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4화(15/412)
#14. 우산효과
팀에서 중심 타자에게 큰 돈을 투자하며 기대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산효과다.
만약 3번 타순에 팀 내 최고 타자가 자리 잡을 경우 투수는 그 앞에 주자가 쌓이는 걸 피하기 위해 1, 2번 타자와 정면 승부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3번 타자에게 큰 거 한 방을 얻어 맞고 멘탈이 털린 투수가 이어지는 4번, 5번 타자에게 연이어 일격을 허용하는 것 역시 우산효과의 범주에 든다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렇게 앞뒤 타자에게 우산을 씌워주기 위해서는 한 방에 상대 투수를 침몰시킬 수 있는 장타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돈과 명예를 움켜쥘 수 있다.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뛸 때 무조건 홈런을 노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지금 안치욱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셈이다.
따악
오, 옆에 붙어서 계속 쥐 잡듯이 잡은 보람이 슬슬 나오는데?
안치욱이 본래 자신의 깔끔한 스윙으로 공을 받아쳤다.
하지만 너무 잘 맞은 탓인지 2루수 정면으로 가며 라인드라이브 아웃.
잔뜩 기죽은 표정의 안치욱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잘했어. 그 정도면 뭐··· 계속 그렇게만 해.”
“···진짜?”
흠. 눈빛이 어디 시골에서 주인에게 버림받은 커다란 강아지 같기도 하고···
* * *
한수혁에게 한 방을 맞았지만 다음 타자 안치욱을 간신히 잡아낸 이만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잘했어, 에이스.”
“한 방 맞은 건 잊어버려. 연습경기일뿐이야.”
“다음 타석에서 갚아주라고.”
온통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코치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영어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낀 통역이 얼굴이 벌개져서는 코치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그들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솔직히 코치가 한꺼번에 바뀐데다가 몽땅 다 외국인인지라 누가 누구인지 헛갈릴 정도다.
물론 투수코치의 얼굴 정도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만.
현역 시절 메이저리그에서도 한 시즌을 뛴 경력이 있다는 투수코치 잭슨 설리반이 이만식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헤이, 에이스, 어때? 루키를 상대해본 소감이?”
“괴물이네요.”
“그렇지?”
이제 갓 입단한 신인에게 홈런을 맞고 빠던까지 당했다.
하지만 이만식의 입에서 나온 건 욕이나 푸념, 혹은 질투가 아닌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중간계투를 거쳐 선발로, 그리고 에이스로, 긴긴 시간을 워리어스의 투수로 뛰었다.
물론 몇 년 전부터 노쇠화가 진행되며 예전의 공 위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그간 쌓아 올린 경험치는 고스란히 몸에 기록되어 있다.
팀 내외에서 워낙 괴물이라고 떠들길래 처음 공 몇 개에는 사심을 조금 담아보았다.
타격 밸런스를 흐트리기 딱 좋은, 베테랑 타자가 아닌 이상 참아내기 힘든 그런 공이었다.
그런데 저 슈퍼루키는 그런 공에는 미동도 하지 않더니 자신이 던진 승부구를 그대로 걷어올려 외야 관중석 상단에 꽂아버렸다.
학창시절을 포함하면 20년 넘게 야구를 해온 이만식이었지만 그런 정신나간 스윙도, 그런 미친 궤적의 타구도 맹세코 난생 처음 보았다.
저 건방진 신인은 눈치 못 챈 것 같지만 그가 홈런을 치고 배트를 시원하게 던져버리는 것도 똑똑히 보았다.
당하는 입장에서 열불이 치솟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빠던이었다.
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지난 몇 년 사이 팀이 참 알뜰살뜰하게 망가졌다.
정치적인 요인들은 제외하더라도 팀 구성원 자체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하다.
자신의 뒤를 이어 팀의 에이스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임준영은 허무하게 인천으로 팀을 옮기고 말았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이만식 자신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에이스가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두 명의 용병 투수 뒤를 받쳐줄 3선발로 뛰는 것조차 버거운 게 현실이다.
그리고 워리어스는 명백한 약팀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것 같다.
예전 이 팀을 지탱해온 몇몇 천재들처럼, 아니, 그들보다 훨씬 큰 가능성을 가진 신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신인이 자기만큼이나 덩치가 큰 동기놈과 티격태격하며 수비 위치로 뛰어가고 있다.
