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4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40화(141/412)
#140. 탱킹장군
지난 WBC 브레이크 기간 동안 파이터즈에서 워리어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10년 차 우완투수 강동하는 생각했다.
‘이 팀 진짜 특이하네.’
그가 뛰던 서울 파이터즈는 그야말로 한국 야구계의 굴곡진 역사를 그대로 겪어온 사연 많은 팀이었다.
한때는 대한민국 재계 1위 대그룹을 모기업으로 둔 돈 많은 부자 구단이었으나 그 모기업의 경영자가 야구에는 아무 관심 없는 아들로 교체되며 결국 구단이 해체되었다.
거기서 끝날 것만 같던 구단의 역사는 어느 투자 전문가의 도전으로 인해 다시 불씨를 피웠고, 당시에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스폰서 네이밍이라는 형태로 구단이 재창단되었다.
모 기업이 없는 대신 구단 네이밍을 판매해 후원금을 받아 선수들의 연봉을 주고, 시즌을 운영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며 서울 파이터즈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팀들이 호텔에서 잘 때 모텔에서 밤을 지새고, 경기 후 회식을 김치찌개 집에서 하는 눈물겨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외국계 거대 기업이 그들의 운영권을 인수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선수들에 대한 대우도, 팀에 대한 지원도.
하지만 그런 호사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 기업이 다시 경영권을 내놓으며 파이터즈의 살림은 다시 예전의 그것으로 돌아갔고, 오늘날까지 KBO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으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음, 쟤들은 대체 뭘까?’
그런 굴곡의 역사 속에서 강동하는 지난 10년간 서울 파이터즈를 지탱해온 기둥 중 하나였다.
물론 그 기둥의 의미가 조금 다르기는 하다.
일반적으로 야구단의 기둥이라 하면 기량적으로 가장 뛰어난, 말 그대로 팀의 중심이 되는 선수들을 뜻하지만 파이터즈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사용되었다.
흔히 탱킹이라고 한다.
우승에 도전하는 건 힘들다고 판단되는 팀들이 일부러 몇 년간 하위권에 알박기를 하며 1순위 유망주들을 수집하는 것.
구단 수가 10개밖에 안 되고 야구단이 모기업의 홍보수단으로 활용되는 KBO에서는 조금 덜하긴 하지만 빅리그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어쨌든 그런 탱킹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탱킹장군이다.
탱킹장군.
뭔가 듣기에는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엄청난 강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속내를 알고 나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것이다.
탱킹장군은 쉽게 말하면 팀이 오랜 시간 하위권에 알 박기 위해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선수를 뜻한다.
대표적인 것이 이닝을 많이 먹어줄 수 있는 선발투수다.
실점이나 기타 투수의 멘탈을 흔들 수 있는 그런 상황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매 선발 등판 때마다 최소 5이닝, 6이닝 이상을 소화해줄 수 있는 투수.
몸이 튼튼해서 부상도 잘 안 당하고, 여차하면 롱 릴리프로 등판도 가능한, 체력 회복이 빠른 선수.
평균자책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5점대? 혹은 6점대? 상관없다.
무조건 선발 로테이션을 꼬박꼬박 지키며 이닝을 먹어 주기만 하면 된다.
가을야구 도전을 포기했다 해도 어쨌든 시즌 144경기는 치러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고 멍한 표정으로 다른 선수들을 바라보는 강동하가 바로 그 탱킹장군의 대표적인 선수 중 하나였다.
서울 파이터즈에서 선발과 롱 릴리프를 오가며 10년 가까이 매 시즌 130이닝 내외를 소화해준 그야말로 탱킹장군의 정석 같은 투수.
‘음… 왜 날 데려온 거지.’
오늘은 그런 강동하가 워리어스 이적 후 첫 데뷔전을 갖는 날이다.
어제 한수혁의 퍼펙트게임으로 라이벌 매지션스를 완전히 압살해버린 워리어스는 2차전 선발로 강동하를 내세웠다.
올 시즌 서울 파이터즈에서 105이닝을 던지며 방어율 5.85, 2승 10패를 기록한 우완투수.
이만식과 천상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박재철은 파이터즈가 원하는 2군 투수와 현금 3억 원을 주고 강동하를 데려왔다.
정작 본인은 왜 워리어스가 자신을 선택했는지 조금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너 솔직히 말해봐.”
“뭘?”
“어제 경기하다 지렸지? 3루 쪽에서 지린내가 나는 것 같던데.”
“뭐, 뭐, 뭔 소리야? 지리긴 누가 지려?”
“성오 형님, 어제 치욱이 저놈 지린 거 맞죠? 저만 느낀 거 아니죠?”
“흠… 확실히 냄새가 좀 나긴 하던데…….”
“아니, 왜 성오 형님까지!”
어제 경기에서 KBO 역사상 첫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빅리그 구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접근 중인 1년 차 신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동기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이 팀의 주장까지 합세하며 농담의 크기를 늘려 나간다.
뭐지?
어제 경기는 자신도 봤다. 퍼펙트 게임의 대단함을 떠나 저 한수혁이라는 신인은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세상에, 퍼펙트 게임을 앞둔 투수가 스스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야수들을 독려하다니.
어떤 상황에도 제 몫을 다 해내는, 그래서 별 볼일 없는 구위에도 불구하고 프로에서 10년째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강동하가 보기에 한수혁은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이거 어뗘? 오늘 수혁이가 준 건디?”
“어… 덕수 형님, 그거 밴드 조절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터질 거 같은데……?”
시계밴드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라 보기 힘든 두꺼운 손목을 가진 장덕수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동하 선배님, 컨디션 괜찮으세유?”
“어, 어, 그래, 덕수야. 나야 항상 좋지. 이걸로 먹고 사는데.”
