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1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16화(117/412)
#116. 아수라장
지난 2009년 WBC 1라운드와 2라운드에서 한국 대표팀은 일본을 상대로 2번 연속 승리를 기록했다.
전체적인 야구 수준은 일본에 미치지 못했지만 메이저리그와 일본에서 활약하던 몇몇 S급 선수들이 마지막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고, 다른 선수들 역시 일본에게만은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끝까지 이를 악물고 덤벼든 결과였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프로대표팀이 일본에게 야구로 이긴 마지막 메이저 대회였다.
이후 한국대표팀은 올림픽과 WBC에서 단 한 번도 일본을 이겨본 적이 없다.
지난 2023 WBC 1라운드 예선 탈락의 원인은 사실 호주전의 패배라고 봐야 했다.
당초 계획대로였다면 중국과 체코, 호주를 이기고 3승으로 2라운드에 진출했어야 했다.
WBC를 주최하는 메이저리그 사무국 역시 시장 규모가 큰 일본과 한국이 2라운드에 진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한국은 호주에게 덜미를 잡히며 또 한 번 1라운드 탈락이라는 치욕을 당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야구팬들의 가슴 속에 가장 크게 남아 있는 응어리는 바로 그 호주전에서의 패배일까?
아마도 아닐 거다. 그보다는 일본에게 또 한 번 당한 그 완패의 기억이 더 크게 남아 있을 것이다.
연봉이 10억이 넘는, 한국에서는 한껏 잘난 척을 하던 슈퍼스타들이 일본 투수들이 던진 155㎞/h가 넘는 광속구에 손도 대지 못하고 무너졌다.
반면 국내에서는 강속구 투수라고 불렸던 한국 투수들을 일본 타자들은 너무도 쉽게 공략했다.
13 대 4 대패.
안 그래도 거품론이 일고 있던 한국야구의 민낯이 샅샅이 드러난 날이었다.
특히 한국 팬들이 충격을 받았던 건 일본 투수들이었다.
그리 체격이 크지도 않은 일본 투수들이 너무나도 쉽게 존 구석구석으로 155㎞/h가 넘는 광속구를 뿌려댔다.
반면 한국선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일본의 젊은 선수들이 155㎞/h가 넘는 공을 던지는 동안 한국은 최고 구속이 142㎞/h까지 떨어진 35세의 노장에게 팀의 운명을 맡겨야만 했다.
아무리 구속이 전부는 아니라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퍼포먼스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구속을 높이는 것.
쉽지만 어려운 문제다.
미국에서 개발된 각종 구속 향상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인터넷에 널려 있기에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건 아니다. 당장 프로구단은 물론이고, 사설 야구교실만 가도 미국의 최신 트레이닝법을 아주 쉽게 배울 수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을 최대한 어릴 때부터 수행해야 한다는 거다.
프로를 꿈꾼다면 학생 때부터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하고, 자신의 육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 효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니까.
그렇게 육체가 어느 정도 완성된 후에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투구 매커니즘을 확립해야 한다.
바로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슈웅
뻐어어엉!
“스윙!”
눈앞을 스쳐 지나간 강속구에 완전히 얼이 빠진 에토 이오리가 바깥쪽으로 한참 빠지는 165㎞/h 포심에 어이없는 헛스윙을 해버렸다.
빠른 공을 갖고 있다는 건 이래서 편하다. 타자를 공포에 질리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몸쪽 낮은 코스로 들어가는 컷패스트볼.
빠졌다고 착각한 타자는 그냥 지켜보았고,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변화를 시작한 공은 그대로 존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칙쇼!”
자신이 속한 리그에서 최고의 자리에 군림했던, 일본 최고 명문구단의 간판타자이자 차기 감독감이라 불리는 에토 이오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의 표정에서 독기가 철철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지 기백을 품는다고 해서, 결사의 의지를 다진다고 해서 못 치던 공을 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편하게 돌아갈까.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다. 공을 치기 위해 필요한 건 그런 사무라이 정신이 아니라 정확한 선구안과 반사신경, 그리고 배트스피드뿐이다.
슈웅
부웅
“스윙! 아웃!”
* * *
– 아! 이게 뭔가요! 165㎞/h가 넘는 포심을 던지던 한수혁 선수가 95㎞/h짜리 슬로커브를 던져 에토 선수를 삼진으로 잡아냈습니다!
– 크크, 크크, 크하하, 크하하하하!
– 저기… 위원님?
– 아, 죄송합니다. 너무 기뻐서, 너무 기분이 좋아서 주책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시청자 여러분, 이해해주시겠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 흠흠, 삼진을 당한 에토 선수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덕아웃으로 물러납니다. 노아웃 주자 1, 3루가 1사 주자 1, 3루가 되었습니다.
