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1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15화(116/412)
#115. 수혁이가 알아서 해줄 겁니다
한국의 여름보다는 조금 서늘한, 습도 역시 높지 않아 불쾌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야구하기 좋은 날씨.
뉴욕 메츠의 홈구장인 시티필드, 투수로서 이곳 마운드에 선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마 4년 차 올스타전 때였었나? 그래, 아마 그때가 맞는 것 같다.
진짜 오랜만이네.
“우아아!”
“죽어! 죽여버려!”
한국 관중들이 내뿜는 응원의 열기, 그리고 맞은편 일본 관중석에서 날아오는 명백한 적의와 야유.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필터링이 된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래서 고요하다.
그라운드 위에 있는 선수들의 움직임, 대기타석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일본 타자들의 시선과 감정들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게 고요하기만 하다.
상기된 얼굴을 한 팀 동료들이 덕아웃 앞에 매달려 나를 향해 무어라 고함을 질러 댄다.
누군가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또 누군가의 눈빛에는 걱정스러움이 고여 있다.
응원석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았다.
평소보다 눈이 두 배는 넘게 커진 것 같은, 신기하게도 이 먼 곳에서도 그 놀란 표정이 다 보일 정도로 흥분해 있는 내 이웃이자 가장 열렬한 팬 하나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대체 이깟 야구가 뭐라고.
이 공놀이 때문에 나는 성훈이 형 같은 사람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미국으로 건너와 죽기 직전까지 내 삶을 통째로 여기에 바쳤다.
어디 나뿐이랴.
지금 덕아웃에 앉아 있는 선수들 모두가 자신들의 인생을 이 야구에 쏟아붓고 있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타자의 배트를 피해 공 3개만 던지면 되고, 타자는 그 3개의 공 중 하나만 잘 때려 수비수가 없는 곳으로 보내면 된다.
그게 전부다.
고작 그걸 하기 위해 전 세계의 수많은 선수들이 자신의 모든 걸 바치고, 또 수천만 명의 팬들이 그 광경에 열광한다.
예전 삶에서의 나는 내가 이 공놀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누구보다 멀리 타구를 보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얼마나 철없고 유치한 생각이었는지.
물론 나는 아직도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다시 이 시티필드 마운드에 서게 되었는지 말이다.
“우아아아아아!”
“한수혁! 한수혁! 한수혁!”
“수혁 오빠! 꺄아아악!”
순간 마치 음소거가 풀린 것처럼 막혀 있는 청각이 제 기능을 찾으며 엄청난 함성이 귓가로 파고 든다.
“수혁아, 수혁아? 야, 괜찮아?”
“아, 네.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다른 생각? 뭔지 모르겠지만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뭐 문제 있는 줄 알았다. 괜찮은 거 맞지?”
“네.”
“좋아, 불펜 투구가 부족했다고 덕수가 걱정하더라. 최대한 시간 끌어볼 테니까 연습투구 하나라도 더 던지자.”
“아닙니다. 준비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내가 잠깐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포수 정대한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올 시즌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WBC 마운드에 올라 정대한과 배터리를 이루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휘적휘적
공을 던질 오른쪽 어깨를 몇 번 돌려봤다.
가벼우면서도 기분 좋은 탄력이 느껴진다. 제이콥과 함께 몸을 만들면서 이 부분에 특히 신경을 기울였다.
투타 겸업을 하게 되면 선발투수로만 등판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수비를 하다가 곧바로 마운드로 올라가게 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빠르게 어깨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지난 수비 이닝이 끝나고 우리 팀이 공격을 하는 동안 조용히 불펜으로 이동해 몸을 풀었다.
시간이 별로 없는 탓에 연습 투구 수 자체는 조금 부족했지만 괜찮다. 제이콥에 의해 만들어진 내 육체는 이 정도 예열만으로 충분히 제 성능을 낼 수 있도록 단련되어 있다.
끄덕
정대한의 사인에 맞춰 첫 번째 연습투구를 시작했다.
