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6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67화(168/412)
#167. 마지막 공 하나
‘이런 빌어먹을 애송이! 당장 거기서 안 내려와?’
‘수혁아! 이 멍청한 놈아! 왜 그렇게 무리를 하는 건데? 올해만 야구하고 말 거야?’
어디선가 제이콥과 성훈이 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지금 이 순간 마운드에 오른 날 보며 그 둘은 분명 그렇게 소리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괜찮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겁쟁이도 아니다.
물론 내 어깨나 몸 상태가 시즌 초처럼 완벽한 건 절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정상 컨디션의 85~90% 정도로 봐야 할까.
어깨에서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불편함, 그리고 선발 등판 후 다시 몸이 회복되기까지의 간격이 생각보다 조금 길어진다는 제이콥의 데이터.
그런 것들로 인해 올 시즌 내 선발 등판이 중단되었고, 나는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
물론 나 역시 동의한 것이다.
모든 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깃들어 있던 공포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 삶에서 두 번의 어깨 부상을 당했다.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한 번, 그 일로 나는 100마일이 넘는 강속구를 잃었다.
그리고 시애틀에서 클리블랜드로 팀을 옮긴 후 또 한 번, 그 두 번째 부상으로 나는 마운드에서 영영 내려와야 했다.
그래, 그랬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자꾸만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나를 끝없는 절망으로 몰아넣던 그때의 그 지독한 공포가 떠오른다.
그것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플레이!”
이만식이라는 베테랑이 보여준 투혼, 열정, 그리고 팀에 대한 헌신,
그것을 보며 나는 그간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지난 삶에서 내가 빅리그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한번 야구라는 스포츠를 할 수 있게 된 건,
그건 나 역시도 이만식만큼이나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선수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를 나노 단위로 분석할 수 있는 기계에 몸을 맡기고, 거기에 맞춰 훈련부터 실제 플레이까지 모든 걸 계획하고 수행하는 현대의 야구.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하기는 하다.
하지만 야구는 인간이 하는 일이다.
가끔은 무모하다 싶은 일에 뛰어드는 도전이 필요하고, 거기서 뭔가 문제가 생길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런 게 야구다. 아니, 스포츠다.
나는 그 사실을 꽤 오래 잊고 있었다. 과거에 당했던 부상의 그림자에 짓눌려 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다.
만에 하나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매뉴얼에 따르면, 철저히 그것에만 따르면 부상을 백 프로 피할 수 있을까?
결국 정답은 없는 거다.
운명을 알 수 있는 건 오직 신뿐이다.
그리고 그 신은 내게 두 번째 기회를 선물해 주었다.
나는 믿는다.
내가 그동안 단련한 이 완벽한 육체를, 그리고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내 마음을.
그렇기에 나는 이 마운드를 지킬 것이다.
오랜만에 잡은 야구공,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단단하게 느껴지는 마운드의 감촉.
그것들을 느끼며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연습 투구수가 적어 상황은 내게 더욱 불리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던진 공의 결말이 어떻게 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슈우우웅
퍼어어엉!
“스트라이크!”
전광판을 돌아보았다.
163㎞/h, 분당 회전수 2,750.
역시 평소보다는 조금 못한 수치.
하지만 괜찮다.
나는 이 공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
* * *
슈우웅
파앙!
“스트라이크! 아웃!”
– 아아,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7회말 선발투수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마운드에 오른 한수혁 선수가 인천의 1, 2, 3번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이로써 스코어는 여전히 0 대 0, 올 시즌 정규시즌 1위를 누가 차지할지 아직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 저는…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 어떤 생각이신가요?
– 1982년 출범한 이래 단 한 번도 국내 최고 인기스포츠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한국 프로야구가 최근 몇 년간은 축구에 밀려 있던 게 사실이잖습니까?
– 네, 확실히 관중 숫자나 시장 규모만 놓고 보면 이제는 축구보다 위라고 보기는 힘들죠.
