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5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57화(158/412)
#157. 그의 뒤를 따르다
운동선수들이 평생 잊지 못하는, 은퇴 후에도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영광의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
돈과 명예, 신기록, 개인 타이틀을 차지한 날? 혹은 소속팀이 우승을 했던 날?
일반적으로 그런 것들을 꼽겠지만 실제 오랜 시간 현역으로 활동했던 선수들 중 상당수가 관중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은 날을 꼽곤 한다.
수만 명의 관중이 모든 행동을 멈추고 오직 자신 하나만을 위해 박수를 보내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어쩌면 그것은 운동선수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짝짝짝짝짝
“잘했어! 잘했다, 만식아!”
“아직 살아 있네!”
“이만식! 이만식! 이만식!”
6회말, 워리어스와 창원이 4 대 4 동점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투 아웃 주자 1루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워리어스 덕아웃에서 투수 교체 사인이 나오자 창원 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이 이만식을 향해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서울 팀에서만 10년 넘는 시간을 뛰었지만 이만식의 고향은 바로 이곳 창원이다.
창원 팬들은 고향 학교의 유니폼을 입고 뛰던 그 파릇파릇한 꼬맹이가 이제 은퇴를 앞둔 노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관중들의 박수가 계속되었다.
매 이닝 주자를 출루시키면서도 최선을 다해 이닝을 막아낸 이만식이 모자를 벗고 그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5와 3분의 2이닝 4실점, 3자책점.
오늘 워리어스 선발투수 이만식이 기록한 성적이었다.
뒤이어 줄줄이 등장할 창원의 좌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김두영이 마운드를 물려 받았다.
평소 같은 팀 동료들이나 상대 팀 선수들에게나 일관되게 쿨한 자세를 유지하는 김두영이 이만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오냐, 휴… 이제 난 좀 쉴란다. 뒤를 부탁한다, 두영아.”
이만식과 천상진, 홍영식, 최정수 등의 줄부상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던 워리어스다.
비록 완벽한 투구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노장의 가세는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힘이 되어주었다.
슈웅
파아앙!
“스윙! 아웃!”
이만식의 뒤를 이어받은 김두영이 다음 타자를 간단하게 처리하며 6회말 창원의 공격이 끝났다.
그리고 이어진 7회초 워리어스의 공격.
오늘 첫 타석에 2루타와 도루, 그리고 득점을 기록한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섰다.
* * *
나는 타자이기에 앞서 투수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나라는 야구선수의 본질은 타자보다는 투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오늘 경기에서 이만식이라는 선수가 얼마나 혼신을 힘을 다해 공을 던졌는지 말이다.
5와 3분의 2이닝 4실점, 그중 한 점은 1루수의 실책으로 인한 비자책점.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적은 아니다.
하지만 공 하나를 던질 때마다 찾아오는 불쾌한 통증, 어쩌면 오늘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그것들과 싸우며 거둬낸 값진 성적이다. 그리고 선발투수 부족에 허덕이는 워리어스에게 숨통을 열어주는 멋진 투구였다.
시즌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 목표는 오로지 하나, 팀의 우승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보다 조금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저 동료들과 함께, 아무 일 없이 웃는 얼굴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싶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내년 시즌을 준비하고 싶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모르겠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조금이라도 빨리 오늘 경기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다.
부상과 체력 고갈로 경기에서 빠져 있는 타자들이 대타로 나서지 않도록, 계속되는 등판에 지친 중간계투들이 조금이라도 쉴 수 있도록.
이 경기를 끝내야 한다.
“플레이!”
우리 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선발 루카스 베넷이 물러난 가운데 창원의 두 번째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창원의 가을야구 탈락이 확정된 후에야 1군 등판 기회를 잡게 된 2년 차 신인 윤호균.
아직 공 하나도 던지지 않은 그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운드 위에 서 있었다.
“한수혁! 이쪽으로! 이쪽으로 쳐줘!”
“아니, 여기! 이쪽! 이쪽이야!”
“오빠! 아무 쪽이나 상관없으니까 날려줘요!”
