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5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55화(156/412)
#155. 한번 터뜨려보자
이제는 일반 야구팬들에게도 제법 익숙한 OPS와 WHIP 같은 간단한 것에서 시작해서 WAR과 FIP, WRC, WPA, BABIP 같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지표들까지.
언제부터인가 야구선수와 그들이 펼치는 플레이들은 세분화된 객관적 지표에 따라 평가받기 시작했다.
공갈포라 비아냥을 당하던 타자가 OPS형 타자로 재조명을 받기도 했고, 승패, 타율, 타점 같은 클래식 스탯으로 먹고 살던 몇몇 선수들의 가치가 확연하게 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투수의 꽃은 삼진, 그리고 타자의 꽃은 홈런이라는 것 말이다.
아무리 세부지표가 뛰어난 투수가 있다 해도 팬들의 머릿속에 가장 강렬히 기억되는 건 불 같은 강속구로 삼진을 잡아내는 투수다.
타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지표를 들이밀며 이 타자가 우수하다고 주장을 한다 해도, 팬들의 시선은 홈런을 뻥뻥 때려대는 타자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최대한 객관적인 지표로 선수를 평가하고 기용하고, 몸값을 책정해야 하는 구단 프런트들조차 그런 팬심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선수들에게는 자연스럽게 팬이 따라붙게 마련이고, 이는 곧 구단의 인기와 매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서울 워리어스 한수혁, 마침내 시즌 56호 홈런 작렬! 한국 최다홈런 타이 기록 달성] [KBO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 24년 만에 갱신될 것인가?] [경기를 결정짓는 한수혁의 56호 석 점 홈런, 파이터즈에 승리 거두며 이날 수원에 패한 인천과 승차 없애는 데 성공] [한수혁의 56호 홈런볼을 주운 행운의 주인공은? 마산에서 올라온 16세 여자 고교생] [신기록 달성 소감을 묻는 질문에 한수혁 “팀이 승리해서 기쁘다”] [워리어스 잔여 경기 티켓값 계속 상승, 경찰 ‘암표 특별 단속 실시할 것’]KBO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은 2003년 기록된 56개다.
일본의 경우 2013년 용병 타자가 때려낸 60개가 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국과 일본에 비해 시즌 경기수가 많은, 거기에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인 미국은 어떨까?
그 동네 사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공식적으로는 2001년 배리 본즈가 때려낸 73개가 최다 기록이다.
그 뒤를 이어 1998년 마크 맥과이어가 기록한 70개, 같은 해 새미 소사의 66개, 1999년 마크 맥과이어 65개, 2001년 새미소사 64개, 1999년 역시 새미소사 63개.
여기까지가 역대 1위부터 6위까지의 기록이다.
문제는 그 리스트에 등장하는 3명의 타자들이 모두 금지 약물 복용자라는 거다.
그 불명예스러운 이름들을 모두 제외하고 청정 타자들만을 대상으로 기록을 집계하려면 꽤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1년 로저 매리스가 기록한 61개의 홈런, 1927년 베이브 루스 60개 등등.
만약 2022년 애런 저지라는 괴물이 등장해 62개의 홈런을 때려내지 못했다면 메이저리그는 1961년의 기록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이 다른 기록들과 달리 잘 깨어지지 않는 건 일 년에 홈런을 50개, 60개씩 때려낼 수 있는 건 인간이 아닌 괴물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괴물들.
한수혁의 56호 홈런이 터진 날, 한국야구계는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한국 최다홈런 타이 기록을 달성한 타자이자 완벽한 에이스인 한수혁을 보유한 워리어스 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순위 경쟁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기록 자체에 열광하는 타팀 팬들.
거기에 WBC 우승에 이어 또다시 찾아온 흥행 호재에 기뻐하는 KBO, 조회수를 빨아먹느라 신난 각종 언론들까지.
모두의 가슴에 축제의 불꽃을 피워 올린 한수혁은 지금 자신의 옆집 식탁 테이블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창원으로 내려가셔야 한다고요? 어휴, 힘드시겠다…….”
“뭐, 그렇기는 한데 야구선수라면 당연히…….”
“그것보다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예린이가 이거 만든다고 얼마나 끙끙거리던지.”
“언니!”
원정경기이기는 하지만 같은 서울에 위치한 파이터즈의 홈구장.
경기 후 인터뷰를 끝낸 한수혁은 식사를 건너뛰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입맛이 별로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홈런 기록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진심으로 그런 기록에는 별 관심 없는, 그것보다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창원과의 원정 4연전에만 정신이 팔린 한수혁은 집에 남은 빵 쪼가리로 대충 허기를 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한수혁을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오빠…….’
