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63)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62화(163/412)
#162. 내가 원하는 승리
‘젠장, 그 몸통 위에 붙은 건 대체 어디다 쓸 건데? 뇌가 있기는 한 거야? 거기서 그런 멍청한 짓을 한다고? 그 따위로 할 거면 당장 야구 따위 때려치우고 고향에 가서 목장 울타리나 고쳐, 이 개자식아!’
시애틀에서 뛰던 마지막 시즌, 내 투수로서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 가던 그때 내가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실책을 한 3루수 놈에게 퍼부어줬던 말이 생각난다.
빅리그에 처음 콜업되자마자 내게 다가와 우상이니 뭐니 떠들어대던, 멀대같이 큰 키에 허여멀건한 얼굴을 가졌던 루키.
지금쯤 미국 어딘가에서 막대사탕을 물고 뛰어다니고 있을 그놈은 결국 내 폭언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때 나는 그냥 항상 화가 나 있었다.
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모두 잃고, 그나마 하나 남아 있던 야구마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 상황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그 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풀곤 했다.
실책을 저지른 야수, 본헤드 플레이를 해 타점 찬스를 날려 먹은 주자들.
수많은 팀원들이 내게 욕을 먹었고, 결국 시간이 지난 후에는 내 주변에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동료 투수들에게는 화를 내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승리를 날려 먹은 멍청한 중간계투, 유격수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풋내기 신인투수들 등등.
그건 내가 저 마운드 위의 고독함, 투수가 짊어져야 할 무게를 잘 알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외로움, 내가 던진 공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를 그 막막함.
모든 포지션 중 선수 스탯에 승, 패가 붙는 건 오직 투수가 유일하다.
결국 팀의 승패를 좌우하는 건 투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선배님.”
“으응? 수혁아. 아, 저기 중계부스 쪽이 뭔가 시끄러운 것 같아서.”
평소 내 편파 해설로 유명한 고동식 위원이 오늘 경기전 나를 찾아왔었다.
뭐라더라, 인천 놈들의 좆 같은 짓에 휘말리지 말고 자신의 야구를 하라고 했지, 아마.
아무튼 그 고동식 위원이 있는 중계부스에서 뭔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누구랑 싸우기라도 하는 걸까.
“영주야, 편하게 해, 편하게. 맞춰 잡는다는 생각으로. 어차피 쫄리는 건 쟤들도 마찬가지야. 10게임이나 앞서던 놈들이 여기까지 몰렸는데 어디 평정심이 유지되겠냐? 그러니까 그냥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선배님…….”
팀의 최종 순위가 걸린 3연전, 그 첫 경기에 선발로 등판하게 된 이영주는 지나친 부담감에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극도의 긴장과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얼마 전과 달리 이제 그런 후배들을 다독여줄 고참들이 있다는 것이다.
부상에서 돌아온 이만식과 조성오, 두 명의 베테랑이 이영주를 둘러싸고 긴장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3연전의 방향성을 놓고 꽤 많은 말들이 오갔다.
감독과 단장의 생각이 조금씩 달랐고, 구단주인 성훈이 형 역시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정규시즌 1위를 포기하고 가을야구에 올인하자.
아니다, 일단 1차전에 총력으로 맞붙어보고 그게 잘 안 되면 가을야구 체제로 전환하자, 그게 무슨 소리냐, 끝까지 전력으로 부딪혀보자.
아무리 떠들어도 결론이 나지 않자 성훈이 형이 결국 내 의사를 물었다.
팀의 소유주로서, 그리고 이 팀의 에이스이자 중심타자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아니, 우리가 하고 싶은 게 단순히 팀 이름 앞에 1이라는 숫자를 새기고 싶었던 건가?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수혁아.’
‘우리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그 결과물로 따라오는 우승을 바라는 거지, 억지로 끼워 맞춘 우승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15년이 넘는 시간을 야구를 해왔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야구가 계획대로 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그랬다. 이 야구라는 스포츠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우리들을 가지고 논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전력을 다해 부딪히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야구는 항상 깨끗하고 정당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우승은 우리가 전력을 다해 적과 부딪히고 그 결과물로 트로피를 가져오는 것이다.
