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2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21화(122/412)
#121. 마지막 기회
포수의 수비력을 평가하는 지표 중 도루 허용률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주자에게 얼마나 도루를 허용했는가를 퍼센테이지로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도루 허용의 책임은 포수에게 있을까?
글쎄, 물론 포수의 역할 역시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현대 야구에서 도루 허용에 대한 책임은 투수에게 70% 이상 있다는 게 야구계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아무리 포수가 대단한 어깨를 가졌다고 해도 마운드 위에 선 투수가 주자에게 타이밍을 뺏기면 절대 도루를 저지할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주자는 투구 동작 사이의 빈틈, 투수의 호흡과 호흡 사이의 헛점을 노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리드폭이 다소 좁다고 해도 충분히 도루에 성공할 수 있다.
촤아악
“세이프!”
바로 지금의 한수혁처럼 말이다.
– 살았습니다! 한수혁 선수의 기습적인 도루 시도가 성공했습니다! 무사 주자 1루가 무사 주자 2루로 바뀝니다!
– 정말 대단하네요. 방금 전 도루는 한국팀 덕아웃의 작전, 그리고 한수혁 선수의 야구 센스가 더해진 기가 막힌 결과물입니다.
– 자세한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 물론이죠.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한수혁 선수의 리드폭을 보세요. 위아래 비교 화면 보시면 더욱 정확하겠군요. 평소보다 거의 한 보 가까이 짧죠? 도루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이찬호 선수가 번트 자세까지 취했잖아요.
– 그렇군요.
– 네, 아무리 한수혁 선수의 발을 경계한다 해도 이런 상황이면 일본 팀 역시 정석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죠. 일본 팀 2루수와 유격수 수비 위치를 보세요. 도루를 대비하기보다는 보내기 번트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잖아요? 이렇게 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상대의 허를 찌른 겁니다. 크으…….
– 하지만 리드폭이 좁다는 건 결국 도루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거 아닌가요?
– 맞습니다. 그걸 커버한 게 바로 타이밍이죠. 저기 뛰는 순간을 보세요. 한수혁 선수가 도루를 할 때마다 제가 감탄하는 게 저 타이밍입니다. 다른 선수들보다 스타트 타이밍을 잡는 게 훨씬 빨라요. 투수가 움찔 하는 순간 바로 뛰어 버리는 거죠. 사실 모르겠습니다. 이제 프로 1년 차에 불과한 신인이 어떻게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을까요?
* * *
일본 덕아웃의 첫 번째 고의사구 작전은 결국 무사 주자 2루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마운드에 선 일본팀의 에이스 다나카 야마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칙쇼……!’
심드렁한 표정으로 1루에 서 있던 놈에게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한수혁이 2루로 스타트를 끊는 순간 하마터면 보크를 저지를 뻔했다.
너무나도 완벽한 타이밍, 마치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읽고 있는 듯한 느낌.
다나카는 예전에도 몇 번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빅리그에서 대도 소리를 듣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적어도 10년 이상 정상의 자리에 군림한 그런 주자들을 상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저 녀석은 고작해야 프로 1년 차 신인에 불과하다.
우연일까? 만약 저 녀석이 다음 타석에서 또 1루로 출루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애초에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동고의사구를 준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야구계에서 호시노 감독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은퇴 후를 생각하면 그에게 항명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짜증 섞인 한숨을 한 번 내뱉은 다나카가 2루 주자를 흘끗 바라본 후 타자에게 초구를 던졌다.
“볼.”
도루를 허용해서 그런지 타자보다 주자에게 더 신경이 쓰인다.
이러면 안 된다. 지금 타석에 있는 이찬호라는 놈은 이번 시즌 후 빅리그 진출을 노리는, 일본 대표팀에 와도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좋은 타자다.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한번 흔들린 집중력은 그리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다나카의 제구력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이찬호는 그 공을 놓치지 않았다.
따아악!
“우와아아아!”
“이찬호! 이찬호!”
1루수와 2루수 사이로 빠져나가는 안타.
약간은 애매할 수도 있는 타구였지만 한수혁은 타격음이 들리자마자 아무 망설임 없이 스타트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아주 여유 있게 홈으로 들어왔다.
1회 시작하자마자 스코어 1 대 0, 그리고 계속되는 노아웃 주자 1루의 위기.
