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3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30화(131/412)
#130. 살아 있는 레전드
-Do your best and forget the rest.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잊어라.
미국 대표팀의 로버트 윌슨 감독이 가장 존경하는, 자신의 첫 번째 롤 모델로 꼽는 윌터 앨스턴(LA다저스 감독 1954~1976)이 남긴 말이다.
훌륭한 격언이다.
오랜 시간 미국 최고 명문구단을 지휘해온 로버트 윌슨은 야구 경기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구단들이 감히 따라올 엄두조차 못 내는 엄청난 자금력, 그리고 양키스라는 이름에 혹해 모여드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
그런 선수들을 데리고도 매번 경기에 이길 수는 없었다.
양키스가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오른 게 벌써 18년 전이다.
최근 10년 내 성적만 놓고 보면 2022년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한 게 최고 기록이다.
그렇기에 잘 알고 있다.
결코 야구란 인간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공은 둥글다는 것.
하지만.
‘Holy Shit……!’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올 시즌 전반기에만 14승 4패 평균자책점 1.71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투수 라이언 티보우와 KBO리그 1년 차 신인의 선발 맞대결.
심지어 그 신인은 이번이 첫 선발 등판이다. 사실상 데뷔전인 셈이다.
‘선발 데뷔전을 WBC 결승전에서 치른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미국 팀의 우세를 점쳤다.
애초에 저울질을 해볼 필요조차 없는 일방적인 매칭이었다.
어디 투수력뿐이랴, 미국 팀의 라인업을 채우고 있는 9명의 타자들은 모두 소속팀에 가면 중심타선에 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선수들이다.
그렇기에 믿었다. 오늘 자신의 커리어에 WBC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하나 추가될 거라는 걸.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 병신 같은 생각이었다.
한국 같은 좁은 나라에 저런 미친 괴물이 숨어 있었다니.
“감독님, 잭을 그대로 내보낼까요”
“음…….”
코치의 부름에 로버트 윌슨의 상념이 깨졌다.
9회초 미국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3루수 실책으로 주자가 1루에 나갔지만 다음 두 타자가 모두 삼진으로 물러나며 투 아웃 1루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노릇이다.
처음으로 프로 선발 데뷔전을 치르는 신인에게 9회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하고 있다니.
하지만 아직 좌절할 타이밍은 아니다.
어떻게든 이기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든.
그럼 약팀 한국에 질질 끌려 다녔다는 창피함도, 신인 투수에게 9회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했다는 불명예도 모두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
여전히 점수는 0 대 0.
만약 연장전으로 간다면 유리한 건 미국이다.
한수혁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 불펜에는 아직도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로버트 윌슨 감독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반드시 점수를 내야 한다고,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자신의 본능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설마 내가 다음 이닝을 두려워하는 건가? 저 녀석 때문에?’
로버트 감독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2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9회말 한국의 공격.
거기서 등장할 타자 한수혁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우리가 이런 지경까지 몰릴 줄이야.’
결국 로버트 윌슨 감독이 아껴 두었던 마지막 카드를 뽑아 들었다.
“타이를 준비시켜.”
“타이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감독님. 이봐, 타이, 대타다. 준비해.”
“알겠습니다, 코치.”
코치의 부름에 벤치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척 보아도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 떡 벌어진 역삼각형의 몸매, 거기에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다리.
지금까지 등장한 미국 타자들이 리그를 대표하는 올스타급 멤버들이라 한다면 지금 코치의 부름을 받고 출격 준비를 하는 저 선수는 그들 중에서도 최고라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넘버원 타자였다.
타이 존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주포인 동시에 2010년대와 202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얼굴.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세계 최강의 타자.
그가 타석에 들어설 준비를 마쳤다.
– 아, 타이 존슨 선수가 대타로 나오는군요.
– 어떤 선수인가요? 위원님, 설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타격왕, 타점왕, 홈런왕, 3대 타이틀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는 빅리거 중의 빅리거입니다.
– 엄청나군요. 그런데 오늘은 라인업에서 빠졌죠?
– 네, 발가락에 약간 불편함이 있어 선발에서는 빠졌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결국 출격하는군요. 하아… 산 넘어 산이라고 여기서 이 선수가 나오네요.
– 결국 미국 벤치에서도 연장전은 가지 않겠다, 뭐 이런 의도라고 봐야겠군요.