내가 오타니에게 감사하는 것 중 하나, 지금처럼 필드 플레이어로 뛰다가 바로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에게 심판이 조금 더 시간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서두를 필요 없다.
정말 오랜만에 서 보는 시티필드의 마운드, 그리고 KBO 공인구에 비해 조금은 크고 미끄러운 느낌이 드는 공인구.
이런 것에 조금이라도 더 익숙해질 수 있도록 느리지만 신중하게.
퍼억!
처음 던진 포심이 151㎞/h가 나왔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오히려 내 투구를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공이 조금 느린데? 93마일? 이게 전력투구인가?”
“아니, 이달 초 올스타전에서 104마일을 던진 걸로 나오는데?”
“젠장, 올스타전이라고 엉망으로 계측한 거 아냐? 너무 차이가 나잖아?”
그런 반응은 양팀 덕아웃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덕아웃에서는 내 어깨가 풀리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시작되었고, 반면 난데없는 내 등판에 긴장했던 일본 덕아웃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야레야레, 역시 과장된 소문이었군.”
“저기서 구속이 좀 더 나온다고 해도… 글쎄, 그냥 흔해 빠진 공인데?”
“저 나라에서 한동안 빅리거가 안 나온 건 역시 이유가 있는 거였어.”
그런 웅성거림을 무시하고 계속 연습투구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반대쪽 낮은 153㎞/h짜리 포심.
그리고 이어지는 143㎞/h 슬라이더, 힘을 빼고 던진 체인지업.
주심의 배려 속에 평소보다 조금 넉넉하게 주어졌던 연습투구 시간이 끝났다.
약간이나마 긴장감이 감돌던 일본 타자들의 얼굴에 다시 여유가 돌아왔다.
일본 대표팀에서도 가장 발이 빠른 주자 둘이 1, 3루에 서 있는 상황.
거기에 타석에는 빅리그의 유혹을 뿌리치고 요미우리의 장기 계약 제안을 받아들인 일본을 대표하는 거포 에토 이오리가 들어섰다.
지금 한국 팀 팬들, 그리고 덕아웃이 바라는 건 그저 단 하나.
동점을 내주더라도 제발 역전만은 피하는 것. 그래서 남은 3이닝에 다시 한번 승부를 걸어보는 것.
굳이 작전을 걸 필요도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일본, 반면 내 어깨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있는 한국.
언제나 약팀에서만 뛰었던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다.
내가 사이영 위너가 되던 그해, 월드시리즈 진출의 마지막 고비였던 챔피언십 시리즈 마지막 경기 때도 딱 이런 느낌이었지.
그때 나는 95마일이 간신히 나올까 말까 한 구속을 갖고 죽을 힘을 다해 타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타자들의 배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오직 내게만 허락되었을지도 모를 강한 어깨가 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몸에 시동을 걸었다.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가장 폭발적인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제이콥이 만들어준 세상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투구 폼.
하체에서 만들어진 에너지가 허리로, 다시 어깨로, 그렇게 세 번 응축되며 힘을 쌓아간다.
그리고.
슈웅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에너지가 내 손에 들려 있던 야구공 하나를 힘차게 앞으로 밀어낸다.
뻐어어엉!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타석에 서 있던 에토 이오리가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어마어마한 포심.
얼마나 놀랐던지 빈볼이라고 항의할 정신조차 없었다.
“보, 볼!”
심판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볼 사인이 내려졌지만 그 누구도 판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라운드 위에 있던 선수들, 그리고 양팀 덕아웃, 관중석에 있던 팬들과 스카우터들.
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전광판에 향해 있었다.
104마일, 168㎞/h.
그것은 지금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이었다.
* * *
‘대준아… 이런 기분이구나.’
불과 한 점 차 리드 상황, 갑자기 찾아온 무사 주자 1, 3루의 위기.
방금 전까지 10초 단위로 지옥과 천당을 오가던 정윤석 감독의 마음이 놀랍도록 평온해졌다.
