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5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54화(155/412)
#154. 이런 게 정말 먹힌다고
인터넷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정보를 찾기 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직접 만나거나 혹은 도서관을 찾아 관련 자료를 하나하나 손으로 찾아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그러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불편했던 시절이다.
세상이 변했다.
단어 몇 개만 입력하면 일반인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전문 지식들까지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당연히 단점도 존재한다.
가장 큰 단점은 그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과연 무엇이 맞고 틀린지를 스스로 골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를 사칭하는 멍청이나 사기꾼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예린은 지금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운동선수를 남친으로 둔 여자들을 위한 모임’에 가입한 민예린.
규모가 크지 않은 모임이라 그런지 별도 절차 없이 곧바로 가입이 승인되었다.
순간 민예린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운동선수를 남친으로 둔…….
그 별 것 아닌 문구 하나가 자꾸만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만 만에 하나 한수혁이 자신이 이런 카페에 가입한 걸 알게 되면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머리가 아찔해진다.
꿀꺽
물 한 모금을 마셔 간신히 떨림과 흥분을 진정시킨 민예린이 검색창에 무언가를 입력했다.
[힘들어하는 운동선수 남친을 위로하는 법]검색 버튼을 누르자 그동안 회원들이 남겨놓은 온갖 게시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일단 그중 댓글이 가장 많은 글을 골라 클릭해 보았다.
[요즘 남친의 기분이 우울해 보이나요? 제가 직접 해보고 제대로 효과 본 방법 알려드릴게요. 별 거 없어요. 다들 살기 바쁘고, 솔직히 남친 빼면 운동에는 별로 관심도 없다 보니 경기장에 직접 간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잖아요? 더도 말고 딱 서너 번만 남친 경기를 연속으로 따라다녀보세요. 백퍼 감동받을 거예요!]글을 본 민예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기를 따라다니라고?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올 시즌 한수혁이 출장정지를 당한 몇 경기, 그리고 병원 검사와 치료를 위해 빠졌던 날 정도를 제외하면 워리어스 전 경기를 직관한 민예린이 다음 게시물을 눌렀다.
[막상 경기장에 따라 가도 소리 지르면서 응원하는 게 좀 창피하잖아요? 친구랑 같이 가면 좀 낫긴 해도 매번 친구를 데려갈 수도 없고. 하지만 가끔은 정말 큰 목소리로 남친을 응원해 보세요. 그가 힘들 때 들려오는 여친의 목소리에 애정도 업!]이번에도 도저히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소리 내어 응원을 하라고? 이런 게 정말 팁이라고?
매번 경기장에 갈 때마다 목이 쉬어 터질 때까지 한수혁의 이름을 불러 대는, 그리고 툭하면 안전망을 기어오르다가 관리 요원에게 쫓겨나는 민예린으로서는 단 1미리도 공감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조금 더 찾아보면 뭔가 있겠지, 이게 다는 아니겠지.
민예린이 다음 게시물로 넘어갔다.
[운동선수로 산다는 건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힘든 일이랍니다. 솔직히 우리 나이에 요리를 잘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에 보면 레시피가 다 나오거든요! 그걸 참고해서 도시락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걸 먹은 남친은 분명 감동할 거예요!]알다 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이미 하고 있는 게 나왔다.
한수혁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기 위해 궁중요리 전문가인 이모를 얼마나 들들 볶았던가.
생전 칼 한 번 안 잡아본 손으로 매일 식재료를 다듬고, 무언가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이 꼬박꼬박 한수혁의 냉장고에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다.
물론 아직도 얼굴을 직접 보고 주는 게 힘들어 그의 퇴근시간에 맞춰 집 앞에 놓아두곤 하지만.
정말 이런 게 남친을 위한 특별 대우라고?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도 매일 하고 있는 걸?
민예린의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져갔다.
댓글이 거의 없는 게시물들을 건너 뛰어 또 다른 글 하나를 찾아냈다.
