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1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11화(112/412)
#111. 규격 외의 괴물
“야, 한수혁, 뭐 하냐.”
“일광욕 중이에요, 준영이 형.”
“지는 해가 뭐가 좋다고 그러고 있어? 가끔 이렇게 노인네 같은 짓을 하네, 이놈.”
경기를 앞두고 아주 잠깐 찾아온 여유 시간.
저물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곳에서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놓고 메츠와 혈전을 벌이던 그때, 나는 타자로서 기량이 정점에 달했던 서른셋 베테랑이었다.
어깨 부상으로 인해 투수 겸업을 포기한 나는 점점 타자로서의 정체성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유격수에서 3루수로, 다시 우익수로.
그렇게 조금씩 수비 부담을 줄여가는 동안 타격 성적은 계속 상승했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던 그해, 나는 42개의 홈런과 45개의 도루, 150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MVP에 올랐다.
예감했다. 그 순간이 내 선수 인생의 최정점일 거라고.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 해를 기점으로 회귀 전까지, 내 피지컬은 조금씩 하향곡선을 그렸다.
타격 기술과 노하우는 계속 발전했지만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 배트 스피드가 점점 느려지며 성적 역시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 성격은 점점 더 엉망이 되었다.
만약 회귀를 하지 못했다면 나는 그렇게 실력을 잃고 자존심만 남은 성질 고약한 노장이 되어 어느 순간 팀에서 버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건 도대체 누구일까? 정말 신이라는 건 존재하는 걸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야구밖에 모르는 나 같은 인간이 그 해답을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두 번째 잡게 된 이 기회를 단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 이쪽으로 다들 모여봐. 거기 수혁이도 이리 오고.”
“네, 주장.”
경기 시작을 앞두고 주장 김성수가 선수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지난번 대회 때 쟤들한테 쓰리런 두 방 맞고 졌거든? 진짜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
“당연한 얘기지만 나 이번이 마지막 국제대회일 거야.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나 창피하지 않게 오늘 다들 좀 열심히 해줘라. 응? 내가 서울 가면 진짜 한 턱 크게 쏠게.”
“흐흐, 주장.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여기 입이 몇인데?”
“괜찮아. 이래 봬도 빅리그도 다녀온 몸이야. 돈 많이 모아 놨으니까 제발 오늘 경기 이기고 서울 가서 내 카드 한도 초과 좀 시켜다오.”
“좋죠.”
“자, 그래. 다들 프로인데 더 이상 긴 말은 필요 없겠지. 하나, 둘, 셋 하면 파이팅이다. 하나! 둘! 셋! 파이팅!”
“파이팅!”
* * *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중국인 응원단이 대부분이었던 지난 경기와 달리, 오늘 한국과 호주와의 경기가 열리는 시티 필드에는 일반 미국 관중들, 그리고 빅리그 스카우터들이 꽤나 많이 앉아 있었다.
이미 빅리그에서 뛰고 있는 호주 대표팀의 투수 제이미 와트와 타자 잭 윌슨, 맥스 앤더슨, 오스카 워커에 대해 체크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빅리그 진출을 노리고 있는 한국 선수들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
올 시즌이 끝난 후 나란히 해외 진출, 혹은 FA자격을 취득하게 되는 한국팀의 선발 3인방 류한결, 임준영, 최경재.
오늘은 그중 넘버 투로 꼽히는 임준영이 등판하는 날이다.
그에게 가장 관심이 큰 건 다름 아닌 이 구장의 주인, 오랜 탱킹을 끝내고 이제 다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뉴욕 메츠였다.
“다니엘, 자네는 거의 한국에서 살다시피 한다면서?”
“흠, 그런 편이지. 그건 왜 묻는데?”
“날 세우지 마. 자네가 관심있어 하는 저 유격수에게 침 바르려는 건 아니니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류한결과 임준영을 상대로 한 활약들, 거기에 비록 중국을 상대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WBC 첫 경기에서 보여준 말도 안 되는 홈런 두 방.
지금 이곳에 모인 스카우터들 중 상당수가 한수혁을 보기 위해 온 거라는 걸 다니엘이 모를 리 없다.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묻는 건데?”
“임준영, 저 친구 말이야. 혹시 뭐 소문 들은 거 없나?”
