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3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37화(138/412)
#137. 그라운드의 지배자
워리어스 단장 박재철은 생각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미국전 노히트노런으로 입증된 한수혁이라는 투수의 가치.
충분히 깨달았다.
이제 스무 살에 불과한 이 젊은 투수가 이미 빅리그의 에이스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룰 정도의 괴물이라는 것, 전성기 시절의 자신이 돌아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압도적인 투수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놀라 뒤로 나자빠질 지경인데 오늘 매지션스전에서 또 한 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완급 조절.
놀랍게도 이번이 국내 무대 첫 선발 등판인 이 루키가 2만5천 명에 달하는 만원 관중 앞에서, 그것도 서울 라이벌팀을 상대로 완급 조절을 하고 있다.
5회까지 던진 투구수가 고작 59개, 15타자를 상대해 삼진 10개, 땅볼 3개, 외야 플라이 2개.
박재철이 자신이 기입하고 있던 기록지로 시선을 돌렸다.
3개의 땅볼이 모두 2루로 향했다. 그리고 2개뿐인 외야플라이 중 하나는 중견수 서형주가, 또 하나는 좌익수 최민석이 처리했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한수혁이 빠지고 유인철이 들어가며 누가 봐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유격수와 3루 사이의 공간을 피해 땅볼 세 개가 전부 2루수 이창모에게로 향했다는 것.
그리고 세 명의 외야수 중 수비력이 가장 떨어지는 우익수 쪽으로는 단 하나의 타구가 가지 않았다는 것.
‘설마…….’
정말 설마하니 저 한수혁이라는 괴물은 타구의 방향까지도 조절할 수 있는 건가?
공격력만 놓고 보면 리그 탑을 다투는 매지션스 타자들을 상대로 힘을 빼고 던지고, 그걸로도 모자라 타구의 방향까지 마음대로 조절한다?
“허허…….”
박재철이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동안 한수혁이 매지션스의 7번과 8번 타자를 또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등장한 9번 타자가 초구를 쳐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나며 매지션스의 6회초 공격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6이닝 12K 무실점, 한수혁의 압도적인 투구가 매지션스를 박살 내고 있었다.
이러면 팀의 장기적인 계획에도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이번 시즌 종료 후 진행될 트레이드 계획 같은 것 말이다.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몇 번 툭툭 치던 박재철이 뭔가를 결심한 듯 누군가의 연락처를 눌렀다.
“어이구, 단장님. 네, 접니다. 박재철이에요. 에이,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 소리를. 그것보다 인천하고 얘기 오가던 거 마무리 안 되셨죠?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저번에도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원래 트레이드라는 게 일단 실무자들끼리 교감이 이루어져야… 음, 교감하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군요. 일단 한번 만나시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울 와 계시다고요? 잘됐네요,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네, 근사한 걸로 대접할게요. 그럼요.”
* * *
– …압도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네요. 정말 엄청납니다. 어메이징 그 자체입니다.
– 제가 어젯밤 개인방송에서도 한 번 말씀드린 바 있는데요.
– 뭘 말이죠, 위원님?
–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더라고요. 한수혁 공이 빠른 건 인정한다. 하지만 미국전 노히트노런은 수많은 우연이 겹친 산물이다. 그 팀 멤버가 아무리 대단했다 해도 우리는 이미 2006년 WBC에서 데릭 지터, 켄 그리피 주니어, 알렉스 로드리게스, 치퍼 존스가 있던 미국팀을 탈탈 턴 적이 있다. 국제대회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러더군요.
– 그런 미… 흠, 죄송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 네, 놀랍게도 있더군요. 모르겠습니다. 정말 한국인이 맞는지, 아니면 한국인인 척하는 다른 나라 사람인지. 어쨌든 그 사람들에게 지금 이 경기를 보여주고 싶군요.
– 동감합니다. 아무리 국적이 다르거나, 혹은 응원팀이 다르다고 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소속팀을 떠나 이 얼마 만에 가져보는 진짜 에이스입니까? 그것도 스무 살밖에 안 된, 앞으로 최소 10년 이상은 이 대한민국의 에이스가 되어줄 투수.
