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66)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65화(166/412)
#165. 과거의 동료, 지금의 적
한때 리그를 지배했던 선수가 점차 기량을 잃고 평범해져 가는 걸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그것이 자신이 지도하고 있는 선수라면 더더욱.
“만식아, 컨디션은 괜찮냐?”
“그럼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십 몇 년을 해온 일인데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놈이 왜 그렇게 다리는 달달 떠는데?”
“아아, 이거요. 이건 그냥 제 오랜 습관 같은… 흐흐.”
3차전을 앞둔 워리어스 감독실 안, 이대준 감독이 착잡한 표정으로 이만식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처럼 벌써 십 년 넘게 이 일을 해온 이만식 역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잘 던져야 하는 부담?
아니, 그것보다는 이 팀의 최고 투수인 한수혁을 대신해야 하는 부담이었다.
올 시즌 선발투수로의 등판을 마감한 한수혁.
지금 와서 생각해도 참 잘한 결정이었다.
정규시즌과 WBC까지 거의 전 경기를 풀로 뛴 1년 차 신인.
아무리 강철 같은 몸을 가졌다 해도 무리가 안 갈 수가 없다.
실제로 정밀검진 결과 몸의 회복력과 어깨의 염증 수치 같은 것들이 유의미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나타냈었으니까.
선수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팀의 장기적인 비전을 위해 한수혁을 선발 로테이션에서 제외했고, 그 상태에서 13게임을 훌륭하게 치러냈다.
여러 모로 잘된 결정이었고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런데 이제 딱 한 게임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마음 속 누군가가 자꾸 이대준을 유혹한다.
한수혁을 올리라고, 가장 믿을 수 있는 한수혁을 마운드에 올리라고.
‘후…….’
하지만 안 된다. 이대준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 달콤한 유혹을 과감히 뿌리쳤다.
투수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생명체가 아니다. 기계처럼 마운드에 올린다고 막 공을 던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나 한수혁처럼 투타 겸업을 하는 선수들은 더더욱.
지금 인천 선발 임준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황병호에게 마구잡이로 굴려진 임준영 말이다.
“음…….”
그냥 이대준은 아쉬울 뿐이다.
한수혁의 몸이 조금만 더 버텨줬다면, 그래서 최종전에 그 녀석을 선발로 내세울 수만 있었다면, 그럼 자신은 데뷔 첫해 우승 감독으로 팀 역사에 기록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욕심.
욕심이다. 말 그대로 지나친 욕심이다.
한수혁은 이미 충분히 잘해줬다. 아니, 잘해준 걸 넘어 이 팀의 멱살을 잡아 끌고 여기까지 데려왔다.
이제는 자신들이 할 차례다. 막내가 다 만들어 놓은 판을 잘 마무리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대준의 앞에 오늘 경기에 모든 걸 건 노장이 서 있다.
“만식아.”
“네, 감독님.”
“부탁한다.”
“부탁은요. 시즌 마지막 경기를 맡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어깨가 빠질 때까지 던져보겠습니다, 감독님.”
이제 자신의 시간이 왔음을 깨달은 노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대준의 얼굴에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은 정말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것이다.
차라리 황병호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면 오히려 상대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워리어스에 심리전을 걸다가 이틀 연속 무너진 인천이니 말이다.
하지만 흔들리던 인천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황병호를 내보내고 수석코치가 임시 지휘봉을 잡고, 그리고 2군으로 쫓겨났던 주축 선수들이 모두 복귀하고.
그렇게 다시 전열을 정비한 최강팀 인천이 지금 워리어스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대준이 마음 속으로 그의 영원한 스승 정윤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수십 년간 하신 건가요, 선생님…….’
* * *
이만식, 그리고 임준영.
한때 워리어스의 유니폼을 입고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두 사람이 이제는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정규시즌 우승이 달린 중요한 경기에서 말이다.
워리어스가 다섯 번째 한국시리즈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2016년 그때, 이만식은 이 팀의 젊은 에이스였고, 임준영은 주로 중간계투로 등판했던 1년 차 애송이였다.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지금, 이만식은 예전의 구위를 잃은 채 하루하루를 버티는 노장이 되었고, 임준영은 리그 최고의 투수 자리를 다투고 있다.
‘만식이 형님.’
임준영의 데뷔 시즌, 이제 막 1군에 콜업된 어리버리한 후배를 데리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르쳐주던 선배가 굳은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있다.
사실 잘 모르겠다.
