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0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08화(109/412)
#108. 이 거지 같은 기분을 풀 수 있는 건
솔직히 말하자면 국가를 대표한다는 명예나 자긍심만으로 대표팀이 굴러가던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아마추어도 아니고 몸값이 수십, 수백억에 달하는 프로 선수들이라면 더더욱.
WBC에서 병역 혜택이 사라진 지 오래된 것을 감안하면 이번 대회에서 선수들의 의욕을 자극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다.
먼저 우승 상금.
대회 우승팀에게는 한화로 15억 원, 준우승 9억 원, 4강 6억 원의 상금이 걸려 있다. 거기에 선수 상금 또한 별도로 책정되어 있다.
대회 일정 하루당 40만 원씩 책정된 참가 일당과 이 상금을 합하면 적지 않은 돈을 한 번에 수령할 수 있다. 연차가 얼마되지 않는, 연봉이 적은 선수들에게는 꽤나 달콤한 유혹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특별한 몇몇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야구 선수들에게는 일생 단 한 번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인 FA.
국가대항전 참가 횟수에 따라 FA 자격 취득 일수를 더해준다는 것이야말로 선수들에게 가장 큰 혜택일 것이다.
당장 이번 WBC 대회만 해도 단순 참가에 10점, 8강 달성 시 추가 10점, 4강 10점, 준우승 10점, 우승을 할 경우 20점이 각각 누적된다.
이 점수는 곧바로 FA 자격 일수에 합산되기 때문에 우승까지 할 경우 최대 60일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WBC와 올림픽, 아시안게임에 모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둘 경우 FA 취득 년도 자체가 바뀔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부상이나 부진으로 1군에서 제외되는 패널티 기간을 이 혜택들로 메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나열된 여러 혜택들은 내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우승 상금? 갖고 있던 돈 대부분이 투자금으로 묶인 상태이지만 그래도 40억이 넘는 돈이 내 통장에 그대로 잠들어 있다. 우승 상금 몇 푼을 탐낼 정도로 가난하지 않다.
FA 등록일수?
그걸 뭐에 쓰려고? 다른 팀으로 옮길 일도 없는데.
그럼에도 내가 이번 대회 성적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건…….
– 오빠! 전화 받으시네요? 연습 중 아니신가 봐요! 저는 아빠 만나서 밥 먹고 있어요. 여기 식당에서 뉴욕 사는 교포분들도 만났는데 다들 야구 경기 보러 간다고 난리예요. 꼭 이겨주실 거죠?
예전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태극마크에 대한 책임감.
응원해주는 팬들에 대한 보답, 그리고 이 팀의 승리를 바라는 누군가에 대한 선물.
– 수혁아, 뉴욕 공기는 어떠냐? 거기도 덥지? 안면 있는 선수들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선배들하고 친하게 내도록 노력해봐. 그래야 나중에 FA 때 우리 팀으로 오라고 영업할 수 있잖아. 흐흐.
팀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나 스스로를 위해 다른 팀 선후배들과 잘 지냈으면 하는 누군가의 배려, 그런 마음에 대한 보답.
그리고…….
[사무라이 재팬 호시노 감독 “한수혁에 대한 분석은 끝났다” 호언 장담] [4번 타자 에토 이오리 “한수혁은 그저 공만 빠른 풋내기” 프로의 무서움 보여줄 것] [에이스 다나카 야마토 “한국 타자들의 약점 명확해, 단 한 점도 실점하지 않겠다] [심층 취재, 한수혁의 뿌리를 찾아 “먼 조상 중에 중국 쪽에 뿌리를 둔 사람이 있을 수도…….”] [국적이 아닌 혈통으로도 대표팀 합류 허용하는 WBC, 다음 대회에선 한수혁이 중국 대표로?] [베이징 라이온스 관계자 “한수혁과 접촉, FA로 풀리는 즉시 대국(大國)으로 데려올 것”] [중국 야구팬들 “진정한 프로라면 중국 리그에서 검증을 받아야”]하루가 멀다 하고 개소리를 지껄여 대는 시끄러운 이웃나라 언론들에 대한 짜증과 분노.
