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2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20화(121/412)
#120. 두 번째 한일전
“선수들에게 전해. 절대 한국 놈들하고 시비를 벌여서는 안 된다고.”
“하잇!”
네덜란드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천신만고 끝에 4강전에 진출하게 된 일본.
경기를 하루 앞둔 휴식일, 호시노 감독이 긴장된 표정으로 코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한수혁… 음, 그놈은… 그래, 분하지만 인정하자고. 예전 우리 팀에 오타니가 있을 때 다른 팀이 이런 기분이었겠군. 아무튼 그놈은 피해. 좋은 공 주지 마. 절대.”
한국대표팀이 쿠바 투수의 턱을 박살 내고 4강전에 오른 그날, 일본 역시 네덜란드에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마지막 4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베네수엘라. 이번 2027 WBC 4강의 주인공들이었다.
처음 대회가 시작될 때만 해도 한국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보았던 일본.
하지만 예선전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하며, 또 8강전에서 강팀 쿠바가 한국에게 완전히 박살 나는 모습을 보며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다.
선수 하나하나의 기량만 놓고 보면 분명 일본이 한 수 위다.
냉정하게 판단해 한국 선수 중 일본 대표팀에서도 주전을 차지할 수 있는 레벨의 선수라 해봐야 류한결과 임준영, 이찬호, 이수영 정도가 전부였다. 나머지 선수들은 기량이 부족하거나 혹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단 한 명, 그 한 명의 존재가 모든 판도를 바꿔놓았다.
타석에 들어서면 말도 안 되는 타구를 날리고, 수비에서는 안타가 될 타구를 모조리 잡아내고, 심지어 마운드에까지 올라 168㎞/h 포심으로 8연속 삼진을 잡아내는, 마치 만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그런 캐릭터.
한수혁.
일본팀을 이끄는 호시노 감독은 지난 1라운드에서 패배의 이유가 한수혁과 정면 승부를 한 데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철저하게 한수혁을 없는 선수로 취급하자는 것이었다.
만약 만루에서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선다? 호시노는 아무 망설임 없이 자동고의사구를 지시할 생각이었다.
그놈은 괴물이라는 표현으로도 뭔가 부족한, 정말 자연재해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난 대회 우승으로 인해 한껏 높아진 일본 국민들의 눈높이는 4강 정도에 절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4강전에서 한국에 패해 돌아가면 할복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긴다. 무조건 이긴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긴다.
호시노 감독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괜찮아요, 선배?”
“어, 괜찮여. 여기 주먹이 좀 까졌는디 이런 건 연고 좀 바르면 금방 나아.”
2027 WBC 4강전 한국과 일본 간의 경기가 예정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홈구장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
경기장 주변에 태극기를 든 한국 관중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오늘 지면 진짜 좆되는겨.”
“한결아, 선발투수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이상하다.”
“아무튼 나는 한 점도 안 준다는 생각으로 던질 테니까 나머지는 형들이 알아서 해요.”
류한결이 초대형 태극기를 설치 중인 1루측 관중석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랬다. 일본과의 4강전이 열리는 오늘은 바로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이런 중요한 날 일본전에서 패한다?
국제대회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팀의 감독, 그리고 코치들이 백전노장이라는 점이다.
이미 WBC와 올림픽 사령탑으로서 수많은 한일전을 치른 정윤석 감독은 선수들에게 가해질 부담을 자신이 모두 짊어지려는 눈치였다.
경기를 앞두고 오전 일찍 진행된 프레스데이. 주장인 김성수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윤석에게 여러 질문들이 쏟아졌다.
“오늘은 한국의 독립기념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선수들의 각오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
“물론이죠.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이미 이번 대회에서 자신의 재능과 기량을 입증했습니다. 만약 오늘 경기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그건 모두 감독인 제 탓이 될 겁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죠.”
섹시한 금발머리 미국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답해주고.
“감독님, 지난 쿠바전에서 지나친 벤치 클리어링으로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군요. 그럼 거기서 겁쟁이처럼 주저앉아서 울기라도 하란 말입니까?”
어떻게든 가십거리를 만들려는 찌라시 신문 기자의 입을 막아버리고.
“오늘 경기에서 혹시 한수혁 선수의 등판 계획이 있는지요?”
“정해진 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수혁의 등판에 대한 모든 억측을 잠재워버리고.
그렇게 선수들에게 향할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로 끌어 모은 정윤석이 선수들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 힘 빼고 부담 없이 경기하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오늘 날이 날이잖아. 그렇지?”
