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53)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52화(153/412)
#152. 두려움 그리고 미안함
“어서 오세요, 저희 구면이죠? 항상 좋은 해설 잘 듣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위원님.”
잠실야구장 내 사무실, 2027 시즌 종료가 보름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마지막까지 우승에 도전하고 있는 워리어스의 대표를 만나기 위해 고동식이 이곳을 찾았다.
야구계에서의 경력이나 나이 등을 감안할 때 박성훈보다 훨씬 윗줄이라 할 수 있는 고동식이지만 지금은 사적인 자리가 아니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한국에 10개밖에 안 되는 프로야구단의 주인이 된 박성훈.
오늘 이 자리는 지난 시즌 꼴찌팀이 우승에 도전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워리어스 특집 다큐멘터리에 삽입될 구단주 박성훈의 인터뷰를 위해 마련되었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어휴, 아닙니다. 저희 팀 홍보를 해주신다는데 당연히 협조해드려야죠. 수혁이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 훈련이 있어서… 대신 웬만한 건 제가 대신 대답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왔으니까 편하게 질문 주셔도 됩니다.”
“오… 정말인가요?”
“물론 너무 민감한 건 제 선에서 커트를 할 수밖에… 이해하시죠?”
“아아, 당연하죠. 정말 감사합니다.”
방송국을 대표해 오늘 인터뷰어로 선정된, 한수혁을 열심히 따라다닌 덕분에 인터넷 방송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하꼬에서 대한민국 넘버원 해설위원으로 거듭난 고동식이 놀란 표정으로 박성훈을 바라보았다.
올 시즌 내내 얼마나 많은 언론들이 한수혁을 취재하기 위해 애써 왔던가.
선수 한수혁이 아닌 인간 한수혁에 대한 궁금증.
그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좋아하는 건 뭔지, 평소 어떤 생활을 하는지, 그 어떤 것 하나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외부에 알려진 건 오직 하나, 그가 워리어스의 우승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던 차에 워리어스 특집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며 박성훈과 한수혁을 취재할 기회가 생겼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한수혁은 인터뷰를 거부했고, 고동식은 아쉬운 마음을 안은 채 워리어스 구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비록 본인을 직접 인터뷰하는 건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그와 친형제처럼 지낸 박성훈이 대신 대답을 해주겠다지 않는가?
순간 인터뷰 시간 전부를 한수혁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내며 고동식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대표님, 이제 시즌 종료까지 열네 경기가 남았습니다. 1위 인천과는 여전히 승차 없이 승률에서 뒤지는 2위를 기록 중이고요. 어떠십니까? 정규 시즌 우승 자신 있으십니까?”
“아, 그 부분은 일단…….”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올 시즌 목표에 대한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장기적인 재정 운영 문제, 선수단 내의 분위기까지.
사전에 준비해 놓았던 질문들이 모두 소진되었다.
의외로 아주 차분하고 담담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고동식을 보며 카메라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그의 텐션을 생각하면 아주 이례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동식의 눈에 갑자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수혁에 대한 질문을 할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대표님, 시간이 꽤 흘렀으니 정말 중요한 것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들어 보시고 괜찮다 싶으신 것만 대답해 주셔도 됩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편하게 질문 주세요.”
“한수혁 선수가 중학교 때부터 대표님 집에서 함께 성장한 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혹시 아무도 모르는 한수혁 선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고동식의 질문에 박성훈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정도는 충분히 대답해도 좋을 질문이다. 당사자인 한수혁이 있었다면 조금 쑥스러워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팬들이라면 확실히 궁금해할 문제일 것이다.
“어린 시절 수혁이는…….”
박성훈이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굉장히 따뜻하고 활발하고, 음… 사람 사귀는 것도 좋아하고, 한번 사귄 친구는 끝까지 챙기는 그런 꼬마였습니다.”
“네에?”
예상치 못한 대답에 고동식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워리어스 동료들, 그리고 WBC에서 잠시 함께한 대표팀 동료들의 입을 통해 한수혁의 성격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외부로 전해졌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먼저 다가가지는 않는, 그리고 항상 인간관계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 그리고 실력에 대해 확실한 믿음이 있으며 언제나 본인의 몫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항상 냉기가 흐르는 사람.