이런 것들이 점점 나를 이번 대회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사흘간의 현지 적응 기간이 순식간에 끝났다.
우리가 경기를 치를 시티필드에서 이틀, 양키스타디움에서 하루, 그리고 보조경기장에서 하루.
사실 적응이랄 것도 없었다. 야수들은 이곳 구장의 특성, 그러니까 외야 펜스의 형태라든지 거리 같은 걸 익히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고, 투수들은 마운드 위에서 연습투구 몇 번을 해본 게 전부였다.
“이거 미국한테만 너무 유리한 거 아냐?”
“미국뿐이냐. 3조, 4조 애들 중에 대부분이 빅리그에서 뛰잖아. 걔들한테 유리한 거지.”
“성수 형님, 형님은 여기서 뛰어보셨죠?”
“경재야, 쪽팔리니까 그때 얘기는 하지 말자.”
“창피하다뇨. 여기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본 타자가 몇 명이나 된다고.”
“2땅 머신 소리 듣다가 2년 만에 쫓겨났는데 그럼 자랑이라도 할까? 너 일루 와. 일부러 나 엿먹이는 거지?”
“아뇨, 형님, 그게 아니라, 아악, 아파요, 아파요, 형님!”
나흘간의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매지션스의 최고참이자 이번 대표팀의 주장이기도 한 외야수 김성수에게 농담을 걸던 최경재가 옆구리 살을 잡힌 채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게 깐죽거리던 최경재를 단숨에 제압한 김성수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성수.
데뷔하자마자 타격왕을 차지하며 그 후 8년간 리그를 대표하는 교타자로 명성을 날렸던 선수.
비록 메이저리그에서 2년을 보내며 그 명성을 상당히 까먹긴 했지만 한국으로 복귀한 이후 매년 3할 언저리의 타율과 20개 가까운 홈런을 날리며 매지션스 부활의 기틀을 세운 베테랑.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수혁아, 우리가 같은 팀에서 뛰었으면 진짜 재미있었을 텐데, 그치?”
“아이고, 형님. 쟤랑 형님이랑 나이 차이가 19살이에요. 차라리 아들을 일찍 낳아서 같이 야구를 하는 편이… 아악! 옆구리는 꼬집지 말라니까요!”
피식 웃으며 최경재를 옆으로 밀어버린 김성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농담이 반쯤 섞인, 하지만 어딘가 깊은 회한이 느껴지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때, 워리어스가 날 잡았으면… 그랬으면 진짜 같이 뛸 수 있었을 텐데.”
올해 서른아홉 살의 노장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그가 워리어스 출신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팀의 최고참인 조성오보다도 한참 선배인 그는 워리어스에서 데뷔해서 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그런데 왜 매지션스 유니폼을 입고 있냐고?
뻔한 이야기다. 그때 이 팀은 FA를 다른 팀에 뺏기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팀이었으니까.
워리어스에서 8년을 보내고 미국에 진출했던 김성수는 불과 2년 만에 국내에 복귀하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워리어스가 자신을 잡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워리어스 구단주, 그러니까 내 아버지라는 작자는 100억이 넘는 그의 몸값을 지불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결국 FA계약 마감일 직전까지 워리어스의 제안을 기다리던 김성수는 매지션스가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매지션스와 계약을 하기로 한 그날, 김성수가 바로 맞은편 워리어스 사무실을 기웃거리며 혹시나 이제라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을까 기대했다는 건 야구팬들에게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후… 생각하니 또 열받네.
임준영에 김성수에… KBO를 대표하는 투타 최고 선수들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다니.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김성수에게 대답했다.
“그랬으면 저도 선배님에게 많이 배웠을 텐데요.”
“배워? 뭘? 에이, 방망이는 네가 훨씬 잘 치는데 배우긴 뭘 배워.”
“저 프로 오기 전에 선배님 타격 영상 정말 많이 봤거든요.”
“그래? 와, 영광이다, 야. 아참, 수혁아. 우리 팀 애들하고 나중에 밥이라도 같이 한 끼 하자.”
