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2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27화(128/412)
#127. 거인
프로그레시브 필드 외곽 너머 석양이 지고 있다.
한국에서 보든, 미국에서 보든 어차피 같은 태양이고, 같은 일몰이다.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난 삶의 기억이 담긴 이곳 구장에서 보는 석양은 내게 특별한 감정을 부여했다.
“한수혁! 한수혁! 한수혁!”
“수혁아! 제발! 제발!”
“오빠! 수혁 오빠!”
수만 명의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 속에서 유독 민예린의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날아와 박힌다.
이리 저리 시선을 돌려 그녀의 모습을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정말 많다. 이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공을 던지는 게 얼마 만인가.
시선을 돌려 우리 팀 덕아웃을 바라보았다.
동료들이 마치 기도를 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그래 봐야 그냥 공 좀 잘 던지고 잘 치는, 그냥 야구선수일 뿐인데.
하지만 지금 이 경기장에 모인 한국팀의 관중들, 동료들, 그리고 중계를 보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예전 삶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다. 성훈이 형의 간곡한 부탁에 등 떠밀리듯 참가했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순간 결심했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한 한국팀에 패배는 없다.
“플레이!”
4번 타자 루카스 앤더슨, 잘 아는 놈이다.
내 기억 속 양키스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퇴물로 남아 있는 그가 30대의 싱싱한 육체를 가진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정교함과 파워, 선구안, 인내력, 그리고 주력까지.
타자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다 갖춘 그야말로 미국을 대표하는 타자.
상관없다.
지금의 나는 예전 어깨 부상으로 시름하던 그때의 그 투수가 아니다.
어쩌면 오버 페이스일 수도 있다. 1회부터 전력투구를 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WBC 파이널 라운드의 한계 투구 수는 고작 95개에 불과하다.
나는 그 95개의 공 모두에 전력을 담을 생각이다.
부상이 걱정되지 않냐고?
글쎄, 오늘 경기 전 나를 마지막으로 체크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트레이너 제이콥이 이렇게 말했다.
‘젠장, 이 몸뚱아리는 대체…….’
‘흐흐, 왜요. 흠은 잡고 싶은데 마땅치가 않나요?’
‘빌어먹을 애송이, 미친 짓만 하지 마. 손바닥으로 타구를 잡는다던지 그런 미친 짓만 안 하면 마운드 위에서 뭘 하든 네 마음이야.’
적어도 공 100개 정도로는 무너지지 않을 육체라는 걸 그가 증명했다.
애초에 그 정도 확신이 없었다면 나를 어디 묶어서라도 마운드에 못 올라가게 했을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그에게 정말 큰 은혜를 입었다.
물론 제이콥 한 사람만이 아니다.
언제나 내 기둥이 되어주는 성훈이 형, 든든한 중간관리자인 박재철 단장, 이제는 정말 형님들처럼 느껴지는 팀의 선배들, 마음이 울적할 때 샌드백이 되어주는 두 동기 놈들.
그리고 내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 귀신같이 나타나는 수상한 이웃.
그 사람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온몸의 힘을 끌어올린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공.
바로 그 공이 미국 대표팀의 4번 타자 루카스를 향해 날아갔다.
슈웅
퍼어엉!
“스트라이크!”
* * *
‘흐흐흐, 진짜 재미있군. 역시 세상은 넓어.’
지난 10년간 양키스라는 거대함선을 지탱해온 캡틴이자 미국 대표팀에서도 주장을 맡고 있는 루카스 앤더슨이 마음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104마일에 달하는 광속구가 무릎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며 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방금 그 공은 지금까지 자신이 선수 생활을 하며 보아온 공들 중 최소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런 위력적인 공이었다.
진짜 재미있는 건 그 공을 던진 투수가 겨우 1년 차 루키, 그것도 빅리그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KBO리그에서 뛰는 선수라는 거다.
저런 녀석이 뛰는 팀이라면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겠지?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상대해야 할 나머지 KBO 팀 타자들에게 명복을 빌어준 루카스가 배트 그립을 고쳐 잡았다.
포심, 투심, 컷패스트볼, 체인지업, 두 가지 속도의 커브까지.
그 와중에 던질 수 있는 구종도 아주 다양하다. 심지어 그 모든 공들이 하나같이 위력적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게스히팅 자체가 불가능한 투수다. 5가지가 넘는 구종 중 하나만을 노린다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알고 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공을 던지는 괴물, 자신의 공에 절대적 자신이 있는 루키라면 포심 위주의 피칭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최고 구속 105마일에 달하는 포심을 던지지 못해 안달이 났을 거다.
그렇기에 노린다.
한수혁이 던질 104, 아니, 105마일의 포심을.
배트를 아주 살짝 짧게 잡고, 히팅 포인트를 앞으로 옮기고,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됐다. 이 정도면 녀석의 말도 안 되는 광속구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낸 루카스를 향해 한수혁의 2구가 날아왔다.
슈웅
부웅
“스트라이크!”
“…….”
이번에는 자신이 틀렸다. 아까보다 더 느린 58마일짜리 슬로우 커브에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대단한 배짱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느린 공을 던질 수 있다니.
‘흐흐흐.’
점점 더 재미있어진다.
평생을 야구에 바친, 그 시간 동안 줄곧 세계 최고 소리를 듣고 살아온 루카스에게 한수혁과의 승부는 야구에 대한 재미를 다시 일깨워줬다.
이번에는 확실하다.
빠른 공, 그 다음 느린 공, 그렇다면 이번에는 바로 승부구가 날아올 거다.
지금 녀석의 눈빛을 보면 여기서 도망가는 피칭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을 던질 것이다.
‘좋아, 승부다, 꼬맹이.’
하지만 루카스는 알지 못했다.