복잡하게 경우의 수를 따지는 그런 우승은 원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고 싶을 것이다.
단 한 게임만 져도 끝인 상황에서,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난 상황에서 왜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거냐고.
글쎄, 바로 그런 걸 하기 위해 우리는 야구를 하는 게 아닐까?
애초에 이런 작대기 하나 들고 150㎞/h가 넘는 공을 치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 아닐까?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아니, 우리는 갖고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인천에게 덤벼들 것이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하늘만이 알겠지.
하지만 나는, 그 하늘의 뜻을 조금이나마 우리 쪽으로 움직여 볼 생각이다.
* * *
“준영이 형한테 별 일 없는 거죠?”
“…….”
WBC 브레이크가 끝나고 얼마 후 임준영과 함께 식사를 하며 안면을 익힌 인천 포수 손영진이 내 말을 못들은 척 입을 꾹 닫았다.
상대팀 선수하고 말을 섞으면 2군으로 보내겠다는 협박이라도 들은 건가.
KBO에서 뛴 경험이라 봐야 올 시즌이 전부인 나는 저 황병호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꼭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감독으로 있던 양반이 바로 저 황병호의 수제자라 불렸던 사람이니까.
내 고등학교 초창기 선수 시절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인물.
그는 자신의 스승에게 배운 야구를 그대로 우리 학교에 뿌리내리려 했다.
일본야구의 영향을 크게 받은 중앙집권식 감독 야구.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독의, 감독에 의한, 감독을 위한 야구.
절대 부정적으로 말한 게 아니다. 그나마 순화해서 말한 게 이 정도다.
나쁘게 말하면?
흠.
승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도 되는 야구.
투수의 어깨를 갈아 넣고, 경기를 막 끝낸 타자에게 3시간씩 특타와 펑고를 시키고, 상대 팀 선수를 위협하기 위해 머리로 빈볼을 던지고, 심리전을 걸기 위해 거친 행동을 일삼는 그런 야구.
‘한수혁, 네가 얼마나 야구를 잘하든 그건 아무 상관없어. 내가 짜 놓은 판 대로 움직이지 않는 말 따위는 필요 없거든. 나는 감독이고 너는 일개 선수야. 내 말 이해했나?’
꽤나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겨우 고등학교 1학년생인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자신만의 야구 철학을 늘어놓던 그 인간의 얼굴이 떠오른다.
만약 그놈이 중도에 다른 학교 감독으로 옮겨가지 않았다면 내 야구 인생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제자라는 인간이 그 정도인데 스승은 얼마나 대단할지 굳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
나는 이번 3연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단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볼.”
“볼.”
“볼.”
“볼.”
서형주와 안치욱이 나란히 2루 땅볼로 물러나 2사 주자 없는 상황, 상대 투수는 나와 전혀 승부할 의사가 없다는 듯 어이없는 볼 네 개를 연속으로 던져 댔다.
그리고 그중 한 개는 내 얼굴과 상당히 가까운 쪽으로 날아왔다.
물론 힘을 빼고 던진, 몸에 맞기에는 조금 먼 거리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심판은 즉시 투수를 향해 경고를 내렸다.
홈 응원석과 원정 응원석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자동고의사구 대신 날아온 네 개의 볼, 그리고 그중 섞여 있는 빈볼인지 실투인지 애매한 위협적인 공 하나.
병신 같은 짓이기는 하지만 효과는 꽤 있었다.
나는 괜찮았지만 대신 대기타석에 있던 조성오 선배와 월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으니 말이다.
‘차분하게.’
타석에 선 조성오 선배가 당장이라도 마운드로 뛰어오를 듯한 표정으로 투수를 노려보았다.
그런 조성오에게 흥분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내준 후 천천히 리드폭을 잡기 시작했다.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
“우우우! 집어치워! 뭐 하냐!”
별 의미도 없는 견제구가 연달아 날아왔다.