“소문?”
“이런 얘기를 자네한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음, 뭐 상관없겠지. 시즌 초까지만 해도 우리 얘기에 상당히 긍정적이던 친구가 요즘에는 뭔가 생각이 바뀐 거 같아서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한수혁으로부터 워리어스로 오라는 얘기를 들은 시점부터였지만 빅리그 스카우터들이 그런 것까지 알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임준영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바가 없어. 미안하군.”
“흠,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난 혹시 저 친구가 미국이 아니라 일본을 염두에 두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어서 말이야.”
“일본? 이봐, 잭슨. 한국 선수들이 이제 와서 다시 일본으로 진출할 이유가 있을까? 돈이나 명성, 기회, 어느 면을 봐도 굳이 NPB에? 차라리 한국에 남는 게 훨씬 낫지.”
“그렇겠지? 난 혹시나 요미우리에서 뭔가를 저질렀나 싶어서. 흠,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우리보다 더 좋은 조건을 부를 팀은 없을 텐데.”
“요즘 양키스 놈들이 5선발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더군. 어쩌면 그놈들일지도 모르지.”
“5선발? 임준영 저 친구, 포스팅 금액만 천만 달러는 들어갈 텐데? 5선발에 그 돈을 쓴다고?”
“양키스잖나.”
“음.”
국내에서의 평가는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빅리그에서 보는 류한결과 임준영, 최경재, 세 명의 투수 사이에는 확실한 간격이 존재했다.
먼저 데뷔 후 줄곧 기복 없는 활약을 보여온, 거기에 멘탈 면에서도 셋 중 최고라 평가받는 류한결의 경우 포스팅 금액만 최소 2천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었다.
에이스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3, 4선발에 쓰기에는 조금 큰 돈. 그렇기에 오클랜드처럼 에이스가 시급한 팀들이 류한결을 노리고 있었다.
임준영에 대한 평가는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구위 자체는 류한결과 동급, 혹은 이상이지만 안정성 면에서 못하다는 평을 받는 그의 예상 포스팅 금액은 최대 1,000만 달러 정도.
적지 않은 액수다.
그런데 양키스 저 악의 제국 놈들은 그런 금액을 겨우 5선발을 채우는 데 쓰겠다는 뜻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확실히 알게 되겠지. 자네도 어지간히 골이 아프겠군.”
“휴, 그래. 어쨌든 급한 건 우리 쪽이니까. 아무튼 정보 고마워. 경기나 지켜보자고.”
대화를 마무리 지은 두 사람이 다시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오늘 경기에서 한국 팀이 이길 확률은 아무리 잘 쳐줘도 40% 미만.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경기장에 모인 다른 스카우터들, 그리고 미국 현지 언론들 대부분이 2조 8강 진출 팀으로 일본과 호주의 이름을 꼽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맙소사… 내가 뭘 본 건지?”
“흐흐, 이걸 축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잭슨. 아무튼 임준영 저 친구 대단하군.”
“아니, 물론 그건 그렇지만…….”
“어쩌면 천만 달러로 힘들 수도 있겠어.”
한국과 호주의 WBC 1라운드 경기가 끝났다.
스코어 4 대 0, 한국 팀의 완승이었다. 호주의 승리를 점쳤던 전문가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전체적인 경기 양상은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흘러 갔다.
올 시즌 전반기 빅 리그에서 5승을 올린 호주 팀의 선발 제이미 와트는 대부분의 한국 타자들을 꽁꽁 묶었고, 마찬가지로 빅 리그 진출이 예상되는 한국 팀의 선발 임준영 역시 6이닝 동안 63개의 공만을 던지며 단 한 점도 내주지 않는 완벽 투를 기록했다.
두 팀 간의 경기가 갈린 건 단 하나, 아니, 한 선수 때문이었다.
한수혁.
오늘 2홈런 4타점을 기록한 한국 대표팀의 유격수.
그가 이 경기를 혼자서 끝내버렸다.
한수혁의 활약은 1회부터 시작되었다.
임준영이 1회초를 무실점으로 잘 막아내고 시작된 한국팀의 반격.
1번 타자 이찬호가 볼넷을 골라 1루로 진출했다. 투수 쪽에서 류한결이 FA 최대어라면 타자 쪽에서는 이찬호의 이름값이 가장 높았다.
