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2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24화(125/412)
#124. 169km/h
어쩌면 운명의 장난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회귀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이곳에서 WBC 결승전이 열린다는 것이, 그리고 그 경기에 내가 선발로 등판하게 되었다는 것이 말이다.
좌측 펜스 99M, 좌중간 113M, 중앙 123M, 우중간 114M, 우측 펜스 99M.
우타자의 홈런을 2루타로 만들어버리는 높은 좌측 펜스, 그 최상단에 설치된 거대한 전광판.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하다.
툭툭
마운드에 올라 그 커다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내 생애 마지막 월드시리즈 경기, 내가 친 타구가 저 전광판을 강타했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시티필드에서 승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결국 이곳까지 승부를 끌고 왔던 기억, 그리고 결국 그 끝내기 홈런으로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기억.
환호하는 관중들,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동료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지금이라도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것이 그때로 돌아갈 것만 같다.
“수혁아, 야, 한수혁?”
“…아, 네, 선배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무슨 은퇴한 노인네가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말이야.”
“제가요?”
“왜? 긴장돼? 흐흐, 경재라도 부를까? 차라리 걔 좀 놀리면서 기분 좀 풀래?”
오늘 배터리를 이루게 된 정대한이 너스레를 떨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재미있는 사람이다. 다른 팀 선수들 중에서 내가 선배라고 부르고 싶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이제야 표정이 제대로 돌아왔네. 긴장하지 말고. 하긴, 네가 무슨 긴장을 하겠냐. 오히려 내가 공 안 놓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지. 자, 그럼 한번 해보자!”
할 말을 마친 정대한이 슬쩍 웃음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최대 4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프로그레시브 필드 관중석이 빈 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꽉 들어찼다.
이틀 전 경기에서 갑자기 쓰러져 나를 걱정하게 만들었던 민예린이 저 멀리서 엄청나게 큰 태극기를 흔들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우리 구단, 그리고 내 개인자금을 관리해주는 그녀의 아버지가 함께 서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참 동안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하필이면 이곳이 내 전 홈 구장이어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이상하게 민예린에게서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치, 마치, 언젠가 이곳에서 보았던 것 같은, 너무나 생생하고 익숙한 그런 느낌이 든다.
모르겠다.
너무 오랜만에 이 구장에 서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겠지.
탁탁
마운드 위에서 가볍게 발을 털어 보았다.
팀을 옮기자마자 터져버린 어깨, 내 투수 인생을 접게 되었던 그때의 기억이 밀려든다.
엄청난 감정의 폭풍이 밀려왔다 곧 사라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플레이!”
그 순간 심판의 입에서 경기 시작이 선언되었다.
* * *
“예린아, 으아, 이게 꿈이냐, 생시냐?”
바로 눈앞에서, 심지어 자신의 직장이 위치한 뉴욕에서 한국팀의 경기가 수차례 열렸지만 정작 민태현이 야구장을 찾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엄청나게 바쁜 시간들이었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대형 M&A를 전담하게 되면서 정말 숨 쉴 시간조차 부족한 그런 날들을 보내야 했다.
한수혁의 경기를 볼 수 없단 사실에 얼마나 크게 실망했던지, 매일 딸내미가 전해오는 경기장 소식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하지만 괜찮다.
지금 이렇게 한국팀의 덕아웃 바로 지붕 위에 위치한 관중석에 앉아 한수혁의 첫 선발 등판 경기를 보고 있지 않은가.
“아빠, 침 좀 닦아. 왜 그렇게 흥분해?”
“아, 맞다, 예린아. 너 한국 돌아가자마자 장 박사님한테 가는 거 잊지 마. 검사 예약 다 해놨으니까 날짜 맞춰서 가기만 하면 돼.”
“괜찮다니까.”
“알아, 너 어릴 때도 그렇게 흥분하면 몇 번 실신한 적 있잖아. 검사에서 별 것 없다고 하니 안심이긴 하다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니. 일단 병원은 가봐. 응?”