누가 봐도 의도가 아주 명백한 견제구였다.
투수가 견제구를 던질 때마다 주자는 스타트와 복귀를 반복해야 한다.
워리어스의 핵심인 내 체력을 빼놓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다.
물론 저런 견제구는 주자뿐만 아니라 투수의 체력과 집중력도 빼앗아간다.
1회초부터 저런 짓을 한다는 건 인천은 오늘 마이클 클락을 오래 끌고 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
다시 5개 연속 견제구가 날아왔다. 심지어 내가 리드를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나와 승부를 피하려는 투수들, 그리고 계속되는 견제.
예전 같으면 상당히 난감했을 것이다.
내 뒤에 믿을 만한 타자가 없던 그 시절에는 말이다.
오죽하면 이런 상황이 오면 가장 먼저 홈스틸부터 떠올렸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플레이!”
계속 경기가 지연되자 주심이 빠른 진행을 지시했다.
그제야 비로소 공을 던질 얼굴이 된 마이클이 조성오를 향해 초구를 던졌다.
그리고,
따아아아악!
“Holy Shit……!”
분노한 조성오가 친 타구가 멀리멀리 날아가 인천 야구장 우측 담장을 훌쩍 넘겨버렸다.
* * *
“이런 병신 같은… 당장 김용재 올려!”
“알겠습니다, 감독님.”
황병호의 지시를 받은 코치가 마운드 위 투수에게 즉시 사인을 보냈다.
갑자기 마무리로 보직 전환된 후 오늘 다시 선발로 등판한 용병투수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모든 걸 포기한 듯 고개를 툭 떨궜다.
“타임!”
“무슨 일입니까?”
“투수 상태가 이상해서요. 잠시만 보고 오겠습니다.”
경기 중단을 요청한 투수코치가 후다닥 마운드 위로 뛰어올라갔다.
“마이크, 수고했어. 어깨가 아프다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게 무슨 개같… 휴우.”
뭔가 한마디를 내뱉으려던 용병 투수가 경기 전 통역이 전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그만 입을 닫아버렸다.
어차피 당신에게 중요한 건 돈 아니냐고.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해서 우승을 해야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위장 선발 작전 따위에 동원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애써 그 생각을 지우며 코치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공을 받아 든 코치가 즉시 심판에게 투수 교체를 요청했다.
“투수를 교체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어깨가 아프다네요.”
“어깨요?”
“네, 도저히 공을 던질 상황이… 빨리 다른 투수를 준비시켜서 올리겠습니다.”
“흠, 그것 참… 일단 알았어요. 서둘러 주세요.”
누가 봐도 위장 선발이다. 하지만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구팬들이 욕할 수는 있겠지만 황병호는 애초에 그런 여론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이었다.
[인천 레인저스 투수 교체, 마이크 클락 물러나고 김용재]누가 봐도 얼굴이 썩어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안 드는 게 확실한 김용재가 마운드에 올랐다.
지난 WBC에서 쓴맛을 본 인천의 차기 에이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임준영이 항명에 대한 대가로 벌투를 할 때 하마터면 감독을 그대로 들이받을 뻔했던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임준영이 말했다.
이 바닥에서 버티려면 이 정도는 참고 넘겨야 한다고. 정 억울하면 좋은 성적을 거둬서 빨리 FA를 취득해 이 팀을 빠져나가라고.
현 규정상 프로팀 소속의 야구선수가 항명을 하거나 구단의 의지에 반하는 짓을 할 경우 그 결말은 너무나 뻔하다.
그 어디에도 선수가 이길 방법은 없다. FA 권리를 얻기 전까지는 을 중의 을로 살아야 하는 게 바로 프로야구 선수다.
세상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얼굴이 된 김용재가 첫 타자로 월터 스미스를 상대했다.
삼진을 잡으려는 투수, 그리고 큰 것 한 방을 노리는 타자.
7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월터를 삼진으로 잡아낸 투수가 힘없는 얼굴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런 김용재의 눈에는 실핏줄이 터진 듯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