“다행이구먼유.”
파이터즈 시절, 그가 본 장덕수는 그야말로 흉신악살 그 자체였다.
따귀 한 방으로 황성민을 박살 냈던 CCTV 영상, 그리고 거구의 용병투수를 마운드에 그대로 심어 버렸던 사건.
결정적으로 지난 WBC에서 비슷한 덩치의 쿠바 투수를 말 그대로 개박살 내던 모습은 야구선수라기보다는 차라리 격투기 선수에 가까웠다.
자신은 타석에 들어서 본 적이 없기에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파이터즈 타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저 장덕수 때문에 워리어스 투수들의 빈볼을 억지로 참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음… 가만, 그럼 이제 나도 그 효과를?’
생각해보니 그런 장덕수의 수혜를 이제 자신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구속, 구위, 구종, 제구력, 모든 것이 평범한 강동하지만 그나마 유일한 장점을 꼽으라면 몸쪽 깊숙한 승부를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파이터즈에서 뛰던 당시에는 그 공을 거의 봉인해야 했다.
어차피 팀에서 자신에게 바라는 건 긴 이닝을 던져주는 거였다. 괜히 몸쪽 공을 던지다가 시비가 붙거나 퇴장당하는 건 그의 연봉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사안이었다.
거기에 포수가 아주 시원치 않았다.
기량이 좋은 포수는 비싸다. 설사 파이터즈에서 그런 포수를 키워낸다 해도 거의 대부분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른 팀으로 팔려 나가곤 했다.
강동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던지고 싶은 대로 공을 던져본 적이 없다.
“자, 오늘 라인업이다. 다들 확인하고, 오늘 동하가 첫 선발 등판이니까 많이 도와주도록 하자. 이상.”
“네, 감독님.”
이미 대충 알고는 있지만 다시 한번 오늘 경기 라인업을 확인했다.
1번 중견수 서형주
2번 좌익수 최민석
3번 1루수 조성오
4번 우익수 월터 스미스
5번 3루수 안치욱
6번 지명타자 한수혁
7번 포수 장덕수
8번 2루수 이창모
9번 유격수 유인철
선발투수 강동하
어제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9이닝을 던진 한수혁이 6번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다.
KBO, 아니, 어쩌면 전 세계에서도 최상급 클래스일지 모를 한수혁의 유격수 수비 지원을 못 받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나머지 선수들의 이름에서 저도 모르게 위안을 받았다.
파이터즈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수 양면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든든함.
그 든든함을 느끼며 강동하의 워리어스 첫 선발 데뷔전이 시작되었다.
* * *
‘이럴 때는 어떻게 던져야 하는 거지?’
폭풍 같던 1회초 워리어스의 공격이 이제야 끝났다.
타자 일순.
어제 하루 침묵했던 워리어스의 강타선이 오늘 다시 폭발했다.
리드오프 서형주의 안타로 시작된 1회초 공격은 한수혁의 만루홈런을 포함 무려 7점이 터진 후에야 간신히 끝을 맺었다.
파이터즈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그때는 이런 득점 지원은 받아본 적도 없을뿐더러, 이기기 위해 던진 게 아니라 그저 이닝을 먹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일곱 점을 등에 업은 선발 투수는 과연 어떻게 던져야 하는 걸까?
정신이 반쯤 나간 강동하를 위해 장덕수가 적극적인 투수리드에 나섰다.
끄덕
초구 몸쪽 깊은 포심.
한수혁 같은 선수들하고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 전력을 다해 던지면 145㎞/h까지는 가능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강동하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슈웅
퍼억!
“아아악!”
아뿔싸, 그런데 그 공이 매지션스 1번 양선우의 팔꿈치에 맞고 말았다.
하필이면 보호대와 맨살의 경계지점에 맞은 양선우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1회 대량실점 후 초구 몸에 맞는 볼.
강동하는 직감했다. 오랜 프로 경험으로 볼 때 바로 지금이 벤클이 터질 타이밍이라고.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이면서도 주변을 빠르게 스캔했다. 혹시나 매지션스 선수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타석에서는 양선우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지만 매지션스 선수 중 누구도 흥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 대신 깊은 패배감이 자리 잡아 있었다.
두려움을 떨쳐낸 강동하가 자신의 배터리를 보았다. 그제야 매지션스 선수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마스크를 벗은 장덕수가 콧김을 뿜으며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왕을 호위하는 장수처럼, 유비 옆을 지키는 관우처럼.
만에 하나 매지션스 선수가 자신을 공격하면 바로 마운드에 고구마를 심어버리겠다는 의지를 팍팍 풍기며.
시선을 돌려 워리어스 덕아웃을 보았다.
공격을 마치고 벤치에 앉아 있던 동료 선수들, 그중에서도 1회 만루홈런을 때려낸 한수혁이 당장이라도 그라운드로 뛰어들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아아아!”
갑자기 관중석에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워리어스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다 알려진 광팬 하나가 안전망 꼭대기에 앉아 사자후를 터뜨리고 있었다.
“실투야! 우리 오빠들 건드리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민예린! 민예린! 민예린!”
모르겠다.
자신의 실력은 여전히 별 볼일 없다.
기껏 마음먹고 던진 초구가 포수 미트가 아닌 타자 팔꿈치에 박히고 나니 새삼 그 아픈 진실이 마음 속을 헤집는다.
하지만 강동하의 마음 속에는 파이터즈 시절과는 조금 다른, 승리에 대한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꾸역꾸역 이닝을 먹는 것뿐이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역할을 해내면 나머지는 저 대단한 동료들이 알아서 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희망 말이다.
“괜찮으세유? 신경 쓰지 마유. 편하게 던지시면 돼유.”
“그래, 고맙다, 덕수야.”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배터리를 향해 강동하가 활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