이만식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우승이 목표라고 했지, 아마?”
드래프트장에서 저 겁 없는 루키가 우승을 입에 담은 게 기억난다.
물론 아무리 저 놈이 대단하다 해도 그건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재 한 사람이 팀을 이끌어 우승을 따내는, 극히 소년 만화같은 스토리를 믿기에 이만식은 너무 오래 야구를 해왔다.
그럼에도 이만식은 저 루키의 각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의욕이라는 놈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린다.
“코치님.”
“그래, 에이스.”
“지난번에 말씀하신 싱커, 그거 한 번 배워보겠습니다.”
“오! 그래? 좋아, 내가 정말 제대로 가르쳐주지.”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른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왕년의 에이스 이만식은 아주 잠시나마 다시 꿈을 꾸어 보기로 결심했다.
* * *
우리 팀의 선발로 나선 용병 라이언 스타크는 생각보다 더 좋은 투수였다.
구단주인 성훈이 형은 돈을 조금 더 쓰더라도 확실한 에이스를 영입하고 싶어했지만 투수 출신인 박재철 단장은 이 친구와의 재계약을 주장했고 관철시켰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아직 시즌 전이라 컨디션이 덜 올라왔지만 150km/h에 달하는 패스트볼과 낙차가 꽤 큰 커브, 그리고 종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정통파 우완 투수의 교과서 같은 폼을 가진 이 투수가 지난 시즌 7승 밖에 거두지 못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아직 모든 기록을 찾아본 건 아니지만 타구가 내야로 갈 때마다 움찔거리는 걸 보니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지난 시즌 이 팀의 내야수비는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으니까.
포수인 장덕수 선배가 좌타자의 바깥쪽 꽉 찬 코스로 직구를 요구했다. 고개를 끄덕인 라이언이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지금 타석에 서 있는 새로운 용병 맥스 워커가 어떤 타입의 선수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리그로 건너온 신입 타자에게 첫 타석이 어떤 의미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뭔가 보여주고 싶을 거다. 웬만한 코스의 공이라면 모두 때려내려 할 거다.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메이저리그에 처음 데뷔했을 때 그랬으니까.
배터리가 사인을 확정했다.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향하는 패스트볼.
그렇다면 내 쪽으로 공이 올 확률이 높다.
“준비해라, 안치욱. 가만히 굳어 있지 말고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가만, 이 놈 실전에서 수비는 어떠려나?
따아아악!
생각대로였다. 바깥쪽에 꽂히는 패스트볼을 맥스 워커가 제대로 밀어쳤다.
그대로 두면 유격수와 3루수 사이를 총알같이 꿰뚫을 타구, 당연히 3루수로 출전한 안치욱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첫 타석에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저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이 타구를 그냥 외야로 보내줄 생각이 없다.
투수가 공을 던지기 전부터 살짝 외야로 한 발 물러나 있던 나는 그 총알 같은 타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뇌의 명령을 받자마자 아무런 딜레이 없이 움직이는 싱싱한 육체가 그라운드를 박차고 달려나간다.
급격한 움직임을 할 때면 매번 삐걱거리던 무릎 대신 탄력 넘치는 무릎이 내 몸을 받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돕는다.
이제는 됐다 싶은 거리까지 달려간 후 가볍게 앞으로 슬라이딩, 그리고 글러브를 앞으로 쭉.
“와아!”
“저걸 잡아? 미친 건가?”
그리고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1루를 향해 총알 같은 송구.
“아웃!”
음, 힘이 너무 들어갔나? 내 송구를 받은 1루수가 손바닥이 아픈지 인상을 확 쓴다.
어쨌든 가볍게 원 아웃, 옆을 슬쩍 보니 안치욱이 얼빠진 표정으로 이상한 스탭을 밟고 있었다.
뭐지? 방금 내 풋워크를 따라하는 건가?
흠, 이게 따라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닌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지금 뭘 본거냐. 이거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 아니지?
