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23)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22화(123/412)
#122. 완벽한 스윙
‘덕수야, 달려! 할 수 있어, 이눔아!’
‘할매! 저한테 힘을 줘유! 제발 이번 한 번만!’
3루 쪽 기습번트를 대고 1루로 전력질주 하는 장덕수의 머릿속에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그리운 목소리다.
혹시나 내가 지금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중일까? 아니면 혹시 투수의 공에 머리를 맞고 기절한 상태인 건 아닐까?
모르겠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
3 대 2로 뒤처진 가운데 기적처럼 찾아온 1사 주자 1, 2루 상황.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 대타로 나서라는 감독의 말에 장덕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게 뭘 바라는 걸까? 큰 거? 아니면 작전?
정윤석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하라고 말해 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타석에 들어섰고, 큰 스윙으로 투수를 위협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장덕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금 이 상황에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걸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장덕수의 위협적인 스윙에 일본 야수들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확인한 장덕수는 초구에 바로 기습번트를 대 버렸다.
기억나는 건 딱 거기까지다. 정말 이 순간이 꿈이라 해도 믿어질 만큼 정신이 아득하다.
‘안 돼, 이럼 안 돼. 정신 차려, 장덕수!’
저도 모르게 멀어져 가는 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장덕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터진 아랫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와아아아!”
“달려!”
“제발! 제바아알!”
“덕수 이 시끼야! 달리라고!”
막혀 있던 귀가 뻥 뚫리며 갑자기 관중들의 고함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자신이 만들어낸 흙먼지가 허공으로 비산하며 입 속으로 파고든다.
“빨리! 빨리!”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절박한 목소리가 장덕수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눈앞까지 다가온 일본 팀 1루수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지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가 지금 포구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지금 1루를 향해 송구가 날아오고 있다는 걸.
베이스까지 남은 거리는 고작 한 걸음 반.
그대로 계속 달리는 게 맞는 걸까?
‘아녀, 이건… 이건…….’
장덕수의 본능이 얘기해주고 있었다. 이대로 달리면 무조건 아웃이라는 걸.
과학적으로,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학적으로 1루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은 별 의미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장덕수의 가슴 속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당장 하라고, 그걸 해야 한다고.
지금은 그걸 해야만 하는 타이밍이라고.
“끄아아악!”
“헉!”
장덕수가 1루를 향해 온몸을 던지자 일본팀의 1루수가 깜짝 놀라 주춤거렸다.
120㎏에 달하는 거대한 덩어리가 마치 발사되듯 베이스를 향해 미끄러진다.
과연 이런 걸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장덕수의 플레이는 마치 먹잇감을 향해 몸을 던지는 불곰을 연상시켰다.
촤아아아아악
엄청난 흙먼지를 만들어내며 장덕수가 1루 베이스를 손으로 짚었다. 그와 동시에 1루수의 글러브 속으로 송구가 빨려 들어왔다.
“아, 아웃!”
“안 돼!”
“아악!”
“야 이 시발! 그게 왜 아웃이야!”
아웃이 선언되자 경기장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엄청난 관중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다.
절망의 끝에서 다시 한번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한국팀의 응원단, 그리고 9회말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약팀을 응원하는 미국 관중들이었다.
“타임.”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윤석 감독이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이런 순간을 위해 아껴온 마지막 카드였다.
심판이 판독실과 대화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경기장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침묵이 끝났다.
“세이프!”
“꺄아아아악!”
판정이 번복되었다. 세이프가 선언되는 순간 또 한 번 야구장 전체가 들썩거렸다.
살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낸 장덕수, 그리고 나머지 주자들이 베이스 위에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끝날 것만 같았던 경기가 기적적으로 다시 이어졌다.
선수들의 노력과 약간의 행운이 겹치며 만들어진 1사 만루 찬스.
대기타석에서 잠시 물러나 있던 내게 정윤석 감독이 다가왔다.
“수혁아.”
“네, 감독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2009년 WBC 결승전에서 일본에 진 기억이 나는구나.”
“…….”
