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6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66화(167/412)
#166. 저를 올려주십쇼
측정 방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150㎞/h로 던진 야구공이 포수 미트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이 대략 0.43초 정도다.
그럼 135㎞/h짜리 공은?
놀랍게도 0.47초 정도다. 불과 0.04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150㎞/h를 던질 수 있는 투수와 135㎞/h가 한계인 투수 간의 몸값 차이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니, 후자의 경우 특수한 몇몇 케이스를 제외하면 1군에서 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구속만으로 투수를 평가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건 아니다. 구속 외에도 제구력과 구종, 거기에 경기 운영 능력 등 다양한 능력치가 요구된다.
하지만 이렇게 가정해 보자.
각각 최고 구속이 150㎞/h와 135㎞/h인 두 투수가 비슷한 제구력과 구종 구사 능력을 갖고 있다면?
그렇다면 이 두 투수의 가치는 비슷할 수 있을까?
여기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야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게 분명하다.
전자의 경우 적어도 KBO에서는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가 될 만한 투수일 것이며, 후자는 1군 무대에 발을 딛는 것도 힘든 그런 투수일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오늘,
워리어스와 레인저스 간의 3차전이 펼쳐지는 이곳 인천 경기장에서만큼은 예외였다.
따아아악!
“이익!”
5회말, 인천의 공격.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5번 민주현이 이만식의 체인지업을 제대로 받아쳤다.
맞는 순간 홈런이라 생각될 정도로 엄청나게 잘 맞은 타구가 중앙 펜스를 향해 날아갔다.
“우아아아!”
“가라! 가! 제발!”
인천 관중들이 내뱉는 함성 소리에 구장 전체가 들썩거리던 그때,
터억
“아악! 뭐야!”
“저게 말이 돼!”
“야! 물어내! 홈런 물어내라고!”
워리어스의 중견수 서형주가 중앙 펜스를 한 발로 딛고 뛰어올라 넘어가는 타구를 낚아챘다.
“아웃!”
“우아아아!”
가슴을 졸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워리어스 팬들이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엄청난 목소리로 서형주의 이름을 외쳤다.
“서형주! 네가 국내 최고 중견수다!”
“서형주! 시발! 멋있다! 존나 멋있어!”
언제나 그렇듯, 관중들의 함성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걸 세상 무엇보다 즐기는 서형주가 두 눈을 꼭 감고 그 순간을 음미했다.
숨 쉴 여유도 없었던 두 팀 간의 공방전이 5회말까지 계속되었다.
스코어 0 대 0.
수술을 미루고 마지막까지 팀을 위해 혼신을 다한 노장 이만식이 놀랍게도 5회말까지 인천의 강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물론 그 과정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인천의 에이스 임준영이 한수혁을 철저히 피하며 워리어스 타선을 무실점으로 묶어 놓는 동안 이만식은 매회 위기를 맞으면서도 그 위기를 기적적으로 넘겼다.
수비의 도움이 컸다.
시즌 초반만 해도 리그 최하위권이라 평가받던 워리어스의 수비력은 이제 인천, 수원과 함께 리그 최고를 다툴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왔다.
그런 야수들이 이를 악물고 이만식의 뒤를 받쳤다.
한수혁과 이창모가 막아낸 안타성 타구가 무려 4개, 거기에 방금 전 서형주는 홈런이 될 뻔한 타구를 중견수 플라이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야, 고맙다. 우리 막내들! 어? 창모야, 너도 정말 고맙다.”
“별 말씀을. 방금 타구는 어차피 잠실이었으면 그냥 중견수 플라이였어요, 형님.”
“그래도 그 타구를 너처럼 처리할 수 있는 외야수가 몇 명이나 있겠냐. 이야, 내가 말년에 진짜 야수 덕 좀 보네. 고맙다. 나도 더 힘내볼게.”
5회까지 78개의 공을 던진 이만식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서형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투구수가 적은 건 그의 공이 위력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만만해서다. 인천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타격을 해준 덕에 투구수가 적었을 뿐이다.