분명 처음 프로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아니,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을 때만 해도 저 형과 평생 야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걸까?
둘 중 한 사람은 평생 갈 상처로 남게 될 이런 경기에서 왜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맞서게 된 걸까?
‘욱신’
황병호 감독이 후배 투수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고, 거기에 항의하다 결국 벌투까지 던지게 되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등판 간격이 하루 단축되었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황병호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먼저 등판일 조정을 요청하고 싶었으니까.
임준영은 그런 선수였다. 자신이 속한 팀을 최고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는 언제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선수.
‘욱신욱신’
하지만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다.
시즌 하반기 계속된 혹사로 임준영의 어깨는 많이 지쳐 있었다. 가끔씩 느껴지는 기분 나쁜 통증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임준영이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1번 중견수 서형주
2번 좌익수 최민석
3번 유격수 한수혁
4번 1루수 조성오
5번 우익수 월터 스미스
6번 포수 장덕수
7번 3루수 안치욱
8번 2루수 이창모
9번 지명타자 김수학
선발투수 이만식
오늘 상대하게 될 워리어스의 선발 라인업이다.
어쩌면 자신의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를 저 선수들과 싸워야 한다.
그것도 정규시즌 우승이라는 아주 커다란 보상을 앞에 놓고 말이다.
지난 13연전 내내 로테이션을 돌리던 이대준 감독은 오늘 베스트 멤버를 총출동시켰다.
시즌 초반만 해도 헐겁기 짝이 없던 워리어스 타선에서 이제는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자꾸만 욱신거리는 어깨, 예전 같지 않은 손의 악력, 그리고 막강한 상대팀 타선.
그럼에도 임준영의 얼굴에는 부담감이 아닌 기분 좋은 긴장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좋아. 한번 해보자, 한수혁.’
임준영은 예감했다.
결국 오늘 경기는 어느 순간 만나게 될 한수혁과의 승부에서 결정 날 거라는 걸 말이다.
한때 워리어스를 책임졌던 에이스가 이제 자신의 뒤를 이어 워리어스를 책임지게 된 후배와의 승부를 준비했다.
* * *
슈우웅
퍼어엉!
“스윙! 아웃!”
1번 서형주에 이어 2번 최민석이 연속 삼진으로 물러 났다.
전광판에 153㎞/h라는 구속이 선명하게 찍혔다.
조금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등판일이 하루 단축된 것이 그의 투구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래서 아마도 임준영이 힘을 조금 빼고 맞춰 잡는 피칭을 할 거라 생각했건만
마운드에 오른 그는 공 하나하나에 전력을 실었고, 10개의 공으로 내 앞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 세웠다.
[3번 타자 유격수 한수혁]“와아아!”
“한수혁!”
“수혁아! 한번 보여줘!”
“이쪽! 이쪽으로!”
인천 외야 관중석이 다시 한번 잠자리채의 물결에 뒤덮였다.
임준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내게 있지 않았다.
포수를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젓고 있을 뿐이다.
뭔가 사인이 맞지 않는걸까?
아니, 저 팀의 주전포수 손영진은 나와의 충돌 후 1군 명단에서 빠졌다.
지금 홈플레이트 뒤에 앉은 백업포수는 스스로 임준영을 리드할 만한 깜냥이 못 된다.
결국 지금 임준영과 사인을 주고받고 있는 건 저 포수가 아닌 벤치다.
잠시 후 그렇게 사인을 주고받던 임준영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궜다.
“타자, 1루로.”
“우우우.”
“이런 시발! 그러고도 네가 에이스야? 여기서 승부를 피한다고?”
“그냥 승부해! 한 대 맞더라도 승부하라고!”
지금 승부하라고 외치는 관중이 원정 나온 워리어스 팬인지, 아니면 인천 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자존심 강한 사람이 나와의 승부를 피했다.
그 어떤 상황에도 도망가지 않던 에이스 중의 에이스가 벤치의 자동고의 사구를 받아들였다.
에이스로서의 자존심보다는 오늘 경기에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마음이 더 크다는 뜻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상당히 크다.
따아악!
“아웃!”
월터가 친 타구가 1루수 정면으로 가며 워리어스의 첫 번째 공격이 끝났다.
서형주와 안치욱이 내 옆으로 다가와 불평하듯 투덜거렸다.
“오늘 저 형 장난 아니네. 체감상 한 160은 되는 거 같던데.”
“너 160짜리 공 쳐본 적은 있고?”
“당연하지! 저번에 그 수원 용병…….”