몇 차례 배트를 붕붕 돌리자 야구장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올 시즌 내가 때려낸 홈런 중 약 65% 정도가 좌측으로 넘어갔다.
그 때문일까, 좌측 외야석의 암표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경기에서 반드시 홈런이 터지기를 바라는 수많은 관중들.
57호 홈런볼을 잡아내겠다는 그들의 광기 어린 아우성.
홈팀을 응원하기는 하지만 상대 타자가 때린 홈런볼을 잡길 원하는 관중들의 이중적인 마음.
그런 엄청난 압박 속에서 고작 2년 차에 불과한 신인이 제대로 된 공을 던질 수 있을 리 없다.
“볼.”
윤호균이 던진 초구가 포수조차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홈플레이트 뒤에 앉은 포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도 포수의 머릿속에는 이런 중요한 순간 워리어스와 경기를 배정해준 KBO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차라리 부산이나 대구처럼 최하위권에 처지기라도 했으면 다음 시즌 신인 지명에 대한 기대감이라도 품을 수 있으련만.
탱킹이 불가능한 KBO의 구조상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 중하위권 팀의 배터리가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다음 공을 준비했다.
어떤 공이 날아올지 어렴풋이 예측된다.
어차피 가을야구에 대한 꿈은 접었지만 감독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1승이라도 더 챙기고 싶을 것이다.
아무리 경기 후반 동점 상황이라고 해도 쉽게 내게 승부를 걸지는 않을 거란 소리다.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결론, 보더라인 투구.
존에서 한 개, 혹은 반 개 정도 빠지는 투구로 나를 유혹해서 범타를 유도하는, 그것이 먹히지 않을 경우 볼넷을 줘도 상관없다는 그런 볼 배합이 나올 차례다.
“볼.”
역시나 예상대로다.
지금 창원의 감독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아니,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그런 작전.
하지만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슈웅
지금 배터리를 이루고 있는 투수와 포수가 패닉에 빠졌다는 걸.
2만 명에 가까운 관중, 심지어 홈 관중들조차 투수가 홈런 맞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묵묵히 자신의 공을 던지기에는 투수가 너무 애송이라는 걸 말이다.
드드득
저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구종, 그리고 코스.
선택지가 아주 많은 듯하지만 어차피 둘 중 하나다.
홈런을 칠 수 있는 공, 혹은 칠 수 없는 공.
감독의 지시와 관중석의 함성, 그 엄청난 압박감에 사로잡힌 투수가 몸을 덜덜 떨며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그의 공 끝에서 손이 떠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드디어 저 많은 관중들의 소망을 들어줄 때가 되었다는 것을.
따아아아아악!
* * *
[24년 만에 깨진 한국 야구 최다홈런 신기록, 워리어스 한수혁 시즌 57호 작렬!] [중앙 관중석을 강타하고 그라운드로 떨어진 57호 홈런볼, 한수혁 “추첨을 통해 팬분들에게 다시 돌려드리겠다” 워리어스 팬들 광분] [시즌 4할 타율, 57호 홈런 기록한 한수혁, 사실상 MVP와 신인왕 확정] [기록 달성 소감 묻는 질문에 한수혁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게 되어 기쁘다”] [드디어 깨진 한국 홈런 기록, 이제 남은 건 아시아 신기록뿐] [고동식 해설위원 “4할, 60홈런, 50-50도 충분히 가능, 단 다른 팀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6 대 4로 창원 제압한 워리어스, 같은 날 부산을 누른 레인저스, 1, 2위 경쟁은 계속]한수혁의 시즌 57호 홈런으로 창원과의 1차전을 승리한 워리어스는 이어진 2차전에 이적생 강동하를 선발로 내세웠다.
내일 열릴 더블헤더 첫 경기에는 한수혁이, 그리고 두 번째 경기에는 이영주가 나서게 될 것이다.
이번 4연전에서 한수혁이 등판하는 3차전을 제외하면 사실상 믿을 만한 선발 투수가 전무한 상황이다.
그 어느 때보다 타자들의 어깨가 무거운 상황.
체력 문제와 가벼운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한동안 선발 라인업에서 빠져 있던 서형주는 어제 창원과의 1차전에서 1번 타자 겸 중견수로 복귀했다.
