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3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35화(136/412)
#135. 징글징글한 라이벌
“…예린아.”
“…예린아?”
“…예린아!”
“예린아! 야, 민예린!”
“헉!”
“야, 깜짝 놀랐잖아. 잠깐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뭐 그렇게 깊게 잠이 든 거야? 비명은 왜 지르고? 어, 근데 너 그거 눈에 눈물이야? 울었어?”
“눈물……?”
“그래, 어휴. 뭐냐, 무슨 낮잠을 그렇게 요란하게 자는 건데? 혹시 아직도 몸이 안 좋은 거 아냐?”
매니저의 말에 민예린이 깜짝 놀라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몸이 안 좋긴! 아냐, 이제 괜찮아. 그냥 악몽을 좀 꿨나 봐.”
“…무슨 악몽을 일 얘기하다 갑자기 소파에서 꿔. 아무튼 너 가서 얼굴 좀 닦고 와라. 눈물인지 땀인지 엉망이다.”
“그래, 알았어. 그럼 잠시만.”
자리에서 일어난 민예린이 화장실로 가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멍했던 정신이 그제야 좀 돌아온다.
매니저와 중요한 얘기를 나누다 깜빡 잠이 들었다.
잘해야 10분? 아니, 5분?
그 짧은 시간 꿈을 꾸었다.
트럭이 어린아이를 덮치는 끔찍한 광경,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그 아이를 끌어안고 대신 차에 치이는 장면.
그 앞에서 민예린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난생 처음 본 아이, 그리고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뒷모습.
거대한 트럭이 그 둘을 덮치는 걸 보며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고.
그러다가 잠에서 깼다.
모르겠다. 왜 그런 꿈을 꾼 건지, 그리고 왜 이렇게 심장이 쿵쿵 뛰는 건지.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자.’
간신히 마음을 정리한 민예린이 다시 거실로 나와 매니저에게 말했다.
“오빠, 오늘 확실히 준비는 다 끝난 거 맞지? 이거 두 번 기회는 없어. 한 번에 무조건 성공해야 돼.”
“야, 예린아. 이제 괜찮아? 얼굴이 하얀데? 너 진짜 어디 아파 보여.”
“아냐. 찬물에 세수해서 그래. 아무튼 야구장 가서 마지막으로 체크 한 번 더 해봐. 아, 스태프들 식사랑 간식도 다시 한 번 챙겨주고.”
“알아, 내가 초짜도 아니고 그런 거 확인 안 했겠냐. 아무튼 일단 구장으로 가긴 가는데…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아버님이 연락 달라고 하셨단 말이야.”
“괜찮다니까, 그리고 아빠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후… 그래, 알았다. 그나저나… 겨우 5분, 10분, 그 짧은 시간을 위해서 이 많은 돈을 태우는 거 진짜 맞는 거겠지?”
“내 돈이야. 뭔 상관.”
“하아, 그렇기는 한데… 일단 알았다. 나 먼저 가볼게. 혹시나 몸 이상한 것 같으면 나한테 바로 전화하고.”
민예린의 독촉에 매니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조금 여위어 보이는 민예린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멍했던 정신이 이제야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다.
미국에서 보낸 꿈만 같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첫 한일전에서 한수혁이 세이브를 기록하고, 1라운드를 돌파하고, 쿠바를 박살 내고, 두 번째 만난 일본 역시 개박살 내고.
그렇게 18년 만에 진출한 WBC 결승전에서 한수혁이 노히트노런을 해냈다.
어디 그뿐인가, 타석에서는 끝내기 만루홈런까지 쳐버렸다. 그야말로 한수혁의, 한수혁에 의한, 한수혁을 위한 경기였다.
이어진 우승 축하연은 꽤나 근사했다.
안 그래도 KBO에서 준비한 조촐한 우승 축하연과 귀국 비행기편에 대해 못마땅해하던 민예린은 자신이 한수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이었다.
축하연의 규모를 키우고, 미국 내 인연이 있는 아티스트들을 초청하고, 선수들이 타고 갈 이코노미석을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하고.
쉽지는 않았다. 아무리 민예린이라 해도 남의 나라에서, 그것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미국 최고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람이 끼어 들어 모든 것을 해결해 버렸다.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게 한수혁을 위한 거라 생각하며 애써 그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축하연 맨 마지막에는 무대에 직접 서 한수혁과 선수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And you’ll finally see the truth That a hero lies in you…….
그녀의 노래가 마지막을 향해 치닫던 그 순간 한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왜 가끔 그와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나는 건지.
모두가 기뻐하는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혼자 쓸쓸한 눈빛을 하고 있는 한수혁을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시간이 모두 끝났다.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즉시 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진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제, 마침내 모든 검사를 끝낸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다.
한수혁의 국내 무대 첫 선발 데뷔전.