최소 100억 원 이상의 계약을 따낼 걸로 예상되는 그가 10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볼넷을 얻어내자 경기장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사 주자 1루,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섰다.
한국야구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빅리그 전문가들, 그리고 현지 언론들이 보내기 번트를 예상하던 그때.
따아아아악!
엄청난 소리와 함께 호주 투수가 던진 초구가 담장 밖으로 넘어가버렸다.
선제 투런 홈런.
오늘 경기에서 필승을 다짐했던 호주 선발 제이미 와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홈런을 때린 한수혁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홈을 밟고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시티 필드의 안전망을 타고 오르던 한국여자 관중 하나가 경기장 밖으로 끌려 나가는 촌극이 발생했지만 어쨌든 한국팀의 기세가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제이미 와트는 역시 좋은 투수였다.
한수혁에게 홈런을 허용한 후 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는 한국 팀의 클린업 트리오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 세웠고, 이어지는 2회말에도 6, 7, 8번 하위 타순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경기가 투수전으로 흘러가리라는 예상이 그라운드 안을 맴돌던 그때.
3회말,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제이미 와트가 던진 필살의 투구를 한수혁이 또 멋지게 받아쳤다.
따아아아아아아악!
홈런이 잘 안 나오기로 유명한 시티필드의 외벽을 넘겨버리는, 투수의 멘탈을 완벽하게 박살 내는 장외 홈런이었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빅리그 스카우터들의 관심이 임준영에게서 한수혁으로 양분되었다.
“맙소사, KBO에서 나온 기록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어. 저 친구 올 시즌 장외홈런이 몇 개째라고?”
“유격수 수비도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좋군. 젠장, 진짜 스무 살 맞아? 나이를 속인 건 아니겠지?”
“이봐, KBO 해외 진출 자격 제한 규정이 언제 개정된다고 했지? 뭐? 아직 보류 중이라고? 이런 젠장!”
“제이미 와트, 저 친구 어디 이상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전혀, 오늘 한수혁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하게 타자를 제압했어. 오히려 시즌 때보다 더 좋아 보이는데?”
“저 친구를 잡으려면 얼마쯤 써내면 될까?”
“정신 차려. 저 친구 해외 진출 가능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니까?”
“젠장, 우리 팀 유격수 놈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천만 달러를 써내고 싶군.”
한수혁에 대한 정보를 영상과 데이터로만 접했던 대부분의 스카우터들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했다.
중국전 2홈런에 이어 또다시 호주전에서도 2개의 홈런. 심지어 그중 하나는 시티필드 외벽을 넘겨버린 장외 홈런.
경기는 계속되었다.
한수혁에게 홈런 두 방을 맞고 잠시 휘청거리던 제이미 와트는 다시 3회말과 4회말을 실점 없이 막아냈다.
현재 투수진 중 그보다 나은 선수가 전무한 호주 벤치에서는 제이미의 한계투구수가 오기 전까지 교체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5회말 한수혁의 타석.
1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바깥쪽으로 도망가듯 던진 슬라이더를 한수혁이 받아쳤고, 그 타구가 우측 담장을 다이렉트로 때리며 1타점 적시타가 되었다.
“Fuck! Fuck!”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이미 와트가 강판되었고, 호주에서는 남은 투수들을 차례로 등판시키며 한국에 대항했다. 물론 한수혁 타석에서는 자동고의사구가 나왔지만.
그렇게 한수혁의 홈런 두 방과 2루타로 한국팀이 4점을 얻는 사이, 임준영은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낸 후 마운드를 내려갔다.
빅리그 스카우터들은 자신들이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초 500만에서 최대 1,000만 달러가 한계치라 생각했던 임준영은 그보다 훨씬 좋은 투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아직 멀었다고 멋대로 판단했던 1년 차 애송이 한수혁이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사실이었다.
“보스, 당장 한국에 전담 인력을 배치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이요!”
– 이봐, 고작 한 경기 보고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KBO 리그의 해외 진출 자격 제한이 개정된다 해도 아직 몇 년 남았다고. 일단 좀 진정해. 스카우트 인력이 어디 공짜로 솟아나는 줄 아나?
“이런 젠장! 젠장! 그러면 늦는다고요!”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스카우터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