다나카는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한수혁에 대한 고의사구 작전을 중단해야 한다는 걸.
저놈을 등 뒤에 두고는 도저히 제대로 된 투구를 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 * *
1회말 공격에서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야구 선수로서 내 신체와 감각이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경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 상대하는 일본 대표팀의 전력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빅리그 하위권 팀 수준에 육박했다.
약간의 방심이 섞여 있던 지난 예선전 때와는 달랐다. 오늘 일본팀은 내가 회귀 후 만난 가장 강한 상대였다.
오랜만에 빅리그 레벨에서 경기를 하는 즐거움, 그리고 적당한 긴장감.
그것이 나를 다음 단계로 이끌고 있었다.
이찬호의 안타 때였다.
타격음이 들리는 순간, 이찬호의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나는 그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누가 원리를 설명하라 해도 절대 할 수 없는, 마치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 혼자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감각.
그 감각은 내가 홈플레이트를 밟은 후 곧바로 사라졌다.
아쉽다. 너무나도 아쉽다. 그 감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정말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아쉬움 따위나 삼키고 있을 때가 아니다.
1회말 이찬호의 적시타로 1점을 앞서 나가던 우리는 2회초, 류한결이 일본 팀 8번 타자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동점이 되고 말았다.
이어진 2회말 한국의 공격, 그리고 3회초 일본의 공격은 득점 없이 끝났다.
그리고 3회말, 나는 또다시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섰다.
“배트를 그냥 두고 나올 걸 그랬나? 이거 꽤 무거운데 어차피 거를 거면 미리 말 좀 해주지?”
“…….”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다. 10년 넘게 대표팀 주전 마스크를 쓴 놈이라길래 뭔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전혀 반응조차 없다.
진짜 날 없는 사람 취급하겠다는 건가.
“타자, 1루로.”
역시나 또 자동고의사구다.
“다음부터는 배트를 두고 나올 테니 너도 보호장비 같은 건 차지 말아. 무겁잖아, 그거.”
“…….”
아, 재미없다. 이거 뭐 반응이 있어야 입이라도 털지.
그렇게 만들어진 무사 주자 1루.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
1회말이 생각난 것일까.
하얗게 질린 얼굴의 일본 투수가 7개 연속 견제구를 던져댔다. 뛸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베이스에 거의 붙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스트라이크!”
“세이프!”
“볼.”
“세이프!”
“우우우!”
“겁쟁이 새끼! 자신 없으면 그냥 마운드를 내려가!”
볼 하나 던질 때마다 견제구가 한 번씩 날아온다.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다. 얼굴이 하얘졌다 파래졌다 하는 걸 보니 말이다.
다시 한번 집중력을 끌어올려 본다.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그라운드 위에 서 있는 선수들, 특히 똥 씹은 표정으로 타자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투수의 호흡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투구판 위에 놓여 있는 발,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들이쉬고, 내쉬고, 거칠어지는 투수의 호흡.
투수의 발이 움직이려는 바로 그 느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이 전해졌다.
타탓!
“어엇!”
“볼.”
촤아아악
“세이프!”
“또 도루야! 시발,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승부를 하라고!”
일본 응원석에서 관중들의 야유가 터져 나온다.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다. 오늘 진짜 야구할 맛 난다.
* * *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이기겠다고 나선 일본팀을 상대로 한국 역시 전력을 다해 부딪혔다.
3회말, 또 한 번의 자동고의사구와 도루로 만들어낸 무사 주자 2루 찬스에서 이찬호의 진루타와 이수영의 희생플라이가 터지며 한국이 2 대 1로 다시 한 점을 앞서 갔다.
일본에 다나카 야마토라는 괴물 투수가 있다면 한국 마운드에는 빅리그 진출의 마지막 단계를 밟고 있는 또 다른 괴물 류한결이 있었다.
매회 안타와 볼넷을 허용하면서도 류한결은 어떻게든 6이닝을 버텨냈다.
선발 6이닝 1실점, 마운드를 내려가는 류한결의 등 뒤로 한국 관중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수혁아, 만약 내 목표가 한일전 승리였다면 여기서 너를 등판시켰을 거다. 하지만 아니야. 내, 아니, 우리 팀의 목표는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다. 그러니 기다려라.”