– 맞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우리 야구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급격하게 커진 시장 규모에 따라가지 못한 선수들의 실력, 그리고 그로 인한 국제대회에서의 경쟁력 상실, 뭐 이유는 아주 많았죠.
– 얼마 전 특집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 네, 그런데 사실 진짜 문제는 그런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한국 프로야구는 스포츠가 아니라 배부른 돼지들의 레저에 가깝다고.
– 음, 저도 들어는 봤습니다.
– 정말 안타까운 건 그 누구도 그런 비아냥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예전 같으면 어떻게든 기량을 끌어 올려 더 큰 무대로 나아가려 애쓰던 선수들이 그대로 국내에 주저앉았습니다. 어차피 국내에서 대충 뛰어도 해외보다 더 많은 돈을 주거든요.
– 으으음…….
– 돈 많은 신생 구단의 합류, 10개 구단 간의 과도한 자존심 경쟁, 그런 여러 이유들이 겹치며 선수들은 계속 나태해지고 해이해져만 갔습니다. 팀이 대패하고 있는 와중에 덕아웃에서 실실 웃고 있는 자기 팀 선수들을 보면서 팬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 위원님…….
– 자,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한국 야구판이 제대로 썩어 문드러졌다는 사실을요. 지난 WBC에서도 한수혁 선수가 없었다면 우리는 또 예선에서 짐을 쌌을 지도 모른다는 걸요.
– 알았으니 조금만 진정을…….
– 그런데 보십쇼! 지금 저 선수들을 보십쇼! 사흘밖에 쉬지 못한 에이스가 팀의 우승을 위해 공 하나하나에 혼을 담고 있습니다. 거기에 맞서 다음 시대를 대표할 새로운 에이스가 완전치 않은 몸을 이끌고 거기에 맞서고 있습니다! 이걸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여러분, 한국 프로야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 * *
슈웅
파아앙!
“스윙! 아웃!”
“…뭐 진짜 저런.”
“인간이 맞긴 한 거야?”
7회 세 타자에 이어 8회, 또다시 세 명의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운 한수혁이 냉기가 풀풀 흐르는 얼굴을 한 채 마운드를 내려갔다.
6타자 연속 삼진을 당한 인천 덕아웃 여기 저기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처음 당하는 일도 아니건만, 새삼 한수혁에 대한 공포가 솟아오른다.
선발투수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급하게 마운드에 오른 놈이 어깨가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도 타자들을 갖고 논다.
차라리 169㎞/h짜리 포심에 삼진을 당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컨디션이 완전치 않은 1년 차 신인의 완급 조절에 농락당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오늘 한수혁은 단 한 번도 165㎞/h가 넘는 공을 던지지 않았다.
아니, 못 한 건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구속은 조금 떨어졌지만 한수혁은 한수혁이었다.
그가 던지는 160㎞/h 내외의 포심과 완벽한 변화구, 그리고 칼날 같은 제구력에 인천 타자들의 배트가 허공에서 춤을 췄다.
“진짜 괴물은 괴물이구나…….”
8회말까지 이어진 0의 행렬,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여기 인천의 마운드에도 한수혁 못지 않은, 그가 등장하기 전 이 리그를 대표했던 투수인 임준영이 버티고 있다는 점이다.
이만식이 부상으로 실려 나간 것에 임준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신인 시절, 마치 친형처럼 자신을 돌봐 주던 선배의 부상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임준영은 프로였다. 당혹감 대신 책임감이 그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경기를 마무리 짓고 선배에게 달려가리라, 그렇게 마음먹은 임준영이 혼신을 다한 투구로 워리어스 타선을 잠재웠다.
8회까지 101개의 공을 던지며 워리어스 타선을 꽁꽁 묶은 임준영.
운도 따랐다.
한수혁을 세 번 연속 고의사구로 내보냈고, 다행히도 그 앞뒤 타자를 잘 처리하며 결정적인 위기를 막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운도 이제는 다한 듯하다.