“그때 나는 감독으로서 너무 성급했단다. 그리고 우리 팀은 결승전에 오르기 전까지 너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어. 그 결과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
정윤석 감독은 굳이 내게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내게 하는 말이 아닌, 평생을 야구에 몸 바쳐온 어느 야구인의 독백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번 대회에서만큼은 우승을 목표로 팀을 운영했단다. 남들이 뭐라 비웃든 말든 내 목표는 줄곧 우승이었어. 그래서 참았다. 너를 마운드에 올리고 싶은 마음을 말이야.”
감독이 선수에게 하는 말이 아닌,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하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투가 기분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정윤석 감독과 눈을 맞추고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줬을 뿐이다.
“좋아. 그동안의 모든 갈등과 고민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구나. 1점 차 1사 만루. 아무리 저놈들이라 해도 여기서 또 널 거르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보여주렴. 한수혁이 어떤 선수인지, 네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말이야. 가라. 가서 보여주고 돌아와.”
나는 누군가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싸워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 내 플레이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회귀 후 워리어스의 우승을 위해 달려가는 과정조차도 어쩌면 내 욕심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지만,
“우아아아아아!”
“여러분! 한수혁 선수에게 힘찬 박수를! 그리고 응원을!”
“한수혁! 제발! 제발 한 방만!”
“오빠! 흐어어엉! 오빠야! 내가 더 잘할게! 오빠!”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고함을 지르는 응원단의 얼굴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야구를 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저 사람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저 긴장과 절망, 실패에 대한 공포, 그 무수한 감정들을 성공의 환희, 그리고 즐거움, 희열로 바꿔주고 싶다.
내 목표, 욕심, 계획, 그런 것들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국제대회, 그리고 아직은 동료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대표팀의 선수들.
저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평생 잊지 못할 그 무언가를.
부웅
“젠장, 우리가 지금까지 네가 무서워서 피했다고 생각하면 오산…….”
“입 닥치고 야구나 해, 애송이.”
“뭐? 누가 누굴 보고 애송…….”
지금 이 순간 내 의식은 한국대표팀의 1년 차 루키가 아닌, 은퇴를 거의 앞뒀던 15년 차 빅리거 시절의 그때로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든 내 신경을 건드리려 애쓰는 일본 대표팀 베테랑 포수의 도발이 우습고 하찮게만 느껴진다.
길게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입을 닫고 가만히 놈을 바라보았다.
내 눈빛에서 뭔가를 읽었는지 포수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고,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눈을 돌려버렸다.
마운드에 선 투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좌완 마무리 마에다 유키오.
160㎞/h에 달하는 파괴적인 포심으로 빅리그 마무리 자리를 꿰찬 일본 최고의 클로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내 전성기 시절을 함께한 투수들 중에는 저 녀석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던 수많은 괴물들이 존재했다.
문제는 투수가 아닌 일본 벤치의 선택이었다.
오늘 경기 내내 고의사구를 남발하며 나를 없는 선수 취급했던 일본 벤치다.
최악의 경우 또 고의사구가 나올 수도 있다. 동점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나와의 승부를 피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플레이!”
하지만 투구 준비를 마친 마에다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놈들이 나와의 승부를 선택했다는 걸.
동점을 주고 이찬호와 상대를 하는 대신 나와의 승부에서 모든 걸 결정짓기로 했다는 걸.
“볼.”
몸 쪽 가장 먼 곳, 존에서 공 한 개가 빠지는 158㎞/h 포심. 회전 수가 좋아 체감 속도는 그보다 더 빠르게 느껴지는 좌투수의 강속구.
일본 벤치의 선택은 스트라이크 존을 스쳐 지나가는 보더라인 피칭이었다.
내가 말려들면 좋고, 최악의 경우 볼넷을 내주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던지는 그런 공들이 연속으로 들어왔다.
“스트라이크!”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녀석은 구위와 제구력만 놓고 보면 회귀 후 내가 만난 가장 강력한 투수였다.
볼 카운트 1볼 1스트라이크.