[조금 힘들고 벅찰 수도 있지만 남친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세요. 혼자서 힘들면 친구나 동생의 도움을 받아서라도요. 남자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렇게 남친의 체면을 세워주면 바로 컨디션이 확 살아날 거예요!]이것도 이미 지난번에 한 번 한 거다. 패스.
정말 이런 것밖에 없는 걸까?
한수혁과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조차 매일 밥 먹듯이 하고 있는 일을 팁이랍시고 이런 데 써 놓은 걸 보면 정말 이 사람들이 운동선수를 남친으로 둔 게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한숨을 푹 내쉰 민예린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던 찰나, 가장 밑줄 구석에 있던 글 하나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끔은 여자도 과감해야…….]무슨 뜻일까 궁금해진 민예린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그 글을 터치했다.
[강한 척하지만 남자들이 사실 더 마음이 약하답니다. 그가 힘들어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말없이 안아주세요. 별 것 아닌 그런 포옹이 때론 큰 힘이 될 때가 있거든요.]민예린의 양쪽 뺨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저기… 수혁 오빠.”
“응?”
“제가…….”
“뭔데?”
“저기 혹시…….”
“나 이제 들어가봐야 돼. 예린아, 뭔지 몰라도 빨리 말해주면 안 될까.”
“제가 아, 아, 아, 안…….”
“안? 안 뭐?”
민예린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더니 급기야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제가 안… 경을 쓰면 어떨 거 같으세요?”
“안경?”
한수혁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민예린을 보며 대답했다.
“왜? 요즘 눈이 침침해? 안경도 괜찮겠지. 나 그럼 가본다.”
“히잉…….”
고개를 푹 숙인 채 온몸을 바르르 떠는 민예린을 뒤로하고 한수혁이 그라운드로 향했다.
전날 경기에서 워리어스가 패하고 레인저스가 승리하며 다시 1, 2위 승차가 한 게임으로 벌어졌다.
하루하루가 숨 막히는 일정의 연속이다.
용병 에이스 라이언 스타크를 내세우고도 경기에 패배한 워리어스는 2차전 선발로 브룩스 파커를 등판시켰다.
지난 시즌에 이어 올 시즌에도 충분히 자기 몫을 다한 브룩스는 내년도 몸값을 위해, 그리고 팀의 정규 시즌 우승을 위해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다.
7이닝 무실점 4K 완벽투구.
그 뒤를 이어받은 김두영이 1이닝, 그리고 양기철이 또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워리어스가 파이터즈를 3 대 0으로 제압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수혁의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 도전이 한 게임 뒤로 밀렸다는 사실이다.
매년 스폰서 재계약을 위해 한 계단이라도 순위를 올려야 하는 파이터즈는 경기에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를 위해 한수혁과의 승부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1타점 적시타 외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지만 한수혁의 표정은 전날 55호 홈런을 쳤을 때보다 오히려 훨씬 밝았다.
“신기록 도전이 아쉽게도 실패했습니다. 잠자리채를 들고 홈런볼을 기다리던 팬들도 많이 아쉬워하시는데요. 다음 경기에서는 혹시 기대해도 될까요?”
“팀이 이겨서 정말 기쁩니다.”
“네, 그러시군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그럼 다음 경기에서는 팀의 승리와 홈런 신기록도 함께 가져오실 생각이신가요?”
리포터의 얼굴에 제발 고개를 끄덕여 달라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한수혁의 대답은 평소와 똑같을 뿐이었다.
“남은 경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홈런 따위는 더 이상 추가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네?”
“제가 바라는 건 팀의 우승입니다.”
“…….”
한수혁이 그런 재미없는 인터뷰로 리포터를 좌절시키고 있는 사이, 황병호 체제 하의 인천은 또다시 수원을 제압하며 워리어스와의 승차를 유지했다.