‘예린이? 너 왜 나와 있어?’
‘그게 아니라…….’
평소 같지 않게, 아니, 오히려 이게 평소 같은 건가.
아무튼 이상하게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민예린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 이 사람은 배우구나 알 수 있게 해주는 등 뒤의 후광.
‘이제 오셨구나. 많이 기다렸어요. 식사 안 하셨죠? 했다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까 예린이가 구단에 전화로 물어봤다는데. 누구한테 물어봤냐고요? 에이, 정보원의 신분은 보장해줘야죠. 그보다 피곤하실 텐데 시간 많이 안 뺏을 테니까 들어와서 식사만 하고 가요.’
‘……?’
영화나 드라마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한수혁조차 어디선가 몇 번 본 듯한, 현 시점 대한민국 배우들 중 월드스타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 중의 배우 김은별이 그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민예린과 김은별, 한수혁, 세 사람의 어색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음식 맛은 꽤 좋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제대로 라면조차 못 끓이던 민예린은 손가락을 수십 번씩 베이면서도 이모에게 계속 요리를 배웠고, 이제는 웬만한 전문가 못지 않은 음식 실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건 한수혁을 위한 것이었다.
“자, 그럼 식사는 대충 끝났고, 간단하게 차 한 잔만 할까요? 혹시 많이 피곤하세요?”
“음, 아뇨. 그 정도는 괜찮을 거 같네요.”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조금만 더 오지랖을 부릴게요.”
“네?”
“아뇨, 후훗. 별 거 아니에요.”
김은별의 말처럼 티 타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오늘 유격수로 풀타임을 출전한,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창원으로 떠나야 하는 운동선수를 마냥 붙잡아 둘 정도로 김은별과 민예린은 멍청하지 않았다.
김은별과 한수혁 사이에 간단한 자기 소개, 그리고 앞으로 종종 봤으면 한다는 의례적인 인사가 오갔고, 아주 잠깐 남은 시간은 오롯이 민예린의 몫이었다.
“와아, 오빠… 나 아까 그거 홈런 넘어갈 때 나도 뒤로 넘어갈 뻔했어요.”
“나도 봤어. 야, 너 진짜 안전망 이제 타지 말어. 미국에서도 한 번 떨어져 놓고 진짜 그러다 크게 다친다.”
김은별을 깜짝 놀라게 했던 안전망에 대한 이야기.
“오빠, 그런데 워리어스 정말 1위 할 수 있을까요? 인천 애들 완전 독기 빡 올랐던데.”
“글쎄, 해봐야지. 아니, 꼭 해야지.”
야구에 대한 이야기.
“그럼 오빠, 저 내일도 늦지 않게 야구장으로 갈게요. 아참, 혹시 제가 지난번에 가져다 드린 참치 샌드위치는 어땠어요? 다른 선수들은 뭐래요?”
“어, 그거 괜찮더라. 다들 잘 먹던데.”
“오케이, 그럼 내일도 그걸로 100인분 준비해갈게요.”
“100인분?”
“덕수 오빠가 혼자 10개는 넘게 먹을 테니까요. 히힛, 지금부터 재료 준비해야겠다.”
혼자서 100개의 샌드위치를 준비하겠다는 민예린의 야심 찬 공약까지.
그런 이야기가 끝난 후 한수혁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이제 두 명의 여자만이 남았다.
그제야 자신이 왜 김은별에게 하소연을 한 건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뭐였는지 생각난 민예린이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맞다. 언니, 그러니까 제가 말했던 고민이 뭐냐 하면요…….”
“됐다. 이것아.”
“네?”
“너 저 남자 좋아하는구나?”
“허억!”
민예린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남자로서 좋아한다. 그 별 것 아닌 말이 그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 고민이란 건 보나마나 어떻게 하면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뭐 그런 거지? 딱 보니까 저 남자, 네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커허헉!”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김은별 앞에서 민예린이 무너지고 말았다.
모든 가면을 내려놓은 민예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말씀이 다 맞아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인터넷 찾아봤더니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그나마 안아주라는 게 말이 있어서 해주려고 했는데 말도 못 꺼내겠고, 히잉…….”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의 민예린을 보며 김은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열세 살 꼬맹이던 녀석이 어느새 이렇게 자라 첫 연애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난 걸까.
자신의 나이가 서른을 넘어섰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김은별이 민예린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예린아.”
“네?”