놈이 투구 동작을 취하는 순간 배트를 쥐고 있던 왼쪽 손을 그대로 놓아버리고 가만히 공을 쳐다보았다. 전혀 칠 의사가 없음을 표시한 거다.
“볼.”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홈플레이트 뒤에 있는 포수에게 말했다.
“어차피 내보낼 거면 그냥 자동고의사구를 요청하든지 해. 서로 피곤한 짓 하지 말고.”
“칙쇼……!”
나와 포수 사이에 험한 말이 오가는 걸 투수도 느낀 것 같다.
녀석의 표정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바로 그 증거다.
“너희 팀 감독보다는 저 투수 녀석이 그나마 좀 낫군. 얼굴색을 보니 적어도 부끄러움은 아는 것 같단 말이지.”
“그 입 안 닥치면 네 머리통으로 공이 날…….”
“해볼 테면 해봐. 한 번에 날 죽이지 못하면 이 배트에 네놈 대가리가 터질 테니까.”
“…….”
배터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중심을 잡아야 할 포수의 분노는 곧 투수에게로 전염된다.
이 먼 거리에서 투수의 입매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면, 이제는 무언가를 크게 결심한 표정이었다.
좋다. 이제야 내가 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슈웅
“볼.”
심판의 볼 선언에 투수가 욕설을 내뱉는 게 생생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던진 다른 볼들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승부구를 던진 것이 존 밖으로 빠진 것이다.
재미있다. 진짜 야구가 너무 재미있다.
“내가 공평한 기회를 만들어주지.”
“뭐?”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또다시 존에 애매하게 걸쳐 들어오는 공을 가볍게 밀어 쳐 파울라인 밖으로 날려버렸다.
슈웅
따악!
“파울!”
“자, 이제 풀카운트다. 다음 공 하나로 승부, 어때? 이 정도면 공평할까? 아니, 이래도 안 되겠으면 한 손은 놓고 오른손만으로 타격을 해줄까?”
“이런 빌어먹을 조센징 같은…….”
“흠, 인종차별 발언이라, 좋아. 이 쪽바리 새끼야. 한번 덤벼봐. 박살을 내줄 테니까.”
결국은 인종차별적인 욕설까지 오갔다.
미국인 심판이 그 욕을 못 알아들은 게 천만다행이다.
어쩌면 우리 둘 다 퇴장을 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것까지 모두 계산에 두고 한 행동이지만.
“입 닥치고 남자 새끼라면 한번 덤벼봐.”
“…….”
이를 악물고 덤벼들던 포수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사인을 받은 투수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야구를 오래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아무리 대단한 감독이, 엄청난 카리스마와 권력을 가진 감독이 선수단을 통제한다 해도 결국 그라운드 위에서 야구를 하는 건 선수라는 것 말이다.
평생을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며 야구를 해온, 그리고 그 대가로 빅리거라는 명예를 쟁취한 놈이다.
이런 순간 승부를 피할 놈이면 그 자리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립의 위치를 살짝 높인다. 지금 필요한 건 단 두 점. 억지로 장타를 노릴 필요는 없다.
스탠스는 평소보다 조금 좁게, 타격 포인트 역시 평소보다는 미세하게 앞으로.
빠르고 지저분한 공을 가진 놈이다. 변하기 전에 쳐낸다.
3루 주자 이태웅, 2루 주자 민주현, 그리고 1루 주자 장덕수.
모두 발 빠르고 베이스러닝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이다. 심지어 장덕수 선배조차 포수치고는 꽤나 빠른 발을 갖고 있다.
그 선수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본다.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정교한,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꺼내들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내 모든 것이 담긴 스윙.
“타핫!”
슈우웅
기합 소리와 함께 마에다의 손 끝에서 공이 떠났다.
그 소리와 함께 곧바로 스윙을 시작했다.
몸쪽 공을 쳐낼 수 있도록 팔꿈치를 몸통에 붙이고, 배트 가장 안쪽에서 임펙트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도를 조절하고, 병살타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팔로스로우는 길게, 공이 멀리 갈 수 있도록.
따아아아아아아악!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회귀 후 내가 해낸 스윙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완벽한 스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