한수혁이 던진 초구를 본 순간 제자인 워리어스 이대준 감독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만약 팀에 위기 상황이 닥쳤는데 그 키를 쥐고 있는 게 수혁이라면 음… 선생님, 저 같으면 그냥 음료수라도 하나 꺼내 들고 평온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볼 것 같습니다. 만약 그 녀석이 실패한다면 그건 세상 그 누가 와도 안 될 일이었을 테니까요.’
시대와 상관없이 홈런을 펑펑 때려내는 타자, 그리고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는 팬들과 스카우터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런데 오늘 선제 홈런으로 일본 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타자가 마운드에 오르더니 갑자기 104 마일을 꼽아 넣었다.
뒤늦게 일본 감독이 튀어 나와 빈볼이라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가 봐도 너무 세게 던지려다 공이 빠진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윤석 감독은 알고 있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심지어 같은 팀 선수들에게까지 비밀로 했던 한수혁의 연습 투구.
감독과 코치, 그리고 공을 받아줄 장덕수만이 있던 그 자리에서 정윤석이 물었다.
‘일단은 포심은 168㎞/h까지라는 거구나.’
‘네, 감독님.’
‘제구는? 제구를 하려면 얼마나 구속을 낮춰야 하지?’
단순히 공을 빠르게 던지는 것과, 그것을 원하는 곳에 넣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때문에 정윤석의 궁금증은 당연한 것이었다.
‘단순히 4분할 투구 정도만 가능하게 하려면 168… 음, 가능할 것 같은데요. 좀 더 정밀한 제구가 필요하다면 162? 163? 대충 그렇게 생각합니다’
‘허어…….’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였다. 4분할 제구가 가능한 168㎞/h 포심이라니.
이런 투수가 자기 밑에 있다는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정윤석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변화구는 얼마나 던질 수 있을까? 가능한 구종을 말해줄 수 있을까?’
‘일단… 부상 염려 때문에 포크볼 같은 건 자제하려 하고, 음, 이번 대회에서는 포심, 투심, 컷패스트볼, 체인지업, 커브 정도만 던지면 어떨까 싶습니다, 감독님.’
‘…그걸 다 던질 수 있다고?‘
그날 정윤석은 이대준에 이어 두 번째로 투수 한수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감독이 되었다.
막연하게 중간계투 정도로 생각했던, 빠른 공에 약한 타자를 상대로 몇 차례 등판을 시킬 생각이었던 한수혁이 순식간에 팀의 히든카드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카드를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
처음에 든 생각은 4차전인 대만전 선발이었다. 만약 중국과 호주에 이기고 일본에 져서 대만전에 모든 걸 올인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 한수혁을 기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 묘해졌다.
7회까지 일본에 한 점 앞서 있는 상황, 만약 이 위기만 넘길 수 있다면 마지막 경기인 대만전에서는 훨씬 여유 있는 마음으로 선수단을 정비할 수 있다.
물론 상황은 최악에 가까웠다.
신시내티 레즈에서도 리드오프를 맡고 있는 발 빠른 주자가 3루에 있고, 1루에도 그에 못지않은 발을 가진 주자가 나가 있다.
거기에 타석에는 일본 대표팀의 간판타자가 서 있다.
승부의 순간이다.
객관적인 데이터만 봐서는 여기서 다른 투수를 올려보내고, 내일 대만전에 최경재와 한수혁 카드를 올인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윤석 역시 한국인이다. 다른 팀은 몰라도 일본에는 절대 지기 싫다.
그리고 왠지 한수혁이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수혁이 마운드에 올랐고, 이제 대한민국 대표팀의 운명은 오로지 그의 어깨에 달리게 되었다.
“감독님, 괜찮으신 거죠?”
“음, 윤 코치. 미안한데 음료수 하나만 꺼내 줄 수 있을까?”
“네? 아, 네, 감독님. 잠시만 기다리십쇼.”
정윤석 감독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제자 이대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수혁이가 올라오면 그냥 음료수나 하나 꺼내 마시면서 지켜보십쇼. 알아서 해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