“네, 감독님.”
“좋아, 오늘 너희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해.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면 된다. 그거면 충분해.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너희가 할 수 있는 걸 모두 다 한다면 그 뒤는 내가 책임진다.”
“네! 알겠습니다!”
“좋아, 오늘 라인업이다.”
1번 타자 유격수 한수혁(서울 워리어스)
2번 타자 중견수 이찬호(서울 파이터즈)
3번 타자 1루수 이수영(대구 버팔로스)
4번 타자 지명타자 고철환(서울 매지션스)
5번 타자 좌익수 김성수(서울 매지션스)
6번 타자 우익수 강우찬(인천 레인저스)
7번 타자 2루수 이태웅(대구 버팔로스)
8번 타자 포수 정대한(수원 커맨더스)
9번 타자 3루수 김세준(대전 팔콘스)
선발투수 류한결(대전 팔콘스)
* * *
– 조금 낡은 멘트 같지만 오늘 날이 날인 만큼 제 감정이 벅차오르는 걸 어쩔 수 없군요.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조국의 명예를 위해 나선 야구대표팀의 전사들이 잠시 후 일본과 결승전 티켓을 놓고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 광복절에 열리는 한일전.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제 생에 이런 경기를 중계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저 역시 이곳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해설에 임하겠습니다.
– 고동식 위원님, 4강전입니다. 대회 시작 전만 해도 1라운드 돌파가 목표였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정말 파란만장한 대회였죠?
– 맞습니다. 1라운드에서 4전 전승을 기록하고, 일본전에서는 한수혁 선수가 충격적인 투수 등판을 하고… 음, 쿠바전에서는 장덕수가 맹활약하고, 영화로 만들어도 억지 소리를 들을 만큼 극적인 진행이었습니다.
– 오늘 선발 라인업에서 특이한 부분이, 한수혁 선수가 유격수 겸 1번 타자로 출전했다는 것인데요.
– 네, 이야, 전 정말 보자마자 감탄했습니다.
– 어떤 이유인가요?
– 지금 일본뿐만 아니라 4강에 오른 모든 팀들이 한수혁 선수를 경계하고 있거든요. 지금까지 진행된 5경기에서 홈런만 8개입니다. 중국 같은 하꼬, 죄송합니다. 약팀과의 경기를 제외하더라도 진짜 엄청난 기록입니다. 당연히 일본에서도 한수혁 선수를 최우선으로 경계하고 있고요.
– 그렇군요. 그럼 정윤석 감독이 한수혁 선수를 1번으로 내세운 건…….
– 오늘 아마도 일본 투수들이 한수혁 선수를 철저히 피해 갈 겁니다. 이에 대해 정윤석 감독은 이런 식으로 답을 내놓은 거죠. 그래, 어디 한번 걸러봐라. 너희들은 항상 1루에 주자를 놓고 경기를 하게 될 거다 하고 말이죠.
– 아, 그렇군요. 그럼 한수혁 선수가 1루에서 어떻게 움직여주느냐가 상당히 중요하겠습니다.
– 맞습니다. 한수혁을 피하려는 일본의 작전, 그리고 이에 맞서는 1번 타자 한수혁 카드, 이게 바로 오늘 경기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 투수 쪽을 살펴보죠. 예정대로 류한결 선수가 선발로 나왔습니다.
– 네, 오늘 한국팀은 지난 쿠바전에서 던진 투수들을 제외한 모든 선수가 불펜에서 대기하게 됩니다. 어차피 한 번 지면 바로 탈락입니다. 뒤를 아낄 필요가 없죠.
– 알겠습니다. 아, 저쪽을 보시죠. 가수 민예린 씨가 직접 준비한 대형 태극기 퍼포먼스가 1루 관중석 쪽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정말 장관입니다!
– 이번 대회에서 민예린 씨를 비롯 한국에서 날아온 응원단들이 정말 큰 몫을 해냈습니다. 선수들이 그러더라고요. 민예린 씨가 안전망을 타고 다니니 여기가 타지 같지가 않았다고요.
– 과연 그렇군요. 자, 그럼 잠시 광고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이곳은 한국과 일본 간의 4강전 경기가 준비 중인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입니다.
* * *
부웅
‘이 자식은 대체…….’
1회초 공격에서 류한결에게 안타와 볼넷을 얻어내고도 후속타의 불발로 득점에는 실패한 일본.