이대준 감독이 직접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만식아, 이제 바꿔줄까?”
“감독님.”
“응?”
“올 시즌에 등판 한 경기 중 오늘이 제일 컨디션이 좋은 것 같습니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1회 딱 한 번 136㎞/h까지 나왔던 구속은 5회에 들어 134㎞/h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싱커 각이 괜찮기는 했지만 나머지 변화구는 승부구로 쓰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지금 이만식이 마운드에서 무실점으로 버티고 있는 건 오로지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 그리고 그것에 반응한 팀 동료들의 도움 덕분이다.
‘하지만 그런 게 바로 야구지.’
이대준 감독 역시 알고 있다.
그런 게 바로 야구라는 걸 말이다.
빠르고 정확한 공을 던지는 것만이 투수의 최우선 덕목이라면 180㎞/h까지 던질 수 있는 피칭머신을 마운드에 세워놓으면 그 기계가 최고의 투수가 되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야구는 팀 스포츠이며,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팀원들 간의 교감과 협동, 그리고 승리에 대한 열망이다.
이만식이 지금 저렇게 마운드에서 버티고 있는 건 팀 동료들 덕분이고, 워리어스가 레인저스와 대등하게 맞서고 있는 건 그런 이만식의 투지가 팀원들의 사기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어쩌면 오늘 이 경기가 이만식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다.
아니, 그 누구도 입에 담고 있지는 않지만 혹시나 수술과 재활이 실패로 돌아가면 영영 마운드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대준은 함부로 그를 마운드에서 내릴 수 없었다.
적어도 오늘 경기만큼은 이 노장에게 맡기고 싶었다.
설사 그 대가로 정규시즌 우승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놓친다 해도 말이다.
“만식아, 조금이라도 이상한 거 같으면 바로 내릴 거다. 내 말 이해했지?”
감독의 말에 이만식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 * *
[You can learn little from victory. You can learn everything from defeat.]승리하면 작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메이저리그 초창기 전설적인 투수이자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된 5인 중 하나인 크리스티 매튜슨이 남긴 말이다.
데뷔 이후 무려 17년간 뉴욕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징집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병으로 참전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오염지대 개척 임무를 수행하던 중 화학가스를 흡입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던 이만식은 순식간에 크리스티 매튜슨이라는 사내에게 빠져 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말들을 좌우명처럼 삼으며 살아왔다.
승리하면 작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을 곱씹으며,
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나는 결코 야구든, 인생이든 비겁하지 않았다’는 유언을 되새기며,
선수 생활이 힘들 때마다 그 말들을 떠올리며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쩌면 그의 생애 가장 중요한 경기일지도 모르는 바로 이 순간, 이만식은 자신의 신조와도 같았던 그 말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래,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도 있을 거다. 실제로 이만식은 워리어스가 약팀이 된 후 수많은 패배를 겪으며 많은 걸 배워왔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몰라도 저 기특한 후배들, 앞으로 패배가 아닌 승리를 위해 나아갈 후배들에게는 그런 패배의 아픔을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를 악물고 던졌다.
6회말까지 109개의 공을 던진 이만식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이대준은 몇 번이고 그를 강판시키려 했지만 아직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고 버티는 노장을 함부로 마운드에서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지금 여기서 저를 강제로 내리시면 평생 원망할 겁니다, 감독님.”
“만식아, 이 자식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팀을 십수 년간 지켜온 이만식에게는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괜찮겠지. 아니, 제발 괜찮기를.
부디 저 노장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사히 마운드에서 내려올 수 있기를.
이대준이 할 수 있는 건 어디 있을지 모를 야구의 신에게 비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7회말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0 대 0인 상황에서 다시 이만식이 마운드에 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확연히 지쳐 보이는 얼굴, 이마를 타고 끝없이 흘러내리는 땀.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만식의 데뷔 시절을 기억하는 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관중들의 응원에 다시 한 번 힘을 받은 이만식이 선두 타자 강우찬에게 초구를 던지던 그때,
두둑
“끄윽!”