“안치욱, 서형주.”
“왜?”
“오늘 에러 하나라도 하는 놈은 진짜 입에서 토가 나올 때까지 펑고 받게 해줄 거다.”
“뭔 소리야, 갑자기.”
“말 그대로야. 긴장하라는 뜻이야. 오늘 경기 이기려면 말이야.”
* * *
슈웅
퍼엉
“스트라이크!”
황병호에게 항명을 하다가 2군으로 쫓겨갔던 인천의 주전선수들이 모두 1군에 복귀했다.
지난 보름여간 2군에서 이를 박박 갈아온 중견수 강우찬이 이만식의 초구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시속 135㎞/h.
전광판에 찍힌 구속을 본 이만식이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네.’
시즌 초반만 해도 140은 나오던 구속이 어느새 이만큼이나 떨어졌다.
팔꿈치의 부상 탓이라고 애써 자위를 해보지만 사실 이만식은 알고 있다.
설사 토미 존 수술을 받고 난 후에라도 자신이 다시 강속구를 던질 날은 없을 거라는 걸 말이다.
데뷔 초반 150에 가까운 포심과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던지던 우완 정통파 투수가 이제는 135㎞/h짜리 포심과 싱커로 상대의 눈을 현혹해야 하는 서글픈 신세가 되었다.
슈웅
욱신
“볼.”
두 번째 공을 던진 순간 또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통증 자체야 달고 산 지 워낙 오래된 터라 이제 참을 만하지만 그때마다 밀려오는 공포가 문제다.
여기서 그대로 쓰러지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게 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식으로 그라운드를 떠난 선배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만식의 공포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크고 선명했다.
슈웅
따아악!
“파울!”
존 밖으로 벗어나는 포심을 그냥 지켜본 상대 타자가 이번에는 존 안으로 들어오는 싱커를 받아쳐 외야로 날려보냈다.
다행히 역회전이 걸리며 파울 라인을 벗어났지만 솔직히 가슴이 철렁했다.
이번 시즌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어느 정도 몸쪽 승부가 가능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제구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기에 타자 몸쪽으로 파고드는 140㎞/h짜리 포심으로도 충분히 카운트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그 공을 던지지 못한다.
지금 그가 던질 수 있는 무기라고는 135㎞/h가 간신히 나오는 포심과 118㎞/h 싱커, 그리고 110㎞/h 체인지업 정도가 전부다.
간간히 슬라이더와 커브를 섞어 던질 수는 있겠지만 그때마다 불쾌한 통증을 참아내야 한다.
지금이라도 투수를 바꿔 달라고 해야 하는 걸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 공 하나를 던질 때마다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른다고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대신 던질 투수가 없다.
그나마 사흘 전에 던진 강동하가 출격 대기 중인 상태이지만 선수 생활 내내 이기는 것보다는 그냥 버티는, 그러다가 지는 경기에 익숙한 그에게 이런 중요한 경기를 맡기는 건 무리다.
역시 나뿐이다. 지금은 내가 해야 한다.
이를 앙 다문 이만식이 다시 한 번 혼신의 힘을 다해 타자 몸쪽으로 포심을 집어넣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136㎞/h짜리 포심이 포수미트를 향해 날아간다.
하지만,
따아악!
강제로 쫓겨난 2군 구장에서 칼을 갈아온 강우찬이 그 공을 제대로 받아쳤다.
맞자마자 안타임을 알 수 있는 강하고 빠른 타구.
3루수 옆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는 라인드라이브 타구에 강우찬이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때,
척
“허어얼…….”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진짜? 저게 잡혔다고? 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혹은 외야에서 스마트폰으로 경기를 보던 관중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중계 카메라 앵글을 완전히 벗어나 있던 한수혁이 어디에선가 튀어나와 그 안타성 타구를 그대로 낚아챈 것이다.
타격이 시작되자마자 본능적으로 그 방향으로 스타트를 끊었던, 그러고도 다이빙까지 시도한 후에야 간신히 타구를 처리한 한수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순식간에 안타 하나를 도둑맞은 강우찬이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고, 시작하자마자 무사 주자 1루 위기에 몰릴 뻔했던 노장 투수는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올리며 한수혁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직감했다.
오늘 경기에서는 단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걸, 그리고 어느 한순간에 순식간에 승부가 결정될 거라는 걸.
경기를 하는 선수도, 그리고 지켜보는 팬들도 단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경기.
그렇게 순식간에 5이닝이 지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