– 오, 아나운서님도 이제야 좀 야구에 눈을 뜨셨군요.
– 네, 뭐, 이런 말이 좀 우습기는 하겠지만 그동안 국내 리그 중계만 하다가 세계 무대에 나가보니 정신이 번쩍 뜨이더군요. 160을 우습게 던져지고 빗맞은 타구를 펜스 밖으로 넘겨버리는 괴물들이 즐비한 걸 보니 새삼 우리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달았습니다.
– 좋아요, 다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한수혁 선수를 핥… 음, 어쨌든 매지션스로서는 정말 골치 아플 겁니다. 기껏 로테이션까지 조절해서 2선발을 올리고, 5회에 마무리 투수를 세우는 초강수까지 두었는데… 한수혁 선수의 투구수가 고작 68개라는 것 말이죠.
– 말씀드리는 순간 워리어스의 2번 최민석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두 번의 타석에서 아직 안타가 없는 가운데 세 번째 타석을 맞게 됩니다.
– 평소 이하영의 한계 투구 수를 생각하면 이번 6회말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지션스는 한수혁 선수가 내려가기 전까지 어떻게든 버티려 할 거고, 워리어스는 반대로 한수혁 선수가 마운드에서 버텨주는 동안 점수를 내야 해요. 피 말리는 싸움입니다.
* * *
오늘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타자 중 매지션스, 특히 이하영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최민석이었다.
수년간 매지션스에서 뛰며 자연스럽게 눈에 익히게 된 이하영의 여러 가지 버릇들. 그리고 익숙한 공의 궤적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국내 최고의 마무리 중 하나로 꼽히는 이하영은 단순히 그런 정보를 안다고 해서 쉽게 공략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야생마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긴 머리카락, 언제부터인가 이하영이라는 투수를 상징하게 된 그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머리가 휘날리며 첫 번째 공이 날아왔다.
슈웅
퍼엉!
“스트라이크!”
가장 먼 바깥쪽 꽉 찬 곳으로 들어오는 위력적인 포심.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한 번 쩝 다신 최민석이 신중하게 투수를 노려보았다.
‘저 형도 꽤나 불타오르네.’
평소 이하영의 성격, 그러니까 에고가 강한 투수들 중에서도 특히 강한 그의 성격이 오늘따라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한수혁 때문일 것이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과 대표팀에서 같이 뛰고, 이어 리그에서 적으로 만났으니 이하영의 성격상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 없다.
“볼.”
“스트라이크!”
몸쪽으로 들어오다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이어 이번에는 중앙으로 들어오다 바깥쪽으로 휙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까지.
경험과 배짱이 돋보이는 그 볼 배합에 꼼짝도 못 하며 어느새 볼카운트가 원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되고 말았다.
최민석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기서는 하나쯤 빼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0 대 0, 6회말 선두타자인데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을까?
슈웅
“스트라이크! 아웃!”
“하아…….”
하지만 이하영은 생각보다 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들어오는 한복판 155㎞/h 강속구에 반응조차 못 한 최민석이 한숨을 푹 쉬며 타석에서 물러섰다.
“성오 형님, 오늘 하영이 형 장난 아니네요. 승부를 조금 빨리 가져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대기 타석에 있던 조성오가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스윙! 아웃!”
2번 최민석에 이어 3번 조성오 마저 삼진으로 돌려세운 이하영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낸다고 해서 무조건 친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WBC 대표팀에서 만난 다른 팀 선수들 중 나와 친해졌다고 표현할 수 있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원래도 안면이 있던 임준영, 정대한 정도가 그나마 편하게 말을 섞을 수 있는 상대였고, 이상하게 내게 관심을 보였던 류한결, 최경재, 김성수까지가 친해졌다 말할 수 있는 선수의 전부였다.
나머지 선수들과는 사실 별로 친해졌다 말하기 어렵다. 리그 경기 중 트러블이 있었던 대전의 김세준과는 오히려 더 어색해진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인천의 꼰대 3루수 민주현과는 사이가 좀 개선된 것 같다.