“만식아!”
“형!”
“끄아아아!”
난생 처음 듣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팔꿈치에서 엄청난 통증이 전해졌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수혁이 쓰러진 이만식을 안고 외쳤다.
“앰블런스! 빨리 앰블런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이만식의 팔꿈치에 무슨 일인가가 생겼다는 걸 말이다.
“비켜요! 비켜!”
그라운드 안으로 앰블런스가 들어오고 이만식이 실려 나가며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라운드 정비를 위해 선수들이 잠시 덕아웃으로 물러 났다.
선수와 감독, 그리고 코치, 모두의 눈동자가 걱정과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정규 시즌 우승을 결정 지을 마지막 경기.
하지만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건 이 경기의 승패가 아닌 이만식에 대한 걱정이었다.
“…다음에 누굴 올리겠습니까, 보스? 킴을 준비시킬까요?”
“잠시만, 잠시만요.”
오늘 이만식을 마운드에 올린, 그리고 7회까지 그를 끌어내리지 못한 이대준이 밀려오는 죄책감에 손을 덜덜 떨었다.
그 순간 이만식을 따라 나섰던 트레이너 중 하나가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만식이는? 만식이는 병원으로 출발한 거야?”
“네, 바로 저희 지정병원으로 갔습니다. 최 트레이너가 동행했습니다.”
“상태는, 상태는 어떤데?”
“자세한 건 병원에 도착해 봐야 알겠지만 일단 통증은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아, 감독님에게 꼭 전해달라는 말이…….”
“만식이가?”
“네, 이만식 선수가 모든 건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고, 그리고 가능하면 오늘 이 경기가 패배로 끝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전해달라더군요.”
“…그 자식이.”
말문이 막힌 이대준이 주먹을 꽉 쥐며 덕아웃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선발투수 이만식이라고 쓰여 있는 라인업, 바로 몇 시간 전 자신이 선택하고 작성한 라인업을 말이다.
어쩌면 선수 생활이 위험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고작 한다는 말이 자신에 대한 걱정, 그리고 후배들에 대한 격려라니.
이만식에게 평생 원망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라도 끌어내렸어야 했던 걸까?
내가 틀렸던 걸까?
그리고 경기는? 대체 누굴 올려야 하지?
상대팀 에이스 임준영이 완벽한 투구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누굴 올려 맞서야 하는 걸까?
김두영? 아니면 마무리 양기철?
7회와 8회, 9회, 만에 하나 승부가 안 나면 10회와 11회, 12회.
그 긴 이닝을 두 명의 투수로 버틸 수 있을까?
얼마나 신경을 집중했는지 머리가 지잉 울리고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다.
없다. 분하지만 지금 워리어스에게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멍청하게도 나는 이런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카드를 준비하지 못했다.
이대준이 다시 한 번 밀려오는 죄책감과 절망감, 그리고 부끄러움에 온몸을 떨던 그때,
“제가 던지겠습니다, 감독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흥분하고 절망하는 상황에서 마치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침착한, 하지만 단단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대준뿐만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움직였다.
“3이닝 정도는 충분히 던질 수 있습니다. 아니, 던져야 합니다. 저를 내보내 주세요.”
“수혁아…….”
불과 1년 차에 팀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그리고 다른 선수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WBC에 참가해 대한민국을 세계 야구챔피언으로 만든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3이닝은 제가 막아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지난 마지막 상담에서 한수혁이 떠올렸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 두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사는 놈인 줄 알았건만,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녀석의 얼굴에 떠오른 그 작은 공포의 감정을 이대준은 기억한다.
그러던 녀석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다.
“걱정 마세요. 저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3이닝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쉬는 동안 잘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니 절 내보내 주세요, 감독님. 부탁드립니다.”
이대준은 차마 한수혁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