그것이 한수혁에 대한 동료 선수들의 공통적인 증언이었다.
물론 일부 한수혁과 충돌이 있었던 놈들이 되도 않는 비방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중들은 그런 멍청이들의 목소리에는 전혀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한수혁은 현 시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였다. 자잘한 비방이나 뜬소문 따위는 감히 범접하기 힘든 그런 슈퍼스타.
어쨌든 그런 한수혁이 어린 시절에는 굉장히 따뜻하고 활발하고 사람 사귀는 걸 좋아했다고?
사실 한수혁의 지금 성격은 중학교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 혼자 지낸 외로운 시간들과 박성훈의 죽음 등이 겹치며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회귀 후 다시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며 차츰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고동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고 그 사람들을 끝까지 챙기는 밝고 활발한 성격이었다고……?”
* * *
“감독님,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말해봐, 수혁아.”
“그냥 제가 두 번 등판하겠습니다.”
“안 돼. 네 입으로 말했듯이 원래 일정보다 석 달을 앞당겨 마운드에 오른 거야. 솔직한 말로 난 더 이상 널 마운드에 올리고 싶지가 않아. 그런데 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등판하겠다고?”
“이봐, 챔피언, 나도 보스의 말에 동감이야. 아무리 철저히 관리를 하고 있다 해도 자네는 아직 성장 중인 어린 선수이고, 하반기에 벌써 6번이나 등판해서 그 모든 경기에서 승리했지. 그 정도면 충분해. 더 이상 무리하지 말고 나머지는 동료들에게 맡기라고.”
2027 정규 시즌 종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황병호 체제로 바뀐 인천은 마치 내일 따위는 없다는 듯한 자세로 차곡차곡 승수를 쌓아가고 있었다.
포스트 시즌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에이스 임준영을 사흘 휴식 후 선발로 올리는가 하면 2선발이었던 용병은 마무리가 되어 거의 매 경기 출전을 이어가고 있다.
투수의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는 황병호의 야구 철학, 거기에 그를 감독으로 내세운 구단주의 묵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워리어스는 그런 인천에 승차 없이 승률에서 뒤지며 여전히 2위에 머물러 있었다.
무려 8년 만에 찾아온 정규 시즌 우승의 기회.
워리어스에 닥친 최우선 당면과제는 인천을 누르고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서울 파이터즈와의 원정 3연전, 창원과의 더블헤더 포함 원정 4연전, 수원과의 원정 4연전, 그리고 마지막 인천과 운명의 원정 3연전.
워리어스에게 남은 일정은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휴식일도 없이 진행되는 지옥의 원정 14연전.
가끔 시즌 막판 10, 11연전이 잡힌 적은 있지만 14연전은 역대 최초이지 싶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일정이 짜인 건지 KBO를 폭파시키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WBC 브레이크, 유독 잦았던 우천 취소가 겹치며 이렇게 된 거니 말이다.
어쨌든 오늘 이대준 감독을 비롯 수석코치와 트레이너, 그리고 내가 한 자리에 모인 건 그 지옥 같은 14연전에서의 투수로서 내 역할을 정하기 위해서다.
“됐고, 회의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지. 원안대로 수혁이 너는 창원 3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5이닝을 소화하게 될 거야. 올해 정규 시즌 등판은 그걸로 끝이다. 더 이상은 안 돼.”
“감독님.”
“자, 해산!”
매지션스와의 4차전에서 선발 등판한 나는 남은 14연전에서 최대 2번 더 등판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제이콥이 거기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이다.
‘회복력이 생각했던 것만큼 올라오질 않아. 염증수치도 기준치보다 높고. 이봐, 친구. 길게 얘기할 필요 없어. 애초에 원래 일정보다 빨리 투수를 시작했잖아. 이제라도 멈춰야 해. 내 말 이해했나?’
제이콥과 함께 나를 관리하던 구단 트레이너는 곧바로 구단에 보고를 올렸고, 그 결과 나는 앞으로 딱 한 번 선발로 등판한 후 정규 시즌 선발 등판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 나오며 생각했다.
