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5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53화(154/412)
#153. 지옥의 14연전
– 소시민은 항상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 뭐라고 하셨나요, 위원님?
2027 정규 시즌 마지막 14연전에 돌입한 서울 워리어스, 그 첫 경기인 파이터즈와의 1차전을 앞둔 고척돔 중계부스에서 아나운서가 묘한 표정으로 고동식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특집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워리어스 대표실을 방문한 후 고동식의 상태가 좀 이상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평소에도 이상하기는 했지만 조금 더 안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들어봐야 한수혁과 관련된 일일 테니까.
– 일본 야구계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을 보통의 사람들은 비웃는다 뭐 그런 뜻이죠.
–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왜 지금 그런 말씀을…….
– 제가 처음에 이 자리에 앉았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비웃었습니까? 3류 선수 출신에 찌라시 기레기짓 하다가 하꼬 방송으로 근근이 먹고 살던 놈이 감히 공중파 마이크를 잡는다고 말이죠.
– 저기 위원님…….
–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보세요. 그러던 제가 이렇게 성공해서, 크흑, 이제는 한수혁 선수 단독 인터뷰도 맡게 되고 말이죠.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저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아나운서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간신히 그의 말꼬리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 아, 그러고 보니 한수혁 선수 단독 인터뷰를 하셨다고 하셨죠? 어떤 내용이었나요?
– 비밀입니다.
– 네?
– 죄송합니다. 구단과 방송국 계약에 따라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 전까지는 오프더레코드를 지킬 수밖에 없네요. 하지만 딱 하나 말씀드릴 수 있는 건…….
– 있는 건?
– 한수혁 선수가 본래는 아주 따뜻하고 활발하고,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한다는 거 정도?
– 네?
* * *
“한 번만 더 입을 나불거리면 다음 이닝에 바로 마운드에 올라가 네놈 머리통에 105마일 공을 꼽아주지.”
“뭐?”
“못 들은 척하지 말고 입 조심해. 명심해. 두 번은 없어, 이 개자식아.”
부상과 체력 소진으로 인해 서형주와 안치욱, 조성오, 이창모 등 4명의 주전선수들이 빠진 가운데 파이터즈와의 1차전이 시작되었다.
첫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낸 한수혁에게 파이터즈 1루수 윌리엄 워커가 빈정거렸다.
‘이봐, 진짜 선수들은 어디 가고 가짜들이 라인업에 가득한 거지? 설마 우승을 포기하기라도 한 건가?’
제 딴에는 농담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한수혁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도발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수혁은 지금 그런 농담 따위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자각하게 된 부상에 대한 위협, 그리고 이만식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의 기분은 사상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수혁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욕을 처먹은 윌리엄이 발끈하려 했지만 눈앞의 이 건방진 신인, 그리고 저 멀리 대기타석에 있는 괴물 포수의 주먹을 생각하며 억지로 입을 닫았다.
‘젠장, 사교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놈이로군.’
누군가에게는 사람 사귀기 좋아하는 선수로, 또 누군가에게는 사교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은 한수혁이 시선을 돌려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1 중견수 최민석
2 좌익수 김수학
3 유격수 한수혁
4 지명타자 월터 스미스
5 우익수 강진석
6 포수 장덕수
7 3루수 최진철
8 1루수 용지훈
9 2루수 유인철
투수 라이언 스타크
주전이 네 명이나 빠지다 보니 공격력이나 수비 면에서 여러 모로 불안해 보인다.
특히나 심각한 건 내야다.
1루수 용지훈과 2루수 유인철, 3루수 최진철. 네 명 중 세 명이 백업 멤버로 채워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대준 감독 역시 되도록 돌아가며 휴식을 주고 싶었지만 지난 주 인천 레인저스와의 3연전, 그리고 매지션스와의 4연전을 치르느라 선수를 아낄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마운드에 있는 선수가 용병 에이스 라이언이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점수를 내야 한다. 그가 마운드에서 버티는 동안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
2아웃 주자 1루, 타석에 월터 스미스가 들어섰다.
원칙적으로는 여기서 4번 타자의 장타를 기대해보는 게 정답이다. 괜히 도루를 시도하다가 내가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왼쪽 새끼 손가락에 불편을 느끼고 있는 월터는 큰 스윙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 뒤에 배치된 5번 강진석은 여전히 믿음을 갖기에는 부족한 타자다.
어떻게든 월터가 안타를 치고, 내가 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게 선취점을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걸 위해 지금은 도루가 필요하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와 맞서고 있는 이 파이터즈의 배터리도 충분히 알고 있다.
몇 번의 견제구가 오가고 배터리와 나 사이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한참 동안 신경전을 벌인 끝에 발견한 아주 작은 틈새.
그것을 발견한 순간 망설임 없이 2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어버렸다.
타닷
* * *
– 쳤습니다! 한수혁 선수가 친 타구가 멀리, 멀리, 계속 날아가서! 아! 홈런! 홈런입니다! 9회초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한수혁 선수의 홈런이 터지며 워리어스가 한 점을 쫓아갑니다! 시즌 55호! 이제 한수혁 선수는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까지 단 한 개만을 남겨놓게 됩니다!
–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두 개의 도루를 추가하며 시즌 40호를 달성했습니다. 이로서 한수혁 선수는 2015년 창원의 에릭 테임즈 선수 이후로 역대 두 번째로 40-40을 달성하게 됐네요. 이건 메이저리그에서도 지금까지 4번밖에 나오지 않은 대기록입니다. 축하합니다, 한수혁 선수.
– 위원님, 그런데 한수혁 선수 왜 저렇게 표정이 안 좋을까요? 시즌 55호 홈런에 40-40까지 달성한 선수의 얼굴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입니다.
