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0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07화(108/412)
#107. 한수혁의 자리
‘음,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라고……?’
2023년 WBC의 참패를 극복하기 위해 전임감독제를 부활시킨 KBO.
워리어스의 지휘봉을 잡고 이대준 등 많은 선수들을 발굴해낸 명감독 정윤석, 일선에서 은퇴한 후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던 그가 그 무거운 짐을 떠안았다.
야구대표팀의 명예회복이라는 큰 임무를 떠안고 이번 WBC 지휘봉을 잡게 된 정윤석 감독이 침중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에야 미국에 들어온 선수단과는 달리 이미 10일 전부터 이곳 현지에서 머물고 있던 정윤석 감독은 KBO에서 준비한 자료, 그리고 후배 감독들의 의견들을 취합해 대표팀 운영 방안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이 중 정윤석을 가장 고민케 한 것은 바로 한수혁이었다.
현 시점 KBO 최고의 유격수이자 타자.
자신의 제자이자 워리어스의 감독이기도 한 이대준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만약 수혁이의 판단과 벤치의 사인이 엇갈릴 때는, 음… 그냥 그 녀석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게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거라 생각합니다.’
야구판에서 뒹군 지 50년이 넘은, 현역 시절 이대준이라는 천재를 능수능란하게 컨트롤했던 노장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벤치와 선수의 뜻이 다를 때는 그냥 선수의 의견을 따르라?
그럼 벤치에 앉은 코칭스태프들의 경험과 수많은 데이터들보다 선수 개인의 판단이 더 정확하다는 뜻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한수혁을 상대했던 다른 팀 감독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 결과 이대준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수혁, 그 녀석은 제가 보기에 천재 중의 천재입니다. 벤치의 사인과는 상관없이 매 순간 어떤 플레이가 가장 승리를 위해 적합한지 계산해낼 수 있는. 압니다, 감독님. 고작 1년 차 신인에게 말도 안 되는 칭찬이라는 거.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희가 그렇게 당했는 걸요.’
‘그 녀석은… 타고난 승부사입니다. 뭔가 기회가 왔다 싶을 때 그걸 잡아내는 능력이… 미친놈이죠. 솔직히 말하면 전 그녀석이 나이를 속였다고 생각합니다.’
‘한수혁이요? 한수혁? 하아…….’
투수 15명, 포수 2명, 내야수 7명, 외야수 6명, 이렇게 총 30명으로 구성된 이번 대표팀에는 세 명의 유격수가 있다. 아니, 그중 버팔로스의 이태웅은 2루수를 맡기로 했으니 주전 유격수 후보는 한수혁과 수원의 안태규, 두 명이다.
예비 엔트리를 확정 짓던 5월 초만 해도 정윤석 감독은 내심 안태규를 주전 유격수로, 그리고 한수혁을 지명타자 감으로 생각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국제대회에서 유격수의 첫 번째 덕목은 경험이었다.
고참을 우대한다, 뭐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역대 국제대회에서 유격수 실책으로 중요한 경기를 말아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제 피어나는 신인에게 너무 큰 짐을 지어주지 않으려는 나름의 배려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윤석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한수혁은 그런 일반적인 상식 따위는 아득히 뛰어넘은 선수였다.
국가대표 에이스급 선수들을 상대로 했던 경기들, 팀의 순위가 달린 중요한 경기에서 한수혁은 단 한차례의 실책도 없이 워리어스를 이끌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눈부시던지 함께 키스톤 콤비를 이룬 이창모가 평범하게 보일 정도였다.
내야 수비로는 국내 최고라 해도 아닌 선수가 바로 이창모다. 그런 이창모를 뛰어넘는 한수혁의 모습에 정윤석의 마음이 흔들렸고, 결국 그의 마음 속 주전 유격수는 한수혁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대표팀의 주전 유격수를 간신히 확정했건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도 문제의 중심에는 한수혁이 있었다.
주전 유격수로 낙점 지었던 녀석이 올스타전에서 투수로 데뷔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전 매지션스전에 등판해 3분의 2이닝을 던진 적이 있지만 제대로 투구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국에 먼저 도착해 있던 탓에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영상으로, 그리고 야구장 내 설치된 각종 장비에서 분석한 자료들로, 한수혁의 투구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한 상태다.
‘168㎞/h라고… 허허.’
정윤석을 소름돋게 만들었던 168㎞/h 포심, 그리고 155㎞/h 슬라이더, 160㎞/h 투심.