놓칠 수 없다. 만약 오늘 경기까지 못 볼 것 같으면 환자복이라도 입고 병원에서 탈출했을 것이다.
‘오늘 반드시…….’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미국에서는 누구인지 모를 그 도련님에게 기회를 빼앗겼지만 이번에는 어림없다.
국제대회가 아닌, 프로 무대 정식 선발 데뷔전을 갖는 한수혁에게 최고의 선물을 해주고 말 것이다.
* * *
8월에서 9월로 넘어가는 마지막 주.
한국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여전히 무덥던 저녁 공기가 며칠 새 몰라보게 시원해졌다.
지난 부산과의 3연전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20여 일간 중단되었던 프로야구 리그에 대한 갈망, WBC에서 활약하고 돌아온 선수들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겹치며 3연전 내내 만원 관중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물론 부산 선수 중에는 대표팀에 소집되었던 선수가 하나도 없긴 하지만.
음,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승리 하나하나가 너무도 소중한 상황에서 부산에 2승 1패, 위닝 시리즈를 거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2개의 홈런을 추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왜 이렇게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걸까?
– 여러분! 다들 준비되셨죠? WBC의 영웅, 우리의 영원한 히어로, 한수혁 선수를 맞을 준비가 되신 거 맞죠?
“네에!”
– 좀 더 크게!
“네에에!”
– 좋아요. 오늘 이 순간을 위해 저희가 특별 퍼포먼스를 준비했으니 다들 기대해주시고요.
“오오오!”
– 자, 그럼 이제부터 한수혁 선수를 맞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좋아요.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국내무대 선발 데뷔전을 갖게 된 서울 워리어스 한수혁 선수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우아아아아!”
장내 아나운서의 신호에 맞춰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함성에 정신이 번쩍 돌아온 나는 지난 부산 원정 3연전이 왜 그렇게 허전하게 느껴졌는지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그건 언제나 안전망 앞에 딱 붙어 나를 바라보던 누군가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 이거 뭐지. 이러면 곤란한데.
– 자, 한수혁 선수, 그라운드 위로 올라와주세요!
“수혁아, 나가봐라. 크크크.”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선발 데뷔전 축하 퍼포먼스라…….
성훈이 형에게 들었다. 이건 구단이 아닌 민예린이 준비한 거라는 걸.
너무 미안해서 괜찮다고 사양해 봤지만 계속 거절하기에는 그 눈빛이 너무 간절했다나 뭐라나.
음, 미국에서도 이런 건 한 번도 못 해봤는데.
조금은 쑥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팟
잠실 야구장의 조명이 잠시 꺼지고, 관중석이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덕아웃에서 마운드로 향하는 길.
내가 그 길에 발을 딛자, 저 멀리 외야에 설치되어 있던 레이저 조명 하나가 나를 비추며 따라온다.
바로 그때였다.
부우우웅
어디선가 말벌떼가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수십, 아니, 수백 대가 넘는 소형 드론들이 잠실야구장 상공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뭐야? 이거 뭐지?”
“웬 드론? 드론으로 뭘 하려는 거지?”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의아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민예린이 무엇을 준비한 것인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거 WBC 우승 때 했던 그 드론쇼구나.”
“미쳤네, 미쳤어…….”
“워리어스가 제대로 돈 좀 썼네. 이런 건 얼마나 하려나.”
공중으로 날아오른 수백 대의 드론이 각자의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드론들로부터 뿜어져 나온 빛들이 조금씩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지만 아주 뚜렷하게.
Seoul Warriors No.1
Han Soo hyuk
BATTING : 99
DEFENCE : 99
SPEED : 99
PITCHING : 99
알 수 없는 영문과 숫자의 조합, 그리고 그 밑에 만들어진 내 얼굴 모양.
선수카드다.
민예린, 이 정신 나간 여자가 드론을 동원해 내 선수카드를 잠실야구장 상공에 구현해버린 것이다.
└ㅋㅋㅋㅋ
└야, 개쩐다. 이걸 한국에서 볼 줄이야
└돈 존나 많이 들었을 듯
└이거 사우디 애들이 유럽 축구선수들 데려갈 때 해주던 거 아님?
└저번에 WBC 우승 때도 하긴 했지. 거기 애들 불렀나 보네
└이거 진짜 돈 개많이 든다는데… 워리어스 이제 먹고살 만한가 보네
└그나저나 공격, 수비, 속도, 투구 전부 99 ㅋㅋㅋ
└당연하지. WBC에서 메쟈 애들 전부 다 개박살 냈는데
└겨우 99밖에 안 줬다고? 히든 특성은?
└존나 한수혁이 99면 다른 팀 애들은 몇 줘야 함?
└양심 고백해보자. 솔직히 자기 팀에 50 넘길 거 같은 선수 있으면 손?
└한수혁 빠들 신났네 아주;;;
* * *
“뭔가 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밀리는 기분인데?”