나는 3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불펜 투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윤석 감독은 내게 오늘 경기 등판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 순간 나는 정윤석 감독의 눈이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 과감한 도박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정윤석 감독은 나 대신 이하영과 박도율, 구철중을 차례로 마운드에 올렸다.
2009년 이후 무려 18년 만에 찾아온 WBC 결승 진출의 기회.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들이 이를 악물고 일본 타자들을 막아냈다.
7회초와 7회말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8회초 일본의 공격, 젊은 시절 일본 킬러라 불리던, 국제대회 일본을 상대로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던 구철중이 3번 타자 에토 이오리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아직 불펜에는 최경재와 양진호 같은 투수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정윤석 감독은 구철중의 노련함을 믿으며 그를 그대로 마운드에 두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예선전에 이어 8강 쿠바전에서 또 38개의 공을 던진 구철중의 어깨는 지쳐 있었다.
일본팀의 4번 타자로 나선 베테랑 포수 다카하시 렌지의 스윙이 구철중의 초구를 강타했다.
처음 맞았을 때만 해도 펜스 앞에서 잡힐 것 같던 타구가 외야 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계속 뻗어 나갔다.
“안 돼!”
“아아악!”
평소 같으면 외야 플라이에 그쳤을 타구, 하지만 행운의 여신이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3 대 2로 경기를 뒤집는 역전 투런 홈런이 터졌다.
홈런을 허용한 구철중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고, 덕아웃에 있던 일본 선수들이 모두 뛰어 나와 다카하시에게 달려 들었다.
한국 관중석에 나부끼던 태극기들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고, 반대로 일본 관중석 곳곳에서 욱일기가 등장했다.
경기를 역전시킨 일본 대표팀은 그 즉시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2선발로 뛰고 있는 하야시 렌타로를 마운드에 올렸다.
구위 하나만 놓고 보면 일본 대표팀에서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하야시가 8회말 한국 대표팀의 3, 4, 5 클린업 트리오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다.
일본 관중들은 이미 경기가 끝난 것처럼 기뻐 날뛰기 시작했고, 반대편 한국 관중석은 침묵에 잠겼다. 두 눈이 벌겋게 부어오른 민예린이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쳤지만 그 누구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운명의 9회가 찾아왔다.
9회초, 정윤석 감독이 선택한 카드는 최경재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절대 추가점은 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 수혁아. 한번 믿어봐라.”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정대한과 최경재 배터리가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올시즌 다소 부진하기는 했지만 진심을 담은 최경재의 공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가 공 하나하나에 모든 걸 담아 일본 타자들을 상대했다.
1사 후 2루타를 허용하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이후 두 타자를 연속 범타로 처리하며 가까스로 위기를 탈출했다.
“괜찮으세요?”
“으응? 아, 그래. 수혁아, 괜찮아.”
투구를 끝내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최경재의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서 잘게 경련이 느껴질 정도였다.
올 시즌 내내 적으로 만났던 선수다. 그런데 고작 십여 일 남짓 같은 팀에서 뛰었다고, 그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순간, 가슴 속에서 또 무언가 울컥했다.
국가대표에 소집된 후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온 원동력은 상대 팀에 대한 적의였다.
끝도 없이 귀찮게 구는 일본과 중국의 언론들, 그리고 우리 팀을 하찮게 내려다보는 시선들, 경기 중 날아오는 상대팀 선수들의 적의.
그런 것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대표팀 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응원석에서 우리를 위해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는 응원단을 위해 뛰고 싶어졌다.
나가고 싶다. 한 타석만이라도 제대로 승부를 하고 싶다.
내 손으로 이 경기를 뒤집어버리고 싶다.
“플레이!”
오늘 경기를 결정지을 마지막 9회말이 시작되었다.
하야시 렌타로가 내려가고, 마운드에는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마무리로 뛰고 있는 일본 대표팀의 주전 마무리 마에다 유키오가 올라왔다.
오늘 마운드에 오른 네 명의 일본 투수들 중 무려 세 명이 빅리그 주전들이다.
게다가 마에다는 왼손이면서도 160㎞/h를 던질 수 있는, 거기에 제구력까지 갖춘, KBO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그런 특급 투수였다.
“스윙! 아웃!”
“아…….”
영상으로 보던 것처럼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타자 무릎으로 파고드는 160㎞/h 포심에 6번 타자 강우찬이 배트 한 번 내밀지 못하고 그대로 삼진을 당했다.