“이미 너는 잘하고 있어. 그냥 그렇게만 하면 돼. 이제 곧 저 남자도 네 마음을 알아주게 될 거야.”
아주 오래전 자신이 그 남자를 만났을 때 가졌던 그 풋풋한 감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손님방으로 들어온 김은별이 지금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연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 나 한국에 와 보길 잘한 것 같아. 그 조그맣던 아이가 벌써 숙녀가 되어 있지 뭐야.]* * *
“수혁아, 너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인다.”
“그런가요?”
“어, 어제까지는 좀 지쳐 보이더니, 왜, 좋은 거라도 먹은 거야? 야, 그런 거 있으면 혼자 먹지 말고 형하고 같이 좀 먹자.”
대부분의 선수들이 로테이션으로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거의 전 경기 출장을 이어가고 있는, 매지션스 시절 놀기만 하고 훈련을 게을리하는 선수라 불리었던 최민석이 내 옆구리를 꼬집으며 농담을 걸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상하게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개운했다. 지난 한 주 동안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문제들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맑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어제 잠도 잘 잔 것 같은 기분이다.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훈련을 시작했다.
창원 랩터스와의 원정 4연전.
내, 아니, 우리의 목표는 여기서 최소 3승을 거두는 것이다.
어제 경기에서 우리가 이기고, 인천이 수원에게 덜미를 잡히며 다시 두 팀 간의 승차가 사라졌다. 비록 승률에서 뒤져 아쉽게 2위에 머무른 상태이지만.
어쨌든 아직은 아무것도 단정지을 수 없다.
이대준 감독이 선수들의 부상을 염려해 로테이션을 돌리고 있는 것과 달리 인천은 지금 내일 같은 건 없다는 마인드로 하루하루 총력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인천과의 정규 시즌 마지막 3연전에서 피 튀기는 1, 2위 결정전을 치러야 한다.
거기서 이기면 다행이지만 만약 밀리기라도 한다면 잔뜩 지친 상태에서 3위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될 것이다.
여유 따위를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참 이상하다.
왜 이렇게 몸과 마음이 가벼운 걸까.
“한수혁 선수, 혹시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워리어스TV 촬영 중입니다.”
“음, 네. 잠깐은 괜찮습니다.”
“오옷, 감사합니다! 자, 여러분 기뻐하십쇼. 오늘은 한수혁 선수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그래서일까, 평소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 전에는 최대한 피해왔던 구단 자체 TV 인터뷰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홍보팀 직원과 외주 PD가 신이 나서 카메라와 마이크를 내민다.
생각해 보면 외부 매체도 아니고, 내 돈으로 고용한 소중한 자원들이자 홍보매체다.
그동안 왜 나는 이 친구들의 요청을 거절해왔던 걸까.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여유가 없던 건가.
“한수혁 선수, 프로야구 원년 이후 첫 4할 타율, 거기에 이제 홈런 하나만 더 추가하면 24년 만에 KBO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어떨까요, 저희가 한 번 기대해봐도 될까요?”
평소 같으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내가 원하는 건 팀의 승리뿐이라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어제 경기에서 잠자리채를 들고 한수혁이라는 이름을 불러 주던 수많은 팬들의 얼굴이었다.
잊고 있었다.
내가 원한 건 혼자 하는 야구가 아닌, 나 혼자만을 위한 야구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야구라는 걸.
그리고 그 안에는 내 구단 워리어스를 아끼는 팬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홈런 신기록이요?”
“네, 한수혁 선수. 아, 물론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기록이 아닌 팀의 승리겠지만 그래도 팬들을 위해서…….”
“깨 드리겠습니다. 그거 뭐 어려운 거라고.”
“앗, 네? 지금 뭐라고?”
“한국 기록은 물론이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시아 기록도 갈아치우죠. 경기가 얼마 안 남았으니 세계 기록은 내년으로 미루고요. 이 정도면 대답이 될까요?”
“오오옷!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PD! 우리 이거 빨리 편집해서 올리자. 가자고, 빨리!”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상기된 표정의 직원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 생각해보면 그게 뭐 대수라고.
팀의 승리와 개인 기록이라는 선택지가 온다면 망설임없이 전자를 택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홈런을 노려보기로 했다.
“수혁아, 오늘 이 형 좀 도와줄 거지?”
“홈런 4방 쳐드리면 되죠?”
“이야… 그거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더군다나 오늘은 이만식 선배의 복귀전이다.
좋아. 결심했다.
오늘 경기, 한번 제대로 터뜨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