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6화(17/412)
#16. 역사에 기록될 첫 타석
모든 조직이 그렇지만 외부에서 보는 것과 내부에서 보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선수들과 함께 스프링캠프를 치르다 보니 현장의 보고서나 스카우팅 리포트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다양한 면모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내가 구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분을 감추고 선수단 사이에 섞여 있다는 건 여러 모로 편리한 일이다.
잠깐 시간을 내서 우리 팀 투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일단 용병 두 명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다른 팀 에이스급들에는 아주 살짝 못 미치지만 그래도 내 피 같은 달러를 들여 데려온 소중한 자원들이다.
지난 시즌에 이어 재계약에 성공한 라이언 스타크는 150km/h에 달하는 포심과 커브,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다.
아직 나이도 한창이고 기량도 점점 좋아지고 있어 본인은 메이저리그 복귀를 희망하고 있다.
올해로 삼 년 연속 워리어스 유니폼을 입게 된 브룩스 파커는 140km/h 초반대의 포심과 그보다 살짝 느린 투심, 그리고 싱커를 주 무기로 하는 땅볼 유도형 투수다.
지난 시즌까지 워리어스 내야가 워낙 개판이었던지라 여러모로 고생을 한 것 같다.
그 외에는 토종 에이스인 이만식 선배와 4선발로 주로 뛴 정태호 선배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고, 중간 계투 중에는 볼만 빠른 홍영식 선배, 그리고 마무리는 멘탈이 불안정한 최정수 선배다.
자, 결론을 말해보자면···
여러모로 아쉽다.
상당한 수준의 선수 보강이 필요하다.
다른 건 몰라도 경기 중반을 책임져줄 든든한 계투진의 합류가 절실하다.
서울로 돌아간 박재철 단장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가만··· 이 시점에서 혹시 다른 팀 2군에 처박혀 있는 원석 같은 거 없을까?
생각해내자. 한수혁··· 예전 기억을 잘 되짚어봐.
······
젠장, 한국야구에도 관심 좀 가질 걸 그랬나.
나중에 좀 더 고민해보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겠지. 일단 넘어가고.
“다들 좋은 아침이다. 오늘 시합 준비는 다들 잘 했겠지?”
아무튼 스프링캠프가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드디어 다른 팀과의 첫번째 연습경기가 잡혔다.
우리 팀과 마찬가지로 이곳 아리조나에 스프링캠프를 차린 수원 커맨더스.
10개 구단 중 가장 마지막에 리그에 참여한 막내이자,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지난 시즌에도 3위를 기록한 그들이 바로 우리의 첫번째 연습경기 상대다.
기록을 살펴보니 지난 시즌에는 우리 팀을 상대로 14승 2패의 성적을 거뒀다. 저 팀이 3위를 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게 바로 워리어스라는 소리다.
“자, 오늘 선발 라인업이다. 다들 확인해봐.”
연습경기를 두 시간여 앞둔 시간, 이대준 감독이 선발들의 이름이 적힌 라인업을 덕아웃에 턱하니 붙여 놓았다.
1번 중견수 정기호, 2번 2루수 이창모, 3번 유격수 한수혁, 4번 우익수 맥스 워커, 5번 지명타자 안치욱, 6번 1루수 조성오, 7번 좌익수 장기호, 8번 포수 황성민, 9번 3루수 송기태. 선발투수 정태호.
성훈이 형이 제대로 전달은 했나 보다.
요 며칠 사이 내 조련 덕에 스윙이 많이 좋아진 안치욱이 지명타자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3번 유격수 자리에 서게 되었다.
3번이라···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타순은 2번이다.
1번은 앞에 주자가 없어 조금 재미가 없고, 2번이 그 다음으로 많은 타석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타석 수는 곧 홈런 수에 비례한다는 게 내 야구철학 중 하나다.
어쨌든 오늘 나는 3번 유격수다.
“어서오세요. 선배님.”
“감독 취임 축하드립니다. 이대준 감독. 오늘 좋은 경기 부탁해요.”
수원 커맨더스 선수단이 구장에 도착했다.
어차피 그들이 사용중인 구장과 이곳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인 만큼 몸도 풀 겸 그냥 걸어온 모양이다.
이대준 감독이 코치들을 데리고 상대팀 구용식 감독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백인과 흑인, 거기에 라틴계까지 섞인 다국적 연합군에 둘러싸인 상대 감독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과 하나하나 악수를 나눴다.
수원 커맨더스라는 팀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세이버매트릭스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 야구를 즐겨하는 팀이라 할 수 있겠다.
기록원 출신인 단장과, 전력분석원 출신의 감독만 봐도 딱 견적이 나온다.
그런 팀답게 선수들 역시 상당히 효율적인 야구를 추구한다.
출루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장타에 열광하며, BABIP을 신봉한다.
수원이라는 연고지와 이런저런 특성들이 맞물려 성적에 비해 인기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여러 모로 우리 팀보다는 한수 위에 있는 전력임에 확실하다.
최근 4년간 우리 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래서 더욱 지기가 싫다. 아무리 연습경기라고 해도.
“안치욱, 이리 와바.”
“왜?”
“오늘 내기다. 누가 많이 출루하는지.”
“출루 내기?”
“그래, 뭐가 어찌되든 누가 더 많이 출루하는지.”
“음··· 좋아. 한 번 해보자고.”
“헤이, 친구들. 무슨 일이야? 뭔지 몰라도 나도 끼워줘.”
“좋아, 맥스, 이리 와봐. 오늘 저녁 내기다. 지는 놈이 이 근방에서 제일 크고 비싼 스테이크를 사는 거야.”
“무슨 내기인데?”
“누가 가장 많이 출루하는지.”