– 진짜 미쳤네요.
– 네?
– 한수혁 선수가 빠른 공을 던진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사실입니다. 물론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고 싶어했던 몇몇 멍청이들을 제외하고 말이죠.
– 저기 위원님, 제발 말 조심 좀…….
– 네, 그러죠. 그럼에도 한수혁 선수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의문, 과연 실전에서도 그런 공을 계속 던질 수 있는가 하는 그 일말의 의구심이 이제 완벽히 해소되었습니다. WBC 한일전 무사 주자 1, 3루 상황에서 상대 간판 타자를 잡아냈으니까 말이죠.
–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 중계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 그냥 하세요. 저도 이러고 잘 사는데요, 뭐. 혹시나 방송국에서 잘리면 저랑 같이 개인방송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오래오래 방송국을 다니고 싶은 일개 직장인에 불과합니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건…….
– 네.
– 진짜 개시원하네요. 이제 저도 모르겠습니다. 고구마가 꽉 들어차 있던 목구멍에 사이다를 콸콸콸 쏟아 부은 기분입니다.
* * *
일본을 대표하는 강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괴물이군… 하지만 그래 봐야 아직 애송이야.’
이번 이닝 일본팀 공격의 물꼬를 텄던 1번 타자 하마사키 아키노리, 신시내티 레즈의 리드오프이자 주전 유격수라는 자존심으로 무장한 그가 3루에서 한수혁을 노려보았다.
같은 유격수 포지션,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저 풋내기를 비교하는 언론기사가 종종 나오곤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고작 한국리그에서 1년도 못 뛴 애송이와 일본에서 7년, 그리고 미국에서 다시 2년을 풀타임으로 뛴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 말이다.
오늘 경기에서도 저놈이 먼저 홈런을 기록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선수마다 팀에 공헌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팀이 한 점 차로 뒤지고 있던 7회초, 선두타자로 나와 깨끗한 안타를 뽑았고, 다음 타자의 안타 때 빠른 발을 이용해 3루까지 무사히 들어왔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한국팀의 남아 있는 투수 수준을 생각하면 일본의 3, 4, 5 클린업 트리오를 피해 간다는 걸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비록 점수는 한 점 뒤지고 있지만 이미 경기 분위기는 일본으로 넘어가버린 지 오래다.
한국 선수들과 팬들의 얼굴에 절망의 감정이 떠오르던 그때, 자신의 신경을 건드렸던 애송이 유격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168㎞/h짜리 포심과 95㎞/h 커브를 던져 일본의 간판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조금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직 상황은 절대적으로 일본에게 유리하다.
1사 1, 3루.
하마사키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3루 주자가 뛰는 척하며 투수를 자극한다. 그리고 그 사이 1루 주자가 2루로 들어간다.
병살타가 나올 상황을 없애고, 타자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작전이었다.
아무리 한수혁이라는 놈이 말도 안 되는 빠른 공을 던진다고 해도 프로 레벨에서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애송이다.
아마 지금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감도 못 잡고 있을 것이다.
흔들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약점을 노려야 한다.
일본 벤치에서도 하마사키의 뜻을 받아들였다.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하마사키가 곧바로 움직임을 시작했다.
아주 간단하다.
셋업 포지션 타이밍에 맞춰 살짝 한 보 앞으로 전진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 1루 주자가 2루로 뛸 찬스가 만들어질 것이다. 운이 좋다면 투수의 보크를 유도할 수도 있고, 어쩌면 포수의 악송구가 나올 수도 있다.
작전 야구에 있어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일본, 그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하마사키가 한수혁을 견제하기 위해 앞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던 바로 그 순간.
퍼억
“아웃!”
“나니……?”
하마사키의 몸 중심이 막 앞으로 이동하던 바로 그 순간 귀신 같은 3루 견제가 들어왔다.
생각도 못 한 그 송구에 하마사키의 몸이 완전히 굳어졌고, 3루수의 글러브가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 우아아! 한수혁 선수가 송구 한 번으로 3루 주자를 잡아냈습니다.
– 네, 하마노리 아키사키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드는, 정말 멋진 견제구였습니다!
– 위원님, 하마노리 아키사키가 아니라 하마사키 아키노리인데요.
– 남의 나라 선수 이름 같은 거 알게 뭡니까? 중요한 건 무사 1, 3루가 이제 2사 1루가 되었다는 거죠.
– 말씀드리는 순간 한수혁 선수가 초구를 던집니다! 헛스윙! 타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쳐? 딱 그런 표정이네요!
