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4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47화(148/412)
#147. 괴물 위에 괴물
무너져가는 꼴찌팀을 홀로 지탱하는 소년 가장으로, 그리고 팀을 옮겨 명문 구단의 에이스로.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내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군림해온 임준영.
그 임준영이라는 투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뭘까?
최고 구속 156㎞/h에 달하는 포심과 커터, 타자를 현혹시키는 커브와 체인지업을 던지는 우완 정통파 투수? 타고난 유연성과 체력을 바탕으로 아직도 성장 중인 인천의 에이스?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임준영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투수 임준영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벌써 햇수로 12년이네.’
프로에 데뷔한 후 12년째 단 한 시즌도 빠지지 않고 풀 시즌을 치러냈다. 아니, 아직 올 시즌이 끝나지 않았으니 치르는 중이다.
다른 투수들 같으면 분명히 내구성에 대한 우려가 나올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임준영은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몸이었다.
타고난 유연성과 강한 어깨 근육, 그리고 철저한 자기 관리.
그것을 바탕으로 임준영은 지난 시간 KBO를 지배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 긴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자신의 기량이나 육체 같은 게 아니었다.
자존심, 그리고 자부심.
자신이 속한 팀을 최고로 만들고 말겠다는 강한 프라이드.
어쩌면 그것이 임준영이라는 야구선수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프로로 만들어준 워리어스에서도 그랬고, FA로 이적한 인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최고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내였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속한 팀을 최고로 만들지 않으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엄청난 승부욕의 화신이었다.
그런 임준영에게 류한결이라는 최고의 라이벌이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1인자.
임준영이 올 시즌 후 미국 무대 진출을 고민하는 건 돈이나 명예보다 그런 류한결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더 크게 작용했던 건지도 모른다.
국내에서는 단 한 번도 그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미국에서라도 꼭 넘어서고 싶다는 그런 간절한 마음.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음, 용재야.”
클리닝 타임으로 인해 잠시 중단된 경기.
벤치에 앉아 있던 임준영에게 후배 김용재가 다가왔다.
함께 WBC 대표팀에 참가했던 인천 레인저스의 차세대 에이스.
비록 일본전에서 쓴맛을 보기는 했지만 그 쓰디쓴 경험마저도 이 젊은 투수에게는 좋은 약이 되어줄 것이다.
물론 지금 상대편 덕아웃에는 그런 쓴 경험조차 필요 없는 괴물이 앉아 있지만.
한수혁의 얼굴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혀 온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공을 던져본 게 얼마 만인가? 공 하나하나에 혼을 담는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하지만 모자라다. 한수혁을 잡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모자라다.
둘 다 나란히 5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고 있지만 자신이 77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한수혁은 고작 58개의 공으로 인천 타자들을 꽁꽁 묶어 놓았다.
“용재야.”
“네, 선배님.”
“지난번에 내가 말한 적 있지? 한수혁하고 앞으로 계속 상대해야 할 테니 정신 차리라고.”
“…네.”
“그때는 저놈을 그냥 타자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투수까지 감안해야 하네. 하하, 진짜 뭐 저런 놈이……. 아무튼 용재야. 앞으로 네가 선수로 뛸 동안 한수혁이 계속 네 앞을 막아설 거다. 때로는 그게 장애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거야.”
“…저는.”
“하지만 그러지 마라. 장애물이라 생각하지 말고, 네가 가야 할 길을 표시해주는 이정표라고 생각해야 돼. 그러면 너도 언젠가는 저 녀석에게 닿을 수 있을 거다.”
비록 그럴 확률은 높지 않겠지만… 그 마지막 말을 삼킨 채 임준영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금 그 말은 어쩌면 김용재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류한결을 뛰어넘고 싶었던 임준영, 자신에 대한 이야기.
올 시즌이 끝난 후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류한결이라는 라이벌을 넘어서기 위해, 보다 큰 무대에서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미국행을 선택할 수도 있다.