진짜 이 노감독을 놀라게 한 건 그 공들이 대부분 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맞고 뒤져라 하고 던진 공이 아니라 적어도 상하좌우, 4분할 제구가 가능한 그런 공이었다는 거다.
저런 식이면 진짜 제구에 신경을 쓰고 던져도 160㎞/h 이상은 충분히 가능할 거다.
지난 2023년 WBC 당시 일본 투수들에게 농락당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투수들이 140, 145, 잘해야 150㎞/h를 간신히 던지는 와중에 일본 투수들은 155. 160㎞/h를 펑펑 던져댔다.
그리고 타석에서는 엄청난 덩치의 타자들이 등장해 말도 안 되는 홈런 타구를 날려댔었다.
야구에 크게 관심이 없는, 기껏해야 국가대표 경기나 챙겨보던 일반 국민들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적어도 한일전만큼은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대한민국 야구의 자존심이 무참히 꺾인 그런 날이었다.
현역에서 물러나 있던 정윤석 역시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드디어 우리 나라에도 160, 아니, 168을 던지는 괴물이 등장했으니까.
‘그런데 이거… 포지션을 어떻게 해야…….’
문제는 그 괴물이 이 팀의 주전 유격수라는 점이다.
즉, 한수혁이라는 선수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투타겸업을 시켜야 하는데, 정윤석은 물론이고 이 대표팀의 그 누구도 투타겸업을 하는 선수를 관리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기에 정윤석은 자신의 제자인 이대준을 비롯 각 구단 감독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그 결과 한수혁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맡기는 게 가장 낫다는 걸 알게 되었다.
‘허허… 이거 참.’
조금은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수혁은 이미 워리어스 한 팀을 넘어 대한민국 야구계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되었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투타겸업이라는 길을 처음으로 걷고 있는 선구자.
그런 선수를 기용하는 데 있어 확신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당사자의 판단에 맡기는 게 가장 나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정윤석 감독이 옆에 앉아 있던 KBO 직원에게 말했다.
“고 팀장님, 한수혁 그 녀석 몸을 관리하는 개인 트레이너가 있다고 했죠? 미국인이라고요?”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미국인이면 다른 문제는 없겠네요. 지금 바로 여기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요?”
“지금 바로요?”
“네, 바로 좀 알아봐주세요. 오늘 밤 비행기라도 탔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알겠습니다. 일단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감독님, 그리고 방금 연락이 왔는데 10분 후에 선수들 도착한다고 합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알겠습니다. 나가보도록 하죠.”
* * *
일본과 대만, 미국 등으로 나뉘어 본선 1라운드가 진행되었던 2023년 대회와 달리 이번에는 모든 경기가 개최국인 미국 현지에서 개최된다.
관중 수입 같은 부분을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어떻게 보전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어쨌든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제대로 마음먹고 이번 대회를 준비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선수들의 경기 감각이 절정에 이르는 8월 한복판에 일정을 잡더니, 대회가 열릴 장소까지 제대로 준비했다. 흥행, 그리고 경기력 향상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그런 카드였다.
이번 대회 조 편성은 이랬다.
전통적으로 라이벌 의식이 팽배한 국가들을 한 조에 배치했기에 지난 2023년 대회와 거의 비슷한 편성이었다.
1조 쿠바, 네덜란드, 파나마, 체코, 이탈리아
2조 일본, 대한민국, 대만, 호주, 중국
3조 미국, 멕시코, 캐나다, 영국, 이스라엘
4조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콜롬비아, 니카라과
지난 대회 개최국으로서 1포트를 차지했던 대만이 2조 3포트에 배치된 데 대해 말이 좀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만한 조 편성이었다.
이렇게 편성된 각 조들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예선전을 벌이게 된다.
1조의 경우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홈구장인 시티즌스 뱅크 파크와 볼티모어 오리올즈의 홈구장인 오리올 파크에서.
우리나라가 속한 2조는 뉴욕 양키스의 홈구장인 양키 스타디움과 메츠의 홈구장인 시티 필드, 두 곳에서.
3조는 LA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홈구장에서, 4조는 시카고 컵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에서.
그렇게 각기 다른 곳에서 팀별로 4경기씩을 펼친 후 상위 2개 팀이 8강에 진출하게 되는 것이다.
한 구장에서 낮 경기와 밤 경기, 각각 2경기씩 치러야 했던 지난 대회에 비해 훨씬 합리적인 일정이다.