– 네, 이번 WBC에서는 결승전에서도 10회 승부치기가 적용되잖습니까? 그래서 저는 게임이 이대로 연장전으로 흘러가면 10회 승부치기에서 타이 존슨 선수가 등장할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만큼 확실한 카드이니까요.
– 그렇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9회초 투 아웃 1루 상황에 미국 팀의 타자가 교체됩니다. 잠시 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이곳은 미국 클리블랜드, 프로그레시브 필드입니다.
* * *
“수혁아, 괜찮겠니?”
“네, 괜찮습니다, 코치님.”
“음…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힘을 내줬으면 좋겠구나. 주현이 너도 그만 고개 들고.”
“죄송합니다.”
“너한테 죄송하다는 말 들으려고 나온 거 아니야. 일단 아웃카운트 하나만 더 잡자. 나머지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는 걸로 하고. 자, 여기서 혹시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덜덜 떨려서 교체가 필요한 사람 있으면 거수.”
투수 코치가 농담을 던졌지만 마운드 위에 모인 야수 중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런 선수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코치가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린 후 마운드를 내려갔다.
몸 안의 힘을 쥐어짜며 힘든 고비를 넘기고, 또 넘겼다.
조금만 삐끗해도 공을 담장 밖으로 날려보낼 수 있는 타자들이 아홉 명 연속으로 타석에 들어서는 압박감.
그것은 아무리 나라 해도 쉽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파이팅!”
“파이팅! 자, 힘내자!”
1루수 이수영의 선창에 내야에 있는 야수들이 모두 파이팅을 외쳤다.
잠깐 동안의 숨 고르기가 끝나고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타이 존슨, 메이저리그의 살아 있는 전설.
지난 삶에서도 나를 꽤나 곤란하게 만들었던, 마흔이 넘는 나이까지 메이저리그 최고 타자의 자리를 놓지 않았던 그가 지금 30대 중반으로 돌아와 내 앞에 다시 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 무시무시한 놈이 9회에 와서야 등장하다니.
1회와 비교하면 손가락의 악력, 어깨의 상태, 하체의 힘, 그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곳이 없다.
하지만 괜찮다.
이 녀석 하나만 더 해치우면 된다. 딱 한 타자다.
끄덕
정대한과 몇 번의 사인이 오갔고, 결국 던질 구종과 코스를 결정했다.
존 바깥 쪽으로 흘러 나가는 컷패스트볼.
포심의 구위가 떨어진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삼진보다는 범타를 유도해야 한다. 특히나 상대가 저 괴물이라면 더더욱.
슈웅
“볼.”
오늘 던진 공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위력적인 컷패스트볼이 바깥쪽 존을 걸치며 흘러 나갔다.
하지만 타이 존슨의 괴물 같은 선구안은 그 공을 골라 냈다.
차라리 이 녀석이 1회부터 나왔다면, 그래서 내게 한두 개의 삼진을 당했다면 지금처럼 침착하게 이 공을 지켜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겠지.
끄덕
이번에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역회전하는 투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정대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바로 투구에 들어갔다.
슈웅
따아악!
– 아아, 이거 제대로 맞았습니다! 큽니다! 큽니다! 아, 아, 아, 아!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좌측 폴대 바깥으로 휘어 나가는 파울, 정말 큰 타구가 나왔습니다.
– 하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투심의 각이 워낙 좋았던 덕분에 파울이 됐습니다. 타이 존슨, 정말 대단한 타자네요. 저 공을 저렇게 멀리 날려보내다니.
– 한수혁 선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좌측 펜스 쪽을 쳐다봅니다.
– 정말 고맙고, 또 미안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100개 가까운 공을 던진, 그것도 1년 차 신인을 마운드에 계속 올려야 한다는 것. 한국 야구계가 한수혁 선수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갚아야 할 겁니다!
– 이번만큼은 저도 위원님의 말에 공감합니다. 어린 선수가 버티기에는 너무 가혹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제발 한수혁 선수가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마지막 타자까지 막아낼 수 있기를 빌고, 또 빌겠습니다.
* * *
솔직히 말하면 약간은 실투였다.
조금 더 빼려던 공이 존에 살짝 걸치자 타이 존슨의 배트가 여지없이 돌았다.
물론 맞아봐야 90% 이상은 파울이 될, 그런 코스의 공이었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어마어마한 타구를 한 대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건 저 녀석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회심의 스윙이 파울로 끝난 게 조금 아쉬웠는지 타이 존슨의 표정에도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 있었다.