9회초, 선두타자 한수혁으로부터 시작되는 워리어스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여기서 한수혁을 또 볼넷으로 내보내면 무사 주자 1루 상황에서 4번 조성오, 5번 월터 스미스, 6번 장덕수를 상대해야 한다.
아무리 임준영이라 해도 100개가 넘는 공을 던진 상태에서 그 세 타자를 상대하는 건 힘들다.
그런 상황을 정확히 캐치한 인천의 수석코치가 임준영에게로 다가왔다.
황병호가 지휘봉을 잡자마자 2군으로 쫓겨났다 다시 임시 감독으로 돌아온 그가 임준영에게 말했다.
“준영아, 이걸 어쩌냐.”
“네? 코치… 아니, 감독님. 무슨 말씀이신지?”
“내 머리는 널 교체하라고 하는데, 내 가슴이 그걸 반대하네.”
“…….”
“그리고 저기 우리 팬들도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하얀색 인천 저지를 맞춰 입은 팬들이 목이 터져라 임준영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눈가를 살짝 찡그린 수석코치가 말했다.
“나는 구용식 감독님에게 그렇게 배웠다. 가끔은 데이터보다는 감독의 직감을, 팬들의 열망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라고. 그러니까 나가라. 오늘 네가 시작한 경기, 네가 끝내. 단, 조금이라도 힘들면 바로 말하고.”
감독의 말에 임준영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절 내려 보내셨으면 평생 원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활활 타올라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독님.”
* * *
처음 임준영이라는 사내를 만났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감했던 것 같다.
워리어스의 우승을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이 사내가 될 거라는 것,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나설 거라는 것 말이다.
그래서일까, 팀의 정규시즌 우승이 걸린 이 중요한 경기, 그것도 9회초에 그를 상대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방금 전 이만식 선배가 실려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팔꿈치 인대 파열.
어렵게 버텨오던 낡은 인대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끊어진 것이다.
이로써 이만식 선배는 당분간 그라운드를 떠나 수술과 재활에만 전념해야 한다.
설사 오늘 경기에서 워리어스가 승리한다 해도 가을야구에 함께할 수 없다.
8년 만에 찾아온 팀의 가을야구를 병실 침대에 누워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아주 어쩌면, 어쩌면 다시는 마운드에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플레이!”
그 사실에 충격을 먹은 건 우리 선수들만이 아닌 것 같다.
이만식 선배가 마운드에 쓰러진 순간 가장 먼저 뛰어나온 건 다름 아닌 임준영이었다.
신인 시절부터 자신을 아껴주고 가르쳐준 선배의 부상이 그에게 큰 상처가 된 듯하다.
그럼에도 그는 괴물이었다. 과연 이 나라를 대표하는 투수다웠다.
에이스로서의 자존심과 나에 대한 승부욕을 참아 누르면서까지 우리 타선을 완벽하게 찍어 눌렀다.
베스트 라인업이 갖춰진 상태에서의 공격력만큼은 리그 수위를 다툴 정도로 성장한 워리어스 타선을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팽팽한 승부를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9회초 무사 상황.
과연 여기서도 나를 거를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운드 위에 선 임준영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다.
그가 지금 나와의 마지막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본인의 선택일 수도, 혹은 벤치의 지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사석에서는 제법 괜찮은 선후배 사이인 우리는 이제 이번 시즌 1위 자리를 놓고 마지막 승부를 하게 되었다.
스르륵
이닝이 거듭되며 조금은 쳐졌던 그의 키킹 각도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100개가 넘는 공을 던진 그의 온몸에서 눈에 보일 듯한 투기가 발산된다.
나 역시도 배울 점이 있는, 내가 직접 본 투수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멋진 투구폼을 가진 임준영의 손끝에서 하얀 공 하나가 발사되었다.
그와 동시에 내 배트가 힘차게 앞으로 뻗어 나갔다.
따아아아악!
관중들의 함성과 야유가 순식간에 인천 구장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