“하아… 그럼 월요일로 잡아줘. 야구 경기 없는 날로.”
“딸.”
“왜?”
“내가 설마하니 그걸 모를까? 당연히 월요일로 잡아 놨지.”
민태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별 일 없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몇 차례 실신을 경험한 민예린이다. 그때마다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해봤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다는 소견만 되풀이되었다.
아버지는 그저 딸이 조금은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며 몸과 마음을 쉬었으면 하는 것, 그것이 민태현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런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예린의 시선은 줄곧 마운드 위 한수혁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민태현이 흐뭇한 시선으로 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딸, 우리 딸, 왜 울어? 응? 왜? 갑자기 왜 우는데?”
“…모르겠어.”
“왜?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래, 우리 딸이 너무 감격했구나.”
“아니.”
“그럼?”
“모르겠어… 그냥, 그냥.”
한수혁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는,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감정이 폭발했다는 말을 민예린은 결국 하지 못했다.
왠지 이 순간을 이미 경험한 것 같다는,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그 이야기는 가슴 속에 그대로 담아 두기로 했다.
‘수혁 오빠…….’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민예린의 가슴 속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 * *
“제군들, 이쪽으로.”
미국 대표팀의 감독이자, 바로 3년 전까지 메이저리그 최고 인기팀 양키스의 지휘봉을 잡았던 로버트 윌슨이 선수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우리도 알고, 저들도 알고, 그리고 오늘 경기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안다. 너희가 바로 전 세계 최고의 야구팀이라는 것 말이야.”
“네, 보스!”
“좋아. 모두 알다시피 오늘 마운드에 올라온 저 루키는 일본과의 경기에서 3이닝을 던진 게 전부인 풋내기다. 물론 그 결과는 꽤나 대단했지. 하지만 그건 일본 팀에 104마일을 칠 수 있는 타자가 없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세계 최고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한가?”
“아닙니다, 보스!”
“좋아, 그럼 가자. 가서 우리가 챔피언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지난 대회에서 빼앗겼던 우승 트로피를 다시 찾아오는 거다. 가라!”
자부심이 철철 흘러 넘치는 말들이었다.
로버트 감독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최고의 리그, 그중에서도 또 최고의 선수들만이 모인 명실상부한 전 세계 최강의 야구팀이었다.
지난 2023년 3월에 열린 대회에서 일본에 8 대 3으로 패한 미국은 경기 일정을 8월로 변경하면서까지 우승에 대한 노골적인 욕심을 드러냈다.
미식축구와 농구, 아이스하키에까지 밀리며 계속 추락 중인 야구의 인기.
그것을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리그가 한창 진행되는 8월, 경기 감각이 극에 달한 빅리거들이 미국의 국기 아래 모여 들었다.
30명의 엔트리 중 절반 이상이 올스타급으로 구성된, 어쩌면 앞으로 다시 나오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라인업이 만들어졌다.
레드삭스의 리드오프이자 빅리그 최고의 호타준족으로 꼽히는 잭 로저스를 필두로 다저스의 3번 타자 애런 데커, 양키스의 4번 타자 루카스 앤더슨, 그리고 오늘 선발로 나선 시애틀의 에이스 라이언 티보우 등등.
그야말로 스타군단이라는 명칭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최강의 멤버들이다.
‘이번 게임에서 지면 정말 은퇴라도 해야겠군.’
양키스의 지휘봉을 놓은 후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던 로버트 윌슨은 사무국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이 어려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오늘 경기가 끝난 후 자신은 미국 야구 역사에 어떤 이름으로 남게 될까?
대기 타석에 들어서는 빅리그 최강의 선수들을 보며 로버트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가 됐든 절대 저 녀석들을 넘어설 수는 없을 거다. 절대.”
* * *
– 위원님, 드디어 미국팀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어떻게 하죠? 가슴이 너무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군요.