“난 좀 부럽네……. 나 선발 데뷔할 때는 SNS에 팬들이 몰려와서 욕으로 도배하고 그랬는데.”
“뭔 짓을 했길래?”
“1이닝 4실점이었지, 아마.”
“크크, 욕 먹을 만했네.”
“그나저나… 오늘 쟤 공 어떻게 치냐? 미국 애들도 못 치던 공을.”
“…….”
민예린이 준비한 드론쇼가 끝나고 1회초 매지션스의 공격이 준비 중이었다.
매지션스 선수들은 생각했다.
최근 몇 년간 잠실 라이벌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일방적으로 밟아주던 워리어스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거북한 상대가 된 거지 하고 말이다.
벌써부터 사상 최악의 트레이드 후보로 이름을 오르내리고 있는 최민석+김두영, 그리고 송기태+정기호 간의 트레이드.
쫓겨난 전 단장이 주도했던 황성민의 영입, 그리고 이어진 벤치클리어링에서의 망신.
이런 것들도 문제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한수혁.
시즌 전반기 내내 매지션스를 쥐 잡듯이 잡은 걸로도 모자라 하반기 첫 라이벌전에서 선발 데뷔전까지 치르겠다 나선 사상 최악의 적.
어쩌면 누군가 말한 것처럼 한수혁이 등판하는 경기를 버리고 가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전력을 아껴서 다른 경기에 투입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실 라이벌의 자존심, 그리고 하반기 3위 탈환을 노리는 매지션스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결국 매지션스는 오늘 총력전을 선택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선수들에게 전이되었다.
“자자, 얘들아. 잠깐만 주목.”
조금은 암울함이 감도는 덕아웃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최고참 김성수가 나섰다.
그는 지난 WBC 대표팀에 참가해 한수혁과 나름 친분을 쌓은 바 있었다.
“네, 선배님.”
“좋아. 길게 얘기 안 하마. 한수혁? 솔직히 존나 잘해. 진짜로 미친놈인 건 맞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인데 미국전에서 9이닝 완투한 후유증이 있을 거야. 야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 오늘 분명 투구 수 조절할 거다. 그러니까 일단 버틴다.”
“뭘 버티죠?”
“저놈이 마운드를 내려갈 때까지.”
“아…….”
“불펜 싸움으로 가면 무조건 우리가 유리해. 쟤들은 한수혁 뒤에 맡길 투수가 양기철밖에 없어. 공 하나라도 더 보면서 투구 수 늘리는 데 집중해 보자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좋아. 나도 기왕이면 저 녀석 약점 같은 걸 말해주고 싶은데 솔직히 못 찾겠더라.”
“…그 정도인가요?”
“그래, 메이저리그 박살 내고 온 SSS급 용병투수라 생각하고 상대해보자. 다들 파이팅!”
* * *
– 대단합니다. 정말 좋은 구경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위원님?
– 요즘 워리어스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완벽한 결합, 2027년 이 시점에 다른 종목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스포테인먼트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워리어스야말로 완벽한…….
– 위원님, 일단 오늘 홈팀 워리어스의 선발 라인업부터 살펴보죠.
– 좋죠. 오늘 한수혁 선수를 선발로 내세운 서울 워리어스의 라인업입니다.
1번 중견수 서형주
2번 좌익수 최민석
3번 1루수 조성오
4번 투수 한수혁
5번 우익수 월터 스미스
6번 3루수 안치욱
7번 포수 장덕수
8번 2루수 이창모
9번 유격수 유인철
– 한수혁 선수가 4번으로 나서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데뷔 후 처음이죠?
– 맞습니다. 조금이라도 타석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이대준 감독의 고심이 느껴지는 배치입니다.
– 유격수 자리에는 신인 유인철 선수가 들어섰습니다.
– 네, 창원에서 이적한 최진철 선수가 있긴 한데, 일단 이대준 감독의 선택은 유인철이네요.
– 이상하네요.
– 뭐가 말이죠?
– 한수혁 선수가 유격수에서 빠졌는데 별로 구멍이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시즌 초반 워리어스 타순을 생각하면 음…….
– 아하, 뭐 그렇게 말 아끼실 필요 없습니다. 워리어스 팬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니까요. 그때는 진짜 개허ㅈ… 허약했죠.
– 네, 그렇죠. 허약, 그것 참 적절하고 올바른 표현이군요. 아무튼 한수혁 선수가 수비에서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타선과 수비에 큰 구멍이 안 보이는 걸 보면 워리어스가 많이 강해진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 맞습니다. 이제 워리어스는 예전 한수혁 선수가 혼자 끌고 가던 그 팀이 아닙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 한수혁 선수의 첫 선발등판 무대가 될 서울 워리어스와 매지션스 간의 잠실 라이벌전을 중계해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잠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