﹂동양인도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구나··· 미쳤다 진짜
﹂송기태가 아무리 타격 쓰레기여도 유격수는 경험이 우선이라 생각한 제가 미친놈입니다
﹂저건 맞는 순간 무조건 안타 되는 타구 아니였냐
﹂한수혁이 투구 전부터 뒤로 몇 발 물러나 있었음. 그래서 잡은 거
﹂타구 판단 장난 아니다··· 세상에 송기태 같았으면 제자리에서 멀뚱히 구경했을 타구를 저렇게 쉽게 잡아내다니
﹂잡은 것도 잡은 거지만 저 송구 봐라··· 눈물 때문에 앞이 안 보인다 ㅠㅠ
﹂워리어스 기록원이 우리 사촌형인데 한수혁 연습투구에서 165 던졌다고 함
﹂뭐? 아직 스프링캠프인데 165?
﹂ㅇㅇ 그래서 다들 투수 왜 안 하려고 하냐고 또 한 번 난리
﹂미친··· 165 던지는 어깨로 1루 송구 한 거야? 재능낭비네
﹂일단 유격수는 한수혁으로 확정
﹂니가 감독도 아니고 뭔 확정 ㅋㅋ
﹂저걸 보고도 송기태 유격수로 쓰면 이대준이 미친 거임
﹂그건 인정
“수혁아, 나이스.”
“잘한다.”
“훌륭한 수비였어, 챔피언.”
수비를 마치고 덕아웃으로 돌아오니 한국어와 영어가 마구 섞인 칭찬이 귀속을 파고 든다.
영어를 15년이나 썼던 나도 뭔가 사고회로가 엉크러지는 느낌인데 다른 선수들은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간다.
선수복지를 위해 자동번역기라도 하나씩 돌려야 하나?
그나저나 생각보다 몸이 더 가볍다.
15년의 메이저리거 경력과 스무 살의 싱싱한 육체가 만난다는 게 이렇게 파괴력이 클지는 상상도 못했다.
하긴 날 빼면 세상 어떤 선수가 15년의 빅리그 경험과 20세의 탄력넘치는 육체를 동시에 갖고 있을까.
어쨌든 정말 이 정도면 이 팀을 우승시키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이거 마셔라.”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공수가 교대되어 벤치에 앉아 있는데 이 팀에 입단한 후 간단한 인사 외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던 2루수 이창모가 내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지난 시즌 주전으로 뛴 나이 서른 두 살의 베테랑 2루수.
다른 선수는 몰라도 이 선수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 알고 있다.
비록 2년뿐이지만 빅리그에서 뛰었던 선수였으니 말이다.
인천 레인저스에서 7년 간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매 시즌 3할 타율에 두 자리 수 홈런과 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의 대명사.
그 커리어를 바탕으로 FA 대신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했고, 마침 2루수 자원이 마땅치 않던 볼티모어와 계약을 체결하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했었지.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고, 결국 2년만에 방출.
문제는 국내 리그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그가 입은 마음의 상처였다.
원 소속팀인 인천 레인저스에는 그새 새로운 2루수 유망주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 인천은 이창모에게 계약조차 제안하지 않았고, 그의 기량이 떨어졌다 판단한 다른 구단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전 포지션에서 골고루 허접함을 자랑하던 서울 워리어스가 헐값의 계약을 제안했고, 이창모는 이 팀의 일원이 되었다.
“너 수비 잘 하더라.”
“감사합니다. 선배님도 여전하시네요.”
“뭘, 무릎 다치고는 퇴물 다 됐지.”
어느덧 워리어스 생활도 3년차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한때 리그를 대표했던 2루수는 한창 때의 의욕을 모두 잃은 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야구를 하고 있었다.
“아뇨, 저 고등학교 때 선배님 수비 영상 많이 돌려보고 배웠습니다.”
“그래? 고맙네.”
내 말에도 이창모는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 신체에 문제가 생기는 건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하지만 마음이 꺾인 선수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
선수 하나하나가 아쉬운 워리어스 입장에서 이창모가 부활만 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건만.
그가 전성기 기량을 되찾고 나와 함께 키스톤 콤비가 된다면 꽤나 그럴듯한 모양이 만들어질 것 같건만.
“그럼 나는 타격 준비하러.”
“네, 선배님.”
오늘 선발로 출장하지 않고 대기중이던 이창모가 감독의 지시를 받고 대타로 나서기 위해 대기타석으로 걸어 나갔다.
저 선배, 의욕만 조금 차리게 해주면 금방 제 자리 찾을 거 같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