한동안 경기를 쉰 탓인지 4번의 타석에서 볼넷 하나를 얻어내는 데 그쳤지만 수비에서는 여전히 날아다니며 팀의 대량실점 위기를 막아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시도 체력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적어도 체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서형주는 동기 한수혁을 보며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올 시즌 출장정지로 빠진 몇 경기를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한, 거기에 남들이 쉬는 동안 WBC까지 참가했던, 심지어 하반기에는 투수까지 겸업하고 있음에도 거의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 괴물 같은 놈.
‘이게 정말 말이 되는 건가?’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경기수가 훨씬 많고, 그 덕에 휴식일은 적은 메이저리그에는 종종 철인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등장하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2,632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남긴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원클럽맨 칼 립켄 주니어다.
1982년 5월 31일, 불과 21세의 어린 나이에 시작된 그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은 그가 38세가 된 1998년 9월 20일이 되어서야 끝났다.
햇수로 18년, 그 말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전 경기에 선발로 출전한 그는 심지어 그 기간 유격수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해냈다.
그래, 그러니 거기까지는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한수혁이 유격수로 거의 전 경기를 선발 출전한 것에 대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 하나가 남아 있다.
그가 하반기부터는 선발투수를 겸업하고 있다는 것.
타자와 유격수, 투수를 오가고 있다는 것.
선발 등판 바로 다음 날 경기에만 지명타자로 빠지고, 나머지 경기에는 다시 유격수로 경기를 뛰고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은 비단 체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야구 선수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정신력이 소모된다.
타자로 뛰기 위한 정신력이 따로 있고, 글러브를 끼고 수비를 보는 데 필요한 정신력이 또 따로 있는 법이다.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진 선수들이 괜히 지명타자 자리로 밀려나는 게 아니다. 일반적인 선수는 공격과 수비를 겸하는 것만으로도 가진 정신력이 모두 바닥나곤 한다.
그런데 저 괴물 같은 동기 놈은 거기에 투수까지 하고 있다.
심지어 타자와 수비수, 투수, 세 가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그것도 국내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압도적인 성적을 쌓아 올리면서 말이다.
한때 한수혁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에게도 기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한수혁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서형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비록 3할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4할에 가까운 출루율과 45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최고의 데뷔 시즌을 보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 저 동기 놈은 개인 성적보다는 팀 승리를 위해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가 감히 따라가기조차 힘든 성적을 이뤄냈다.
그 괴물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어제 보니까 턱이 계속 들리던데? 지친 거면 감독님한테 말해. 괜히 억지로 뛰지 말고.”
안다. 이제는 서형주도 안다.
저 건방진 말투 속에 담긴 진짜 뜻을.
그것이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비아냥이 아니라 혹시나 부상을 당하지 않을까, 슬럼프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라는 걸.
그렇기에 서형주는 오히려 더 삐딱하게 받아 칠 수밖에 없었다.
“뭐라는 거야. 내가 도루 타이틀 가져갈까 봐 견제하는 거냐?”
“도루? 아, 아, 그런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전 세계 최초로 50-50을 달성할지 모를 이 괴물 놈의 머릿속에 개인 기록 같은 건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걸, 지금 녀석의 머릿속에 들은 건 오직 하나, 오늘 경기의 승리뿐이라는 걸.
“두고 봐라…….”
“음? 뭘 맨날 두고 보라는 거야?”
“시끄럽고, 오늘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베이스에 나갈 테니까 무조건 날 홈으로 불러들여. 안 되면 다 네 탓이야.”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됐고, 나 러닝해야 하니까 훠이, 이 괴물 같은 놈아.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어이없어하는 한수혁을 뒤로하고 서형주가 그라운드를 돌기 시작했다.
아깝게 실패한 3할 타율 도전, 50도루에 대한 욕심, 그리고 내년 시즌 연봉 인상에 대한 기대.
철부지 1년 차 신인의 머릿속에 차 있던 온갖 잡생각들이 사라지고, 대신 승리에 대한 열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형주는 동기 한수혁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