물의 머릿속에 혼란을 심어 주기 위한 그런 신무기였다
미국 진출을 대비해 남몰래 익히고 있는 슬라이더.
횡이 아닌 종으로 떨어지는 이 슬라이더는 체인지업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면서도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
한수혁이 정말 자신의 체인지업 타이밍을 알고 치는 거라면 이 슬라이더로 녀석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스트라이크!”
초구 바깥쪽 포심에 한수혁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볼.”
몸쪽 낮은 싱커에도 역시 무반응.
느낌이 왔다. 한수혁이 지금 큰 거 한 방을 노리고 있다는 것.
하긴, 당연한 일이다. 오늘은 올스타전이니까.
투수는 삼진을 노리고, 타자는 홈런을 노리고,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거다.
그래, 마음껏 큰 걸 노려라. 그래야 스윙이 더 커질 테니까.
“스트라이크!”
바깥쪽 존을 훑고 지나가는 커브에도 한수혁의 배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볼.”
몸쪽 높은 곳으로 던진 포심이 생각보다 더 크게 떠버리며 볼이 선언되었다.
역시나 한수혁은 반응하지 않았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이다. 원래대로라면 체인지업을 던질 타이밍.
류한결이 포수를 향해 사인을 냈고, 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류한결의 손 끝에서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신 무기, 슬라이더가 뿜어져 나왔다.
포심보다는 느리지만 체인지업보다는 훨씬 빠른, 타자 앞에서 큰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공.
그 공을 던진 류한결이 이어질 헛스윙을 기대하며 살짝 웃음을 짓던 그 순간.
따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타격음과 함께 하얀 물체가 쏜살같이 머리 위로 날아가버렸다.
올 시즌 몇 차례나 당했던 그 악몽의 재현에 류한결이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 말았다.
“하아…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