이어진 1회말 한국의 공격, 타석에 한수혁이 들어서자 일본 포수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한신 타이거즈 소속으로 벌써 10년 넘게 일본 대표팀의 안방을 책임지고 있는 베테랑 포수.
그간 경험한 한일전이 몇 번이던가.
한국이라는 나라는 참 신기하다.
그가 첫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나 지금이나 한국과 일본의 야구 수준 차이는 명확했다.
그런 수준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일전을 팽팽하게 만든 건 한국 선수들의 투지였다.
그가 신인이던 시절, 그러니까 처음으로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자신을 노려보며 눈에 불을 켜고 덤비던 한국 선수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런 한국팀만의 색채가 퇴색되었다.
한국 선수들의 눈빛에 절박함이나 투지 대신 여유로움과 권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본만 보면 미친듯이 덤벼들던 선수들은 이미 노장이 되어 있었고, 실력에 맞지 않는 과한 대우와 보호를 받으며 자라온 신인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멍청이들에 불과했다.
이후 일본은 단 한 번도 한국에 져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그런데 오늘, 자신이 마지막으로 대표팀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된 이번 대회, 그것도 광복절 한일전에서 예전의 그 광경들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되었다.
온몸에서 당장이라도 불꽃이 일렁일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는 한국 선수들, 대형 태극기까지 동원해 응원전을 펼치고 있는 한국팀 응원단.
그리고 한수혁.
이번 대회에서 무려 8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있는, 거기에 투수로 등판해 일본 타자 8명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낸 말도 안 되는 괴물.
부웅
그 괴물이 선두 타자로 나서 마치 투수를 위협하듯 방망이를 빙빙 돌려댄다.
숨이 턱 막힌다. 이런 게 바로 존재감이라는 건가.
“타자, 1루로!”
한수혁이 타석에 서자마자 일본 벤치에서 자동고의사구를 요청했다.
방망이를 붕붕 돌리던 한수혁이 입맛을 쩝 다시더니 1루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놈이 타석을 벗어나 저 멀리 사라지자 그제야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인다.
‘칙쇼……!’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몰리게 된 걸까?
이번 대표팀의 전력이 과거보다 떨어지는 건 절대 아니다.
신시내티 레즈의 주전 유격수, 시카고 컵스의 2선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간판타자, 그 외 빅리그와 일본 리그에서 뛰는 수많은 선수들이 대표팀에 합류했다.
그렇다고 한국 대표팀의 전력이 예전보다 강하냐?
그것도 아니다.
류한결과 임준영, 두 투수는 예전부터 이미 잘 던지던 투수였고, 양지호와 구철중, 이하영은 늙었으며, 박도율과 최경재는 올 시즌 성적이 대폭 하락한 상태다.
타자 쪽 역시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세대 교체에 실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선수 구성이다.
단 한 명, 지금 1루 베이스를 밟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투수를 바라보고 있는 한수혁, 저 괴물 하나가 더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일개 선수 한 명의 존재감이 이렇게 클 수도 있다는 말인가.
“플레이!”
타석에 2번 타자 이찬호가 들어섰다. 지난 1라운드 경기에 이어 또 한 번 한국전에 선발등판한 다나카 야마토가 굳은 표정으로 사인을 보내왔다.
피치아웃을 하자고?
한수혁이라는 놈이 도루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1라운드 경기에서도 도루를 내줬고 말이다.
그래,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포수 다카하시가 고개를 끄덕였고, 투수가 바깥쪽으로 멀찌감치 빠지는 공을 던졌다.
“볼.”
지나친 기우였을까. 1루 주자 한수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1루로 귀루했다.
평소보다도 오히려 좁은 리드폭이다. 도루를 시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리드폭.
하긴, 한국팀의 타력을 생각하면 무사 주자 1루 찬스라는 게 쉽게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안심한 투수가 다시 공을 던질 준비를 시작했고, 타석에 있던 이찬호가 신중한 표정으로 보내기 번트 자세를 취했다.
그래, 사실 이게 정석이다. 다카하시가 벤치를 쳐다보았다. 그냥 번트를 대주고 아웃 카운트를 늘리라는 사인이 떨어졌다.
투수에게 바깥쪽 낮은 코스의 투심 사인을 보냈다. 번트가 성공해도 어쩔 수 없고, 혹시나 운이 좋으면 뜬 공을 만들 수 있는 그런 공이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투수가 천천히 투구 준비에 들어갔다.
선수와 코칭스태프, 관중, 모두의 머릿속에 보내기 번트라는 그림이 그려지던 그때.
타탓
“아앗!”
한수혁이 단번에 2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