– 괜찮습니다. 아니, 어쩔 수 없습니다. 미국 대표팀의 라인업을 보세요. 얼마 전 열린 올스타전 라인업을 그대로 복사한 것 같은, 아니, 어떤 면에서 보면 그보다 더 강해 보이는 선수들 아니겠습니까? 이럴 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뿐입니다.
– 아, 대한민국 선수들의 불굴의 의지, 태국전사들의 열정, 그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아뇨, 한수혁 선수요.
– 네?
– 솔직히 말씀드리죠. 지금부터 타석에 들어서는 미국 선수들은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그런 선수들입니다. 지금 타석에 서 있는 잭 로저스를 보세요. 7월 말까지 타율 0.350에 출루율 0.469, 장타율 0.505, 홈런 25개, 도루 29개를 기록하고 있는 리그 최강의 톱타자입니다.
–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저런 성적으로 1번 타자라고요?
– 네, 그리고 그 뒤에 들어서는 선수들은 더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결국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 한수혁만 믿자?
– 당연하죠. 오늘로서 세계 야구계에 새로운 역사가 새겨질 것을 기대하며, 저는 한수혁 선수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부처님, 누가 됐든 제발 한수혁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 * *
탁탁
선두 타자로 들어선 잭 로저스, 회귀 전에도 몇 번 상대해본 적 있는 빅리그 최강의 리드오프가 배터박스의 흙을 고르며 포수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다.
저 모습을 보니 예전 녀석을 상대했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교하면서도 파워풀한 타격과 빠른 발, 거기에 완벽에 가까운 중견수 수비까지. 그야말로 공수주 밸런스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평을 받는 레드삭스의 선봉장.
생각해보면 저 녀석과 상대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던 것 같다. 힘만 믿고 윽박지르는 투구에 익숙하던 나는 어깨 부상으로 최고 구속이 96마일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선구안과 배트 컨트롤에서 리그 최상급이라 평가받던 잭 로저스를 상대로 고전할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혹은 빅리그에서 충분한 경험만 쌓을 수 있다면.
그러면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플레이!”
신은 그런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선물해 주었다.
그때 내가 그토록 원했던 두 가지, 싱싱한 어깨, 빅리그에서의 충분한 경험.
지금 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채 다시 그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타격 준비를 마친 잭 로저스가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특유의 타격 자세를 취했다.
극단적인 오픈스탠스, 약점인 바깥쪽 공을 강력한 손목 힘으로 커버하는 녀석의 시그니처 같은 타격 폼.
나는 예전 삶에서 잭 로저스에게 꼭 던지고 싶었던, 그때는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그리워해야만 했던 나의 공을 던지기로 했다.
끄덕
내가 먼저 보낸 사인에 정대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벤치의 지시였다. 어차피 투수 한수혁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한 만큼 오늘 경기의 볼 배합은 최대한 투수에게 맡긴다는 것.
내가 원하던 바다. 나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실험해볼 것이다.
쉬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그것을 신호로 삼아 천천히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제이콥이 도와주고 내가 완성시킨 완벽한 투구폼.
하체와 허리, 그리고 어깨, 마지막에는 손목까지.
3번에 걸쳐 에너지를 응축시켜 한 번에 폭발시키는, 그러면서도 세상 그 어떤 투구폼보다도 부드러운.
그 폼을 거쳐 마침내 하얀 야구공이 포수 미트를 향해 힘차게 비행을 시작했다.
슈우우우웅
퍼어어엉!
“스, 스트라이크!”
“우아아아아아!”
“미쳤다! 미쳤어!”
“한수혁! 미친! 미친!”
관중들의 함성, 그리고 타석에 선 잭 로저스의 멍한 표정을 확인한 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 내가 던진 공의 구속이 기록되어 있었다.
105마일, 169㎞/h.
나는 내 목표인 170㎞/h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