한국에 돌아오면 꼭 밥 한 끼 하자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9회 에러로 내 퍼펙트 게임을 날려버린 게 아직도 마음에 남은 것 같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이하영은 굳이 따지자면 WBC 대표팀 소집 전이나 후나 나와 별 관계 변화가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대표팀 내에서도 고참급에 해당되는 데다가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휴식 시간에도 방에서 혼자 기타 연습을 하는 사람과 친해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쨌든 그런 이하영이 눈에 불꽃을 피우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승부를 하고 싶은 걸까.
앞선 두 타석에서 연속 볼넷으로 출루를 하다 보니 솔직히 별 기대도 없다.
하지만 이하영의 눈빛은 절대 볼넷 따위를 준비하고 있는 투수의 것이 아니었다.
시들시들해져 가던 타석에서의 의욕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한다.
좋다. 어쩌면 오늘 이 경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기회다.
부웅
타석에 서서 배트를 한 번 휘둘러본다.
홈플레이트 뒤에 앉은 박수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다시 한 번 촉이 왔다.
승부다.
지금 이하영은 나와의 승부를 원하고 있다.
“타임!”
그 순간 매지션스 덕아웃에서 타임이 요청되었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코치와 이하영, 그리고 박수길, 세 명 사이에 뭔가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가 재개되었다.
[선수 교체, 매지션스 우익수 안철용 물러나고 정기호]그리고 매지션스의 우익수가 교체되었다.
정기호, 시범경기 도중 매지션스로 트레이드 되었던 워리어스의 골치덩어리.
그가 올 시즌 처음으로 1군 무대에 발을 디뎠다.
그 지랄 같은 성격과는 별도로 일단은 워리어스의 주전 중견수 출신이다.
정기호가 우익수로 들어갔다는 건 나와의 승부에 대비해 외야 수비를 강화한다는 뜻이다.
부웅
다시 한 번 배트를 돌려본다.
과연 무슨 공을 던질까? 포심? 슬라이더? 체인지업?
글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하영은 결코 피해 가는 공 같은 건 던지지 않을 거라는 거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공, KBO 역사에 이하영이라는 이름 석자를 남기게 해준 가장 위력적인 공.
스르륵
한참 동안 사인을 주고받던 이하영이 마침내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유지되고 있는 역동적인 오버핸드 투구폼.
그 파괴적이고 역동적인 투구폼에서 마침내 하얀 공 하나가 발사되었다.
그와 동시에 스윙을 시작했다.
지난 시즌 매지션스를 2위 자리까지 끌어올린 마무리 이하영의 주무기.
155㎞/h에 달하는 좌투수의 포심과 내 스윙이 한 점에서 만났다.
따아아아아악!
공이 맞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힘껏 배트를 뒤로 집어 던져버렸다.
빙글빙글 날아간 배트가 공중에서 몇 바퀴를 돌더니 땅에 박히듯 떨어졌다.
그 상태 그대로 타구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는 조금 낮은 타구각, 마치 로켓처럼 발사된 타구가 조명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타구가 그대로 잠실야구장 좌측 외야 최상단에 명중했다.
터어엉!
“우아아아!”
“수혁 오빠!”
“한수혁! 한수혁! 한수혁!”
홈 관중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반대편 원정팀 관중석에서 야유와 비명이 섞인 관중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발, 거기서 왜 승부를 해? 미쳤어?”
“감독 미친 거야? 어? 주석도! 야, 이 새끼야!”
“이하영… 넌 왜 거기서… 하아…….”
팬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홈런을 허용한 이하영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멈춰서 있었다.
그런 이하영을 보며 천천히 1루로 출발했다.
1루를 돌아 2루로, 3루로, 그리고 홈으로.
터억
홈플레이트를 밟는 순간, 0의 행렬이 계속되던 전광판 한 구석에 1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 순간 확신했다.
오늘은 이 한 점이면 충분하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