– 네, 이번에는 148㎞/h 파워커브였습니다. 웬만한 투수 포심 구속이죠. 저걸 친다고요? 흐흐, 만약 그런 타자가 있으면 당장 끌고가서 약물검사부터 해봐야 할 겁니다.
– 대단하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아앗, 한수혁 선수가 다시 두 번째 공을 던졌습니다! 스윙! 이번에는 다시 167㎞/h 포심이 바깥쪽 낮은 코스에 정확히 꽂혔습니다! 정말 어림없는 스윙이었습니다!
– 저 타자가 올 시즌 일본리그 홈런 선두라고요? 흠, 방금 그 스윙은 지나가던 파리가 앉을 정도로 형편없군요.
– 위원님, 아무리 국대 경기라고 해도 조금만 말 조심을… 어엇!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세트포지션에 들어가는 한수혁 선수! 던졌습니다! 스윙! 헛스윙! 삼진입니다! 무사 주자 1, 3루 상황에 등판한 한수혁 선수가 팀을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단 한 점도 주지 않고 마운드를 내려오는 한수혁 선수에게 엄청난 박수갈채가 쏟아집니다!
–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 그렇죠? 저도 제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오늘만큼 자랑스러웠던 적이…….
– 아뇨, 그거 말고요. 저런 대단한 선수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빨… 최선을 다해 응원해온 제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경미야, 보고 있니? 아빠, 드디어 성공했다! 내가 옳았어!
– 광고 보고 오겠습니다. 이곳은 시티필드입니다.
* * *
“잡아! 잡아! 이봐! 거기, 당신! 서! 서라고! 체포 안 할 테니 서라고!”
“싫어요! 또 쫓아내려고!”
“아니, 일단은 좀 서라고! 뭘 먹고 저렇게 빠른 거야!”
한수혁이 이번 이닝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순간, 시티필드의 안전망을 타고 올라 그 꼭대기에서 워리어스 깃발을 흔들어대던 민예린이 안전요원의 추적을 피해 관중석 이곳저곳으로 도망을 다니기 시작했다.
오늘 경기를 중계하던 미국 방송국 아나운서의 입에서 ‘당장이라도 빅리그에서 대주자로 써먹을 수 있을 스피드’라는 농담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한국 덕아웃에서는 작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혁아… 너, 너 진짜, 와아, 와아…….”
“한수혁! 이리 와! 인마, 한번 안아보자!”
“고맙다, 수혁아. 진짜 고마워.”
삼진 두 개와 견제구 하나.
무사 주자 1, 3루의 절대적 위기를 공 7개로 간단히 해결한 한수혁.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에 손에 땀을 쥔 채 경기를 지켜보던 동료 선수들과 코치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아무리 빠른 공을 던진다고 해도, 국제대회 경험 한 번 없는 1년 차 루키가, 이런 엄청난 위기를 단 한 점의 실점 없이 완벽하게 막아낼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사기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시발, 이번 이닝 공격 누구부터야?”
“우찬이부터인데요.”
“맞고라도 나가! 무조건 나가는 거다. 막내가 저렇게까지 했는데 절대 쪽팔리면 안 된다!”
“걱정 마십쇼, 형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기분 좋게 어우러지며 한국팀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덕아웃 내부의 온도가 후끈 달아올랐다.
한편 관중석에 앉아 있던 빅리그 스카우터들의 분위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흐흐흐, 흐흐흐, 흐흐흐흐흐.”
자신이 놓친 선수가 진심으로 경기에 임했을 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 시애틀의 스카우터 다니엘의 광소였다.
“이봐! 내 말 이해 못 하겠어? 당장 한국 지부로 스카우트 인력부터 파견해! 저런 선수를 데려오려면 몇 년이라는 시간도 짧아? 내 말 이해했어? 그래? 내가 다 책임진다고!”
한수혁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래 봐야 변방 리그의 풋내기에 불과하다 코웃음 치던 양키스 스카우터의 한 맺힌 목소리였다.
“…보스, KBO에서 추진 중인 해외 진출 자격 제한 단축 건 말입니다. 그거 우리 쪽에서 KBO와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로비를 좀 해보면 어떨까요?”
한수혁의 빠른 해외 진출을 위해 로비스트 투입까지 검토하게 된 보스턴 레드삭스의 스카우터가 단장과 통화를 나누었다.
“잡아! 아니, 서! 헉헉… 제발 그만 서라고요!”
“안 내쫓는다고 약속하시면요! 그럼 멈출게요!”
“아아악! 서라고! 제발!”
이제는 외야로 무대를 옮겨 진행되고 있는 민예린과 안전요원 간의 숨바꼭질이었다.
그렇게 한수혁 하나로 인해 시티필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