이번 WBC에 참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시 저 괴물과 대결할 날이 올까?
다음 국제대회? 글쎄, 내년 올림픽에는 당연히 나오지 않을 테고 잘해야 WBC인데 그때는 저 선수의 나이가 마흔에 가까워진다.
그때도 여전히 기량을 유지하고 있겠지만 여러모로 지금보다는 못할 것이다.
예전 삶에서 올스타전에서 만난 그와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투구의 기본과 타석에서의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랄까.
무심코 건넨 내 이야기에 그가 반응했고, 몇 마디 대화가 오간 게 전부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나는 타이 존슨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의 부러움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어깨 부상으로 잃어버린 구속, 자꾸만 반복되는 부상.
그런 것들로 인해 나는 한계를 느꼈고, 타이 존슨은 나이나 부상과 상관없이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켰으니까.
어쩌면 내 마음을 채웠던 건 아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부상을 당하기 전으로 돌아와 최고점에 있는 타이 존슨과 싸우고 싶다는 그런 아쉬움.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꿈을 이루는 중이다.
비록 상황은 내게 아주 불리하지만, 이미 나는 100개 가까운 공을 던졌고, 안타 한 방이면 노히트노런이 깨질 상황이며, 내 뒤에는 믿을 만한 투수가 하나도 없는 그런,
아주 불리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지만,
즐겁다.
그럼에도 나는 이 순간이 너무 즐겁다.
꽈악
잠깐 숨을 돌린 덕분일까.
급격하게 빠져나가던 손가락의 악력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서둘러야 한다. 어쩌면 일시적일지 모를 이 기운이 빠져나가기 전에 타이 존슨과 승부를 끝마쳐야 한다.
끄덕
이럴 때 다른 공은 필요 없다.
내가 그토록 던지고 싶었던, 타이 존슨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그 공이 필요하다.
구속을 잃고 자존심 하나로 버텼던 한수혁이 아닌,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공을 가진 자부심, 그 자부심으로 가득 찬 한수혁만이 던질 수 있는 그런 공.
내 손 끝에서 공이 발사되었다.
슈우우웅
퍼어어엉!
“스트라이크!”
“우아아아아!”
“167㎞/h, 167㎞/h야! 미친, 진짜 미친!”
몸 가장 안쪽으로 파고 드는 포심, 104마일에 달하는 그 공에 타이 존슨이 꿈쩍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한 것인가?
상관없다.
볼 카운트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이미 제한 투구 수는 넘어섰다. 이 승부가 끝나면 나는 무조건 마운드를 내려가야 한다.
더 이상 힘을 아낄 필요 없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짜내야 한다. 마지막 단 한 방울까지.
타이 존슨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차오른다.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승부의 순간이라는 것.
상대가 타이 존슨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슬로 커브 같은 걸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최강의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니, 오랜 시간 이런 진짜 승부를 기다려온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을 던질 것이다.
힘을 잃고 휘청거리던 하체가 다시 한 번 힘차게 발돋움을 시작한다.
100개 가까운 투구를 하며 삐걱거리기 시작하던 허리가 마지막 가동에 들어갔다.
그렇게 응축된 에너지를 모아 어깨로, 피로감에 젖어 들어가던 어깨에 마지막 승부를 부탁하는 마음으로,
“타핫!”
나도 모르게 기합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내 손끝에서 공이 떠나갔다.
먹잇감을 노리는 새처럼 맹렬히 비행하는 하얀 공.
그 공을 향해 타이 존슨이 힘차게 스윙을 시작했다.
슈우웅
부우웅!
퍼어어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으아아아아!”
“수혁아! 이 미친놈아!”
“하아아, 미치겠네. 진짜 미치겠네! 이 미친놈아!”
전광판에 105마일이라는 숫자가 찬란하게 새겨졌다.
169㎞/h.
관중석 분위기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나를 향해 야유를 퍼붓던 미국 관중석에서도 엄청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잠시 그 모습을 보다 타이 존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계 최고의 타자가 허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것은 최고의 승부를 선사해준 라이벌에 대한 답례의 인사였다.
그가 약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나를 향해 고개를 마주 숙였다.
어쩌면 이것이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과 나 사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결일지도 모른다.
나는 승부에 대한 것조차 잠시 잊은 채 타이 존슨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