혹은 지난 4년간 자신을 에이스로 대접해준 인천에 계속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워리어스에서 자신에게 합리적인 제안을 준다면 친정팀 복귀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자신이 평생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류한결보다 훨씬 강하고 파괴적인, 어쩌면 자신이 평생 따라잡을 수 없을지도 모를 저 괴물과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
지금 임준영의 머릿속은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 아… 임준영 선수 유니폼을 입은 여성 팬이 눈물을 흘리는군요. 카메라에 잡힌 모습이 보기 안쓰럽습니다
– 네, 사실 진작에 바꿔줬어야 했는데 구용식 감독도 지금 마음이 복잡할 겁니다. 방금 전 월터 스미스 선수를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투구 수가 119개째를 기록했습니다. 많이 던졌어요. 임준영 선수의 일그러진 표정이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 하지만 문제가…….
– 맞습니다. 오늘 선발로 나선 한수혁 선수와 임준영 선수가 7회까지 나란히, 음… 죄송합니다. 이게 설명을 안 드릴 수가 없군요. 네, 두 선수가 모두 퍼펙트 게임을 기록 중입니다. 그런 상황이니 벤치에서도 함부로 임준영 선수를 내릴 수가 없죠.
– 많이 지쳐 보이네요. 고동식 위원님, 저는 임준영 선수가 저렇게 지친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1회부터 거의 전력투구를 하다시피 했거든요. 임준영 선수도 알았던 겁니다. 한수혁이라는 괴물과 상대해 이기려면 자신의 모든 걸 쥐어짜내야 한다는 걸. 그렇게 119개의 공을 던지며 버틴 임준영 선수,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합니다.
– 말씀드리는 순간, 인천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서 내려갑니다. 아, 역시 바꾸지 못하는군요. 임준영 선수가 그대로 마운드를 지킵니다.
– 네, 어쩔 수 없어요. 차라리 퍼펙트가 아니었다면 그냥 내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건 선수에게 너무 큰 영광이거든요. 어쩌면 한수혁 선수에 이어 국내 2호 퍼펙트 피처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니까요.
– 하지만 다음 상대가 너무 안 좋습니다. 원 아웃 주자 없는 가운데 한수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한수혁 선수조차 단 한 번도 1루를 밟지 못했습니다. 앞선 두 타석에서 좌익수 플라이와 삼진으로 물러났었습니다.
– 오늘 한수혁 선수가 아직 안타가 없습니다. 두 타석에서 안타가 없었다는 건 이제 나올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죠. 임준영 선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상대를 만난 셈입니다.
– 아, 그 와중에도 임준영 선수가 야수들을 돌아보며 진정을 시키는군요. 역시 멋진 선수입니다.
└아 이거 느낌이 너무 쎄하다
└한수혁 저놈 표정 봐라 존나 심각하네
└쟤가 저렇게 투수한테 눌리는 거 처음 본 거 같다. 우리 에이스 진짜 개쩌네 ㅠㅠ
└그런데 너무 많이 던졌음… 투구 수도 문제지만 1회부터 155를 뿌려 댔으니
└그렇다고 바꾸는 건 에바지. 퍼펙트 게임이 나올 수도 있는데
└하아… 이거 기분이 진짜 묘하네 저렇게 버티다가 괜히 부상당하는 거 아냐?
└제일 좋은 건 한수혁이 초구 건드려서 아웃되는 건데…
└저 괴물 같은 놈이?
* * *
“헉헉.”
저 멀리 마운드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임준영의 거친 숨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것 같다.
고개를 돌려 홈플레이트 뒤 포수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임준영과 햇수로 4년째 배터리를 이루고 있는 포수의 표정 역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전력을 다해 119개의 공을 던졌다.
임준영이 아무리 강철 같은 어깨를 가졌다 해도 이제는 바꿔줘야 한다.
퍼펙트 게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리고 2위팀을 상대로 한 1승이 귀중하다 해도 에이스의 어깨보다 소중할 수는 없다.
지금 임준영이 마운드를 지키는 건 과연 그의 의지일까, 아니면 벤치? 혹은 구단주?
모르겠다.