존에프케네니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미리 준비된 차량에 짐을 실어 호텔로 보낸 후 코칭스태프들이 기다리고 있는 시티 필드로 향했다.
뉴욕 메츠의 홈구장이자 오늘부터 이틀간 우리 팀의 훈련 장소로 사용하게 될 곳으로.
“우와… 이곳이 바로 뉴욕! 대단한데!”
“형님, 갑자기 뉴요커가 된 것 같은 그런 표정은 짓지 마십쇼. 겁나 어색합니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어차피 뉴욕은 처음 아니야?”
“저야 내년이면 뉴욕 유니폼을 입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오…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기도 하… 기는 개뿔, 이 새끼야. 어디 형한테.”
“농담이에요, 농담. 아악! 농담이라니까?”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 내내 선수들의 탄성과 농담이 버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래, 생각해보면 나도 처음 미국, 특히 여기 뉴욕에 왔을 때는 조금 들떴던 것 같기도 하다.
다들 뉴욕은 처음인 것 같은데 내가 이해해야지, 뭐.
“도착했습니다. 천천히 내려주세요.”
드디어 버스가 시티필드에 도착했다.
메이저리그 정규 일정이 중단되고, 그 사이 열리는 경기인 만큼 야구장 주변에는 메츠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뉴욕 메츠, 지난 1986년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긴 암흑기를 보내고 있는 팀.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했다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탱킹을 선택하게 되는, 하필이면 뉴욕 양키스와 같은 연고지를 갖고 있어 여러모로 비교되는 불운의 팀.
21세기 첫 월드시리즈 정상에 도전하던 저 팀의 꿈과 희망을 바로 내가 박살 내고 말았다.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은 내가 말이다.
뭐…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굳이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자,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늘과 내일은 우리 팀이 여기 시티필드에서 적응 훈련을 하게 된다. 그 다음날, 다다음날에는 보조경기장으로 옮기게 될 거고. 다들 비행 때문에 피곤하겠지만 가볍게 몸만 풀고 천천히 시차 적응 하는 걸로 하자. 트레이너들이 도와줄 거야. 이해했나?”
“네! 코치님.”
“좋아, 저기 감독님 나오신다. 다들 주목.”
오랜만에 시티필드의 그라운드를 밟으니 갑자기 예전 생각들이 하나둘 떠오르려 한다.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 때의 그 감정, 부상을 당했을 때의 좌절감,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들.
그 미묘한 감정들을 억누르며 코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정정해 보이는, 이대준 감독의 은사이자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손꼽히는 명장 중 하나인 정윤석 감독이 뒷짐을 진 채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들 비행하면서 별 일은 없었고? 오랜만에 이코노미 타니까 불편하지?”
“아닙니다! 감독님.”
“아니기는, 우리 성적만 잘 내자. 그러면 돌아갈 때는 비즈니스석 타게 해줄 테니까. 용 팀장, 내 말 맞지?”
“아, 그게, 감독님 저기, 저희 예산이…….”
“예산은 무슨,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 되면 내 개인연금이라도 털어서 좋은 좌석으로 마련해줄 테니 너희들은 그저 경기만 열심히 하면 돼. 말썽 부리지 말고, 내 말 이해 못 한 사람?”
“없습니다!”
“좋아, 다들 성인인데 이 이상 하면 잔소리겠지. 상대팀 분석 자료나 포지션별 코칭 자료는 따로 코치들이 챙겨줄 테니까 숙소 돌아가서 다시 검토하는 걸로 하고… 오늘은 가볍게 몸만 풀고, 구장 적응만 하고 쉬는 걸로 하자고. 어때, 다들 이해했나?”
“감사합니다!”
“좋아, 그럼 다들 운동할 준비하고. 거기 한수혁, 자네만 나 좀 따라오고.”
“저요?”
정윤석 감독을 따라 덕아웃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수혁아.”
“네, 감독님.”
“이것 참, 대준이한테 네 얘기를 하도 들어서 그런지 처음 보는데도 영 낯설지가 않네.”
그야 전 생에서도 국가대표팀에서 한 번 만나…….
음,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할 뻔했네.
내가 아무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자 정윤석 감독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자의 제자니까 편하게 말하마. 다른 건 다 정했는데 네 투수 등판 계획을 아직 못 세웠어.”
“네, 이해했습니다.”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한 경기에 얼마나 던질 수 있을까? 한계 투구수는? 등판 간격은? 혹시 선발, 마무리, 어느 쪽이 더 편할까?”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