하반기가 시작되고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워리어스의 마운드 사정은 썩 좋지 못하다.
누구 하나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고, 또 누구 하나 몸이 멀쩡한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대준 감독의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만약 내가 더 고집을 부렸더라면, 아니, 그냥 내 진짜 신분을 이용해서 위에서 찍어 눌렀다면 내 생각대로 두 번 정도는 더 등판이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내 몸에 생긴 문제는 프로야구 투수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아주 일상적인 것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나는 결국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이번 시즌 내내 별다른 문제 없이 가동되던 몸에 아주 작게나마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잊고 있던 그것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부상에 대한 두려움.
그래, 완전히 극복했다 생각했던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었다.
어깨를 부여잡고 마운드에 쓰러졌을 때의 그 황망함, 공포, 그리고 공을 던질 수 없게 된 후 느낀 그 허탈감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한, 어떤 면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튼튼하고 완벽한 몸을 갖게 되었지만 내 의식의 일부에는 그때의 절망감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후우…….”
두 번째 삶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내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숙제가 될 것 같다.
* * *
“다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지? 야, 이거 오랜만에 1군 올라오니까 기분이 이상한데.”
“만식이 형!”
“야야, 민석아, 너무 꽉 안지 마. 그러다 뼈 부러질라.”
“팔꿈치는 괜찮으세요?”
“아아, 뭐 그렇지. 생각해보면 이 나이 먹도록 수술 한 번 안 한 게 더 이상한 거지. 괜찮아. 이제 시즌 얼마 안 남았잖아. 그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야.”
부상으로 1군 명단에서 제외된 후 병원과 2군 구장을 오가며 재활에 집중했던 이만식 선배가 드디어 선수단에 합류했다.
재활 과정이 힘들었던 걸까, 약간은 포동포동했던 그의 체격이 몰라보게 슬림해져 있었다.
운동선수가 살이 빠지는 걸 싫어할 이유는 없지만 나이를 먹은 투수가 갑자기 체중이 확 줄어들 경우 밸런스 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나를 보는 이만식의 표정이 조금은 묘했다.
아마도 감독이나 코치에게 남은 경기에서의 투수 로테이션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지금 팀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말이다.
“수혁아.”
“네, 형님.”
“내가 수술을 미룬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눈빛이네.”
“맞습니다.”
“흠, 너한테 굳이 조언 같은 게 필요하겠냐만 운동선수는 말이야. 결국은 이런 순간이 오게 마련이거든. 팀이냐, 아니면 나 개인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그런 순간 말이야. 아, 물론 내가 이 한 몸 불사르고 은퇴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기냐? 8년 만에 팀이 가을야구를 나가는데 한가하게 수술이나 받을 수는 없잖아. 안 그러냐?”
“나중에 후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후회? 하하, 수혁아. 후회는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충분히 했어. 명색이 에이스라는 놈이 팀이 이 모양이 될 때까지 그냥 지켜만 봤는데 이거보다 더 큰 후회를 할 일이 있을까?”
“…….”
“감독님한테 들었다. 너도 몸이 완전하지는 않다며, 그런데 계속 등판하겠다고 우겼다며? 그러지 마라. 1년 차 신인 어깨 갈아서 우승 하면 뭐 할 건데? 그런 건 나같이 나이 좀 먹은 고참들의 몫이야. 짜식아, 내 말 알겠어?”
아직도 몸 상태가 완전하지는 않은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이만식 선배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내 등등 툭툭 두들겼다.
나는 내가 이 워리어스라는 팀을 혼자 이끌고 가고 있다 생각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내가 빠지면 모든 게 망가질 거라고.
결국은 내가 모든 걸 해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게도 기댈 곳이 있었다.
이 팀을 떠받들고 있는 다른 기둥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너는 네 길을 가면 돼.”
팀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을 불사를 각오를 마친 노장이 미련 한 점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주 이상한…….
“끙차, 그럼 나 몸 좀 풀어 봐야겠다. 수혁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 내 감정이 누군가에게 빚을 졌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기분이라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