– 아무래도… 오늘 경기 필승을 다짐했던 워리어스가 파이터즈에 뜻밖의 일격을 당한 게 원인이라고 봐야겠죠. 개인 성적보다는 워리어스의 우승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던 한수혁 선수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모습입니다.
– 아, 말씀드리는 순간 4번 월터 스미스 선수가 친 공이 중견수 플라이에 그치며 경기가 그대로 종료됩니다. 최종 스코어 5 대 2, 서울 파이터즈가 2위팀 워리어스를 잡아내며 9위에서 8위로 한 계단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 음, 방금 전 끝난 인천과 수원의 경기에서 결국 인천이 2 대 1로 승리한 걸 감안하면 레인저스와 워리어스의 승차는 다시 한 게임 차로 벌어지게 되었군요. 갈 길 바쁜 워리어스 입장에서는 오늘 경기가 많이 아쉽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 * *
“자, 괜찮아. 기 죽지 말고 고개 들어, 자식들아. 팬들한테 인사해야지. 특히 수혁이 너, 인터뷰도 해야 할 놈이 표정이 그게 뭐야? 인상 펴고, 오늘 진 경기 잘 복기해서 내일 이기면 돼. 자, 오늘은 다른 거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식사할 사람들은 식사하고, 빨리 퇴근할 사람들은 바로 가고, 해산!”
이대준 감독이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라커룸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14연전 중 그나마 가장 쉬울 거라 생각했던 하위팀 파이터즈와의 첫 경기에서 우리는 패배하고 말았다.
특별한 일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주전 4명이 빠진 공백이 너무나 컸을 뿐이다.
중요한 순간마다 파이터즈는 나와의 승부를 철저히 피했고, 주전들이 빠진 타선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수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업 멤버들이 세 명이나 포함된 내야가 여기저기 삐걱거렸고, 그걸 나 혼자 커버하는 건 불가능했다.
등 뒤가 불안해진 라이언의 제구가 흔들렸고, 결국 6회 넉 점을 한 번에 내주며 경기가 기울어버렸다.
다급해진 워리어스는 7회부터 주전 타자들을 연이어 대타로 기용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결국 역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야, 너무 인상 쓰지 마. 내가 죽을 죄 진 거 같잖아.”
체력 문제로 오늘 경기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서형주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내게 다가왔다.
녀석을 탓할 일이 아니다.
1년 차 신인에 불과한 놈이 거의 풀 시즌 주전 중견수 겸 리도오프 자리를 지켜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지금 녀석을 칭찬해줄 여유도, 그렇다고 평소처럼 장난을 받아줄 여유도 없었다.
그저 알았다고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후 인터뷰장으로 향했다.
“한수혁 선수, 비록 오늘 팀이 패배하기는 했지만 시즌 55호 홈런을 쳐내면서 역대 2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덤으로 역대 두 번째로 40-40을 달성한 타자가 되었고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팀이 패배한 상황에서 개인 기록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래도 개인적으로 쉽게 찾아오기 힘든 영광의 순간이 아닐까요?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많은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메라 앵글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난 리포터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연신 눈짓을 보냈다.
그래,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겠다.
알겠는데…….
“죄송합니다. 조금 더 노력해서 내일은 반드시 경기에서 이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리포터의 한숨 소리를 뒤로하고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WBC에서 우승,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하반기 일정, 동료 선수들의 부상과 이탈.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며 내 몸과 마음은 동시에 지쳐가고 있었다.
* * *
이 세상에서 한수혁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초등학교 때부터 10년 넘게 친형제처럼 지내온 박성훈 대표?
매일매일 변하는 한수혁의 컨디션과 신체 상태를 체크하고 있는 제이콥?
아니면 일년 내내 그와 함께하는 동료들?
모두 틀렸다. 현 시점에서 굳이 한 명을 꼽자면 그건 바로 민예린일 것이다.
한수혁에게 푹 빠진 후 그의 학창 시절부터 프로 데뷔 이후까지 모든 경기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보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전국 팔도를 쫓아다니며 단 한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다시 그날의 경기를 틀어 놓고 한수혁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지 고민하는,
여기서 조금만 삐끗하면 자칫 스토커라 오해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한수혁을 관찰하고 연구해온 인물이 바로 민예린이다.
그런 민예린이 보기에 최근 한수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원래도 기분 좋은 날이 거의 없는 사람이지만 최근에는 아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무거운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다.
가끔 동기들과 치던 장난도 모두 사라졌고, 경기를 위한 것 외에는 동료들과도 잘 말을 섞질 않는다.
너무 걱정이 돼서 박성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그 역시 인지는 하고 있지만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옆집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으면 따뜻하게 위로라도 해주라는 부탁 아닌 부탁과 함께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민예린은 뭔가를 깨달았다.
한수혁이 왜 저렇게 힘들어하고 있는지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야구선수로서 한수혁에게 고민이 생겼다면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누가 와도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해줘야 할 것은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한수혁을 보듬어주는 것이다.
‘음…….’
문제는 민예린에게 남자, 아니, 연애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을 배우고, 그것을 갈고 닦는 데 10대 시절을 통째로 갖다 바쳤다.
그나마 다른 아이돌들이 휴식 시간에 동료 남자 연예인과 비밀연애를 하는 사이 민예린은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을 들락거렸다.
남자는커녕 친구라 부를 사람조차 거의 없는 지극히 제한된 인간관계.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던 민예린이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스마트폰을 들어 무언가를 검색했다.
언젠가 우연히 발견해 두었던 인터넷 카페.
[운동선수 남친을 둔 사람들을 위한 작은 모임]민예린의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가입 버튼을 클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