그 과정에서 인천 선수의 거친 슬라이딩으로 수원의 2루수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원 팬들뿐만 아니라 많은 야구팬들이 인천의 공격적인 플레이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황병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팬들은 우리에게 승리를 원한다. 프로야구팀은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그러니 우리는 규정을 어기지 않는 한 승리를 위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황병호의 이런 발언이 나오자 야구팬들이 더 큰 목소리로 그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과연 팬들을 위한 야구인가.
혹시 감독의 커리어, 그리고 그를 고용한 구단주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 아닌가 하는 비난이었다.
인천 구단의 공식적인 답변은 ‘노코멘트’였다.
그리고 워리어스는 이제 파이터즈와의 올 시즌 마지막 경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언니! 여기요!”
“어, 예린아!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언니야말로 한국에 얼마 만에 들어오신 거예요! 히잉… 보고 싶어 혼났잖아요.”
“미안, 미안, 미국에서 쉬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
단일 시즌 홈런 타이 기록까지 불과 한 개만을 남겨둔 한수혁.
그 공을 잡기 위해 외야를 가득 메운 잠자리채 부대들.
본래대로라면 그 속에 섞여 있었어야 할 민예린이 오늘은 웬일인지 포수 바로 뒤 지정석에 자리를 잡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극히 제한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민예린이 유일하게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동료연예인.
열세 살 꼬맹이 시절 카메오로 출연했던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후 친언니 동생처럼 지내게 된 국내 최고 배우 김은별.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떠난 지 거의 3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그녀가 민예린을 찾았고, 한수혁과 김은별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결국 약속 장소를 야구장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 야구 잘 모르시죠? 죄송해요. 이게 워낙 중요한 경기라…….”
“후훗, 아냐. 오랜만에 와보니까 좋다. 너도 알잖아. 유람이 언니가 한때 저 파이터즈라는 팀 경영에 참여했던 거. 그때 나도 야구장 좀 들락거렸지. 아무튼 초대해줘서 고마워. 여기 자리 좋네.”
김은별과 거의 친자매라고 해도 좋을 어떤 배우가 한때 파이터즈의 경영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원정경기 모텔을 전전하던 파이터즈가 호텔이라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던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3년 만에 만난 반가움에 두 여자가 수다를 떠는 사이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파이터즈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고, 타석에는 워리어스 타자들이 들어섰다.
야구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간단한 룰 정도가 전부인 김은별이었지만 민예린과 수다를 떠는 재미로 경기를 관람했다.
“예린아, 그런데 있잖아. 저번에 네가 말한 그 브랜드…….”
“언니, 잠시만요!”
“응? 왜? 너 어디 불편해? 왜 그렇게 몸에 힘을 줘?”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저기, 꺄아악!”
옆에 앉아 있던 민예린이 갑자기 몸에 경기를 일으키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김은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곳에는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선수 하나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190은 훌쩍 넘어 보이는 크고 단단한 체격, 이와는 반대로 오밀조밀하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남자다운 얼굴.
김은별은 깨달았다.
지금 민예린이 경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말이다.
‘얘 봐라……?’
재미있다는 표정이 된 김은별이 가만히 민예린을 지켜보았다.
“파울!”
“볼!”
따아아아악!
그때였다.
그 선수가 때려낸 타구가 새까맣게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자 갑자기 야구장 전체가 무너질 듯 관중들이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그렇게 새까맣게 치솟은 타구가 결국 좌측 펜스를 넘어가는 순간 모든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김은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민예린에게 물어보기 위해서.
하지만 민예린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중앙석과 그라운드 사이를 가로막은 안전망을 마치 거미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예린아……?”
마침내 안전봉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간 민예린이 워리어스 깃발을 흔들며 소리 질렀다.
“수혁 오오오오오빠! 나 죽어! 허엉, 나 죽어! 왜 나 여기 있을 때 친 거야! 허엉!”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터지고 입에서는 한 맺힌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은별은 생각했다.
자기가 한국을 떠난 3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