상대 팀 내부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워리어스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저 위대한 투수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때린다.
여기서 그를 강판시킬 것이다.
그에게 휴식을 선물할 것이다.
드드득
오늘 임준영의 공은 대단했다.
어떤 각오로, 어떤 마음을 먹고 던진 것인지는 몰라도 지난 WBC에서 상대했던 각 팀의 에이스들과 비교될 정도로 대단한 공이었다.
최선을 다해 그를 강판시킨다.
그리고 임준영 역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기서 나를 넘어서지 못하면 뒤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포수를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인 그가 천천히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오늘날 임준영이라는 투수를 있게 해준 깨끗하고 강력한 폼에서 초구가 발사되었다.
[가끔 공의 회전을 읽어내는 타자들이 있다. 릴리스 포인트로 구종을 읽어내는 타자도 있고, 커브가 발사되는 순간의 떠오름을 포착하는 괴물들도 있다. 하지만 투수가 구속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타자도 그걸 눈으로 구분해내지 못한다. 딱 한 명, 좆 같은 토니 그윈만 빼고.]현대 야구사에 최후의 350승 투수로 기록되어 있는 그렉 매덕스가 사상 최강의 타격머신이라 불렸던 토니 그윈을 극찬하며 남긴 말이다.
야구공이 역회전을 하느냐, 정회전을 하느냐, 혹은 투수의 릴리스 포인트가 어디냐에 따라 구종을 예측할 수 있는 타자를 우리는 천재라 부른다.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이 대략 0.4초다.
그 짧은 순간에 투수가 던진 구종을 파악한다? 그게 말이 되냐 싶겠지만 세상에는 그런 괴물도 존재하는 법이다.
과거, 그리고 현재 빅리그를 지배하고 있는 타자들은 그런 천재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간 놈들이다.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니다.
그렉 매덕스 같은 위대한 투수들은 그런 괴물타자들의 배트를 빗나가기 만들기 위해 구속에 변화를 두는 방식을 택했다.
빠른 포심, 느린 포심, 더 느린 포심.
빠른 커브, 느린 커브, 더 느린 커브.
똑같은 릴리스 포인트에서 구속이 전혀 다른, 하지만 구종은 같은 공들이 번갈아 날아온다?
구종을 예측할 수 없다면 그저 눈을 감고 배트를 휘두를 수밖에 없는 타자들에게는 그보다 끔찍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0.4초의 짧은 시간 안에 구종을 파악하고, 거기에 순간의 번뜩임으로 구속의 변화까지 체크해낼 수 있는 타자가 존재한다.
과거에는 토니 그윈이 그랬고, 지금 여기에는…….
슈융
임준영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똑똑히 보았다.
다른 공들과 달리 손끝을 떠나며 살짝 떠올랐다 가라앉는 공.
커브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오늘 하루 종일 120㎞/h의 느린 커브만을 던지던 임준영이 내게 처음으로 빠른 커브를 던졌다는 것을.
평소 커브 속도만을 생각했다면 헛스윙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하지만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배팅볼이 될 수밖에 없는 138㎞/h 내외의 커브볼.
그 공을 향해 내 배트가 힘차게 발사되었다.
따아아아아악!
– 아앗! 제대로 맞았습니다! 타구가 새까맣게 치솟아 올랐습니다! 계속 날아가는 공,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아, 좌익수가 수비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섭니다. 넘어갔습니다! 장외홈런! 한수혁 선수가 또 장외홈런을 쳐냅니다! 7회까지 이어지던 임준영 선수의 퍼펙트 행진이 이렇게 끝나고 맙니다!
– 안타깝네요. 마운드 위에 무너진 임준영 선수를 보는 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야구는 결국 승자와 패자가 갈릴 수밖에 없는 스포츠인걸요.
– 정말 보는 사람이 더 흥분되는, 그래서 더 보기 안타까운 두 투수 간의 승부였습니다.
– 정말 잘 싸웠습니다. 한수혁 선수를 상대로 이정도로 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임준영 선수는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했습니다. 지금까지 대단한 투구를 보여준 두 투수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