“밥이요?”
“그래, 나 없는 동안 크게 한바탕 했잖아. 같은 잠실구장 쓰면서 언제까지 원수로 지낼 수는 없지 않겠어? 내 말 이해했지?”
“네, 이해했어요, 선배님.”
“좋아, 그럼 일단 이번 대회부터 끝내고,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올 시즌 스프링캠프 도중 발목 부상을 당한 김성수는 7월 첫주가 되어서야 1군에 복귀했다.
어쩌면 그가 1군에 계속 있었다면 황성민이나 최동석 같은 놈들이 그런 헛짓거리를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난 시즌 준우승 팀인 매지션스가 우리와 수원에 밀려 4위에서 허덕이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선수들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 차가 호텔에 도착했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내일 하루 동안 주어진 휴식일이 지나고 나면 드디어 대회가 시작된다.
이번 생, 내 첫 국가대표 경기가.
* * *
“위원님, 국내 경기도 아니고 세계대회입니다. 우리 팀 편을 드는 건 좋지만 제발 조금만 말 조심을…….”
“어이구, 우리 이 아나운서,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 그렇게 똥오줌 못 가리는 사람 아니라니까요? 신속, 정확, 정직, 중립! 어? 내 야구 해설 4대 신조가 바로 그거라니까?”
그런 인간이 매번 중계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쑥 내려갔다.
누굴 원망하랴.
다른 쟁쟁한 해설위원들을 제치고 이 인간과 한 조가 된 순간 이미 모든 건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네, 네, 위원님. 어차피 국가 대항전이니까 편파 해설로 욕 먹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수위는 지켜야 하니까… 제 말 이해하셨죠? 방통위에서 경고 먹을 그런 짓은 절대 안 됩니다?”
“어허, 내 말 믿으라니까? 것보다 이제 5분 남았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을 거예요?”
“아차차, 그럼 위원님만 믿겠습니다?”
“걱정 말라니까. 신속! 정확! 정직! 중립!”
* * *
대회 첫날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시티필드에서 대만과 호주의 경기가, 그리고 양키 스타디움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간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닷새째 맞는 아침,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시차 적응이 된 것을 느낀다.
아마 다른 선수들보다는 내가 컨디션이 조금 더 좋을 것이다. 정윤석 감독의 요청으로 인해 미국으로 급하게 날아온 제이콥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관리를 해줬으니까.
이번 대회에서 내가 투타 겸업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알게 된 대표팀 선후배들 역시 그런 특별대우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는 분위기였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몇몇 꼰대들의 눈빛 속에 담긴 질시를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럼에도 특별히 그런 눈빛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저런 분위기는 대회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질 거라 확신하니까.
강자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데 누구보다 익숙한 게 바로 운동선수들이다.
이제 곧 이 팀의 중심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고, 그때는 내게 저런 눈빛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
끼익
“도착했습니다. 다들 내리시죠.”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양키 스타디움으로 들어섰다.
지난 2009년 개장한 비교적 최신 구장, 5만 명 가까운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를 가진, 거기에 건설 비용만 약 15억 달러가 들어간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야구장.
“우와… 여기 진짜 장난 아니네. 이게 야구장이야, 박물관이야.”
“자자, 촌놈처럼 두리번거리지 말고 빨리 경기 준비하자, 얘들아.”
“형님, 입에 묻은 침 좀 닦고 말씀하시죠.”
“뭐? 어디? 내가 침을 흘렸다고?”
야구장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미국 야구의 역사를 담고 있는 듯한 거대한 건축물.
다른 선수들이 양키 스타디움의 압도적인 규모와 시설에 놀라는 동안 나는 밀려오는 옛 기억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온통 후회로만 가득한 예전 삶의 기억들.
“수혁아, 너 표정이 왜 그려?”
“…아니에요, 선배님.”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뭐라도 박살 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다.
지금 이 기분을 풀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
오늘 상대할 저 팀뿐이겠지.
[2027 WBC 본선 1라운드 한국 VS 중국 – PM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