순식간에 원 아웃.
한국 응원석에서 다시 한번 절망과 탄식이 섞인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고, 일본 관중석에서 나부끼는 욱일기의 숫자가 더욱 늘어났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7번 타자 이태웅이 타석에 들어섰다.
전문 2루수가 없는 대표팀에서 대회 내내 2루를 책임져준 이태웅이었다. 공격에서도 3할의 타율을 기록하며 하위타선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준 선수다.
하지만 마에다의 벽은 높고도 높았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160㎞/h에 달하는 포심과 152㎞/h 투심이 연달아 존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타임을 요청한 이태웅이 한숨을 푹 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모두의 머릿속에 패배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한국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 절망적인 분위기는 곧 사방팔방으로 번져나갔다.
마치 장례식장에 온 듯한 암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아직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았다.
부웅
“아앗!”
“1루!”
“젠장!”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곧바로 삼진을 노리고 들어온 스플리터.
이태웅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고, 바운드된 공을 향해 일본 포수가 미트를 내밀었다.
하지만 바닥에 맞은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며 낫아웃 상황이 되었다. 전력을 다해 1루로 뛰어 나간 이태웅이 허리를 푹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기적이었다.
3 대 2 한 점 차 상황에서 정말 기적처럼 찾아온 마지막 1사 주자 1루 기회.
8번 정대한을 대신해 대타 민주현이 타석에 들어섰다.
꼰대스러움이 철철 넘치는 성격 탓에 대표팀 내에서도 별로 인기가 없기는 하지만, 그런 성격만큼 쉽게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선수다.
또한 배트 스피드 하나만큼은 팀 내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타자다.
“볼.”
“스트라이크!”
“파울!”
“볼.”
“파울!”
민주현이 젖 먹던 힘을 다해 마에다의 공을 커트해냈다. 명백하게 빠지는 공을 제외한, 존 근처로 들어오는 모든 공을 계속 걷어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행운이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찾아왔다.
따악!
“페어!”
바깥쪽에서 더 바깥쪽으로 휘어 나가는 투심을 민주현이 툭 밀어쳤다.
그 타구가 1루 베이스 바로 앞에서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키며 엉뚱한 곳으로 튀어버렸다.
뒤늦게 공을 잡은 1루수가 허둥지둥 1루 베이스를 밟았지만 발 빠른 민주현은 이미 1루를 밟은 상황.
1사 주자 1, 2루가 만들어졌다. 안타 하나면 동점, 큰 것 한 방이면 역전도 가능한 상황.
한국 대표팀 덕아웃이 움직였다. 정윤석 감독의 입에서 누구가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대타 장덕수.”
감독의 호출에 오늘 경기 내내 덕아웃에만 앉아 있던 장덕수 선배가 담담한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발을 디뎠다.
부웅
그러고는 보란 듯이 엄청난 스윙을 해댔다.
누가 봐도 큰 것 한 방을 노리는, 동점이 아닌 역전을 노리는 그런 스윙이었다.
일본 선수들의 머릿속에 올 시즌 장덕수가 기록한 홈런의 숫자가 떠올랐다.
“큰 거 조심해! 낮게! 낮게 던지라고!”
“별 것 없어! 마에다! 그냥 하던 대로 해! 명백하게 네가 위다!”
일본 선수들이 들으라는 듯이 고함을 지르며 서로를 격려했다.
그리고 일본의 마무리 투수가 천천히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제대로 맞은 타구 하나 없이 주자를 두 명이나 내보내게 된 일본팀의 최강 마무리 마에다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런 그의 손끝에서 오늘 던진 공 중 가장 위력적인 포심이 장덕수의 무릎 쪽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왔다.
오늘날 마에다라는 투수를 있게 만들어준 160㎞/h에 가까운 강력한 포심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툭
“헉!”
당장이라도 공을 쪼개버릴 것처럼 큰 스윙을 하던 장덕수가 마에다의 초구를 향해 가볍게 배트를 내밀었다.
“칙쇼!”
3루수 방향으로 향하는 기습번트, 허를 찔린 일본 수비수들이 그 공을 향해 달려 들었고, 장덕수는 아랫입술이 터지도록 입술을 꽉 깨문 채 1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