그 꼬맹이의 속에 들어 있는 진짜 본질을.
15년을 빅리그에서 뒹군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그 안에 들어 있음을.
슈웅
“크아아앗!”
루카스의 예상처럼 빠른 공이 존 한복판을 향해 날아왔다.
루카스가 기합을 뱉으며 그 공을 향해 힘차게 스윙을 시작했다.
하지만.
부웅.
“스윙! 아웃!”
포심처럼 날아오던 공이 갑자기 존 밖으로 꺾여 나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삼진을 당한 라이언이 허망한 눈빛으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97마일이라는 숫자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방금 전 그 공은 포심이 아닌 97마일짜리 고속 슬라이더였다.
* * *
“이제야 생각났어. 저 녀석이 누구인지.”
“젠장, 그게 무슨 헛소리야.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아냐, 저 얼굴하며 체격… 분명 저놈이 펀치를 날리는 영상을 본 것 같은데?”
“또 취한 거야? 여긴 격투기장이 아니라 야구장이라고. 젠장,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계속 그 따위로 삼진만 먹을 거면 차라리 우리 집 개를 타석에 세우는 게 낫겠다!”
자국을 대표하는 네 명의 타자들이 모두 삼진으로 물러서자 미국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불만 섞인 욕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소 수백 달러에서 많게는 천 달러 이상의 티켓 가격을 지불하고 경기장에 들어온 그들이 바라는 건 미국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결승 상대로 한국팀이 올라온 게 조금 의외였지만 상대가 누구든 힘으로 완전히 눌러버리는 모습, 바로 그걸 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경기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1회초 한국 대표팀의 한수혁이라는 투수가 미국을 대표하는 1, 2, 3번 타자들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다.
조금 의외이기는 하지만 일단은 넘어갈 수 있었다. 이어진 1회말 수비에서 미국 최고의 투수 중 하나인 라이언 티보우 역시 한국 타자들을 삼자 범퇴로 막아냈으니까.
그리고 다시 돌아온 미국의 공격.
이제 슬슬 진짜 미국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타석에 선 것이 양키스의 캡틴이자 미국을 상징하는 선수인 루카스 앤더슨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미국 팬들의 상상에 불과했다.
바로 그때부터 미국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4번 루카스에 이어 5번 타자까지 삼진을 당해버렸다. 그나마 6번으로 나선 패트릭 메이슨이 한수혁의 컷패스트볼을 건드리지 못했다면 6연속 삼진을 당할 뻔했다.
2회초 미국의 공격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오늘 경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미국 선발 라이언 티보우가 혼신을 다해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2회말 한국의 4번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우는 순간 미국 응원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전까지 한국을 한 수 아래로 깔보던 미국 관중들이 비로소 상대를 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타석에 한수혁이 들어섰다.
한국팀의 선발투수이자 5번 타자.
2회까지 나란히 상대 타자들을 완벽하게 막아낸 두 투수 간의 투타 대결.
따악!
그리고 그 대결에서 한수혁이 승리했다.
루카스의 100마일 포심을 완벽하게 받아 친 한수혁이 1루로 진출했다.
투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것은 상처받은 맹수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다행히도 한국 대표팀의 공격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6번 강우찬이 친 타구가 병살이 되며 그대로 이닝 종료.
상대를 한 수, 아니, 두 수 아래로 내려다보던 라이언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어진 3회와 4회, 두 번의 공격에서 양팀은 역시 점수를 기록하지 못했다.
4회말 공격에서 한국의 리드오프 이찬호가 볼넷을 얻어 나가기는 했지만 이어진 세 타자가 모두 삼진과 범타로 물러나며 공격이 무산되었다.
대기 타석에 있던 5번 한수혁이 아쉽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 별 것 아닌 시선에 미국 최고 투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다.
“스윙! 아웃!”
“와! 또 삼진이야! 미친 거 아냐? 몇 개야, 대체?”
5회초 수비에서 한수혁은 또 미국 팀의 세 타자 중 둘을 삼진으로 돌려 세우며 간단하게 이닝을 끝냈다.
그때까지 미국 타자들 중 그 누구도 1루를 밟지 못했다. 그리고 한수혁이 기록한 삼진의 숫자는 무려 10개에 달했다.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야말로 상대를 공포에 몰아넣는 완벽한 투구.
올스타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살짝 느슨하고 시끌벅적했던 미국 덕아웃이 침묵에 잠겨 들었다.
관중석 곳곳에서 욕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성질 급한 관중들 몇이 당장이라도 그라운드로 뛰어들 것처럼 날뛰었다.
“라이언, 상대를 의식하지 마. 넌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
“젠장, 알아. 안다고.”
포수의 말에 라이언 티보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대답했다.
안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인정한다.
저 한국팀의 투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최고의 적이다.
한 수 아래의 팀이라고? 이번 결승전은 해보나 마나라고?
그런 이야기를 한 놈을 잡아다가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 그놈의 말처럼 한국팀의 전체적인 수준은 미국에 비해 한 수 아래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저놈은 어쩌고? 저런 괴물이 있는 건 고려하지 않은 건가?
애초에 저런 존재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아니, 알면서도 애써 깎아내리고 무시했던 전력분석팀의 얼간이들, 그리고 무조건적인 자국팀 띄우기에 나섰던 미국 언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미칠 듯이 차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이겨내며 라이언이 5회말 투구를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또 등장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패배감을 느끼게 한 투수가 이제는 배트를 잡고 타석에 들어섰다.
부웅
가벼운 스윙 한 번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진다.
자신과 거의 비슷한 녀석의 체구가 너무나도 거대해보인다.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거인을 마주한 기분.
‘홀리 쉣…….’
라이언의 머릿속이 온통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