“오···”
성훈이 형을 통해 코치들에게 안치욱에 대한 조련 지시가 내려간 듯하다.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스윙이 날카로워지는 게 바로 그 증거다.
물론 내가 이렇게 바로 옆에서 당근과 채찍 전략으로 길들이기를 하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안치욱이라는 타자의 타격 매커니즘은 정확한 레벨 스윙에서 오는 빠르고 간결한 타구에 있다 할 수 있다.
발사각이 다소 낮아 장타가 나오기는 힘들지만 워낙 타구 속도가 빨라 야수들이 처리하기는 힘든, 그래서 안타를 양산해낼 수 있는 그런 타입이다.
이런 타자들은 어깨에 힘을 빼고 간결한 스윙을 해야 타석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오늘 내가 제안한 출루 내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빠지고 본래의 타격감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은근히 바쁘다.
이거 코치 연봉까지 받아야겠는데.
아, 어차피 그것도 내 돈인가?
“수혁아, 애들하고 무슨 얘기한 거냐?”
“아닙니다. 감독님. 그냥 열심히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 오··· 역시.”
뭐가 역시인지 모르겠지만 이대준 감독이 기특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음료수를 내밀었다.
체질상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닌데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음료수를 내민다.
이걸 매번 다 마시는 것도 상당히 고역이다.
자, 어쨌든 이제 경기다.
목표는 전 타석 홈런이다.
응? 전 타석 출루가 목적 아니냐고?
홈런도 출루다.
* * *
“흐으음.”
“감독님?”
“아, 미안.”
“아닙니다. 애들 다 모였습니다.”
서울 워리어스와의 연습경기를 앞둔 수원 커맨더스의 덕아웃.
벌써 4년째 이 팀을 이끌고 있는 구용식 감독이 진중한 눈빛으로 자신의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자, 지난해 우리가 14승 2패로 일방적으로 눌러줬던 팀이다. 설마 루키 하나 들어왔다고 그 압도적인 우위가 뒤집히지는 않겠지? 연습경기이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승리한다. 이상.”
“네!”
간단하게 이야기를 끝낸 구용식 감독이 오늘 선발로 나서게 될 팀의 좌완 에이스 최경재를 불러 조용히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경재야.”
“네.”
“경제를 살리자.”
“네?”
“크흠, 아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먹히지 않는다.
갑자기 떠오른 아주 오래된 아재 개그를 재빨리 치워버린 구용식 감독이 다시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기 한수혁 말이야.”
“네, 감독님.”
“기 좀 죽여 놓자.”
“네?”
“꼴찌 팀한테 뭐 그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너만 보면 오줌 찔끔찔끔 지리게 만들어놔.”
“음··· 네, 감독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수원의 좌완 에이스이자 국가대표 선발투수이기도 한 최경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한수혁이 아무리 유망주라 해도 고작 신인 하나가 더해진 것만으로 사정이 크게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워리어스는 한수혁 외에 제대로 된 FA나 외국인 보강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야구를 감이 아닌 숫자로만 보는 구용식 감독은 근거 하나 없는 감 대신 숫자를 믿기로 했다.
고교시절 한수혁이 보여준 기량과 이를 기반으로 예측한 성적, 그것이 워리어스라는 꼴찌팀에 더해질 경우의 시너지까지.
이런저런 계산을 해본 결과 올 시즌 워리어스와의 경기에서 단 1승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서는 한수혁을 완전히 눌러 놓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최경재는 그런 감독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웃!”
“씨발!”
최경재가 불과 3구만에 워리어스 1번 타자 정기호를 삼진으로 돌려 세웠다.
바깥쪽에 꽉 찬 포심에 배트 한 번 내밀지 못하고 당한 정기호가 욕설을 내뱉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툭하면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키고, 경기장 밖에서도 몇 차례 폭력 사건에 연관된 이 다이너마이트같은 중견수의 심기를 건드릴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덕아웃에 배트를 집어 던진 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주변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이대준 감독의 심기를 건드렸다.
자신이 누군가.
현역 시절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던, 다른 팀 선배들조차 쩔쩔매던 벤치클리어링의 1인자가 바로 자신 아닌가.
한 번은 참아 주기로 했다. 정기호의 저 건방진 행동을 말이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엄한데 화풀이를 하면 제대로 손을 봐줄 것이다.
‘음’
정기호가 삼진으로 물러난 가운데 타석에 들어선 2번 타자 이창모가 첫 번째 공을 잘 골라냈다.
이대준 감독이 생각하기에 이 팀에서 가장 아쉬운 선수 중 하나가 바로 저 이창모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만 해도 3할에 두 자리 수 홈런과 도루를 밥 먹듯이 하던 놈이 거기서 고작 2년 실패를 맛봤다고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다.
물론 무릎부상 때문에 예전 같은 기동력은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정신만 차리고 열심히 하면 3할 정도는 가볍게 쳐줄 수 있는 놈이다.
하지만 한 번 무너진 멘탈을 다시 세우는 건, 이미 말라비틀어진 의욕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대준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 스스로 일어날 날을 기다리면서.
“아웃!”
볼 두 개를 잘 골라낸 이창모가 세 번째 공을 제대로 받아쳤지만 상대 유격수의 호수비에 걸려 아웃당하고 말았다.
상대팀 선수이기는 하지만 정말 좋은 수비수다. 수원이 상위권을 유지하는데 있어 공헌도가 아주 큰 선수 중 하나다.
만약 한수혁이 없었다면 정말 부러웠을 거다.
유격수에 따라 팀의 내야 수비 안정감이 오락가락하는 건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전혀 부럽지 않다.
현재 리그 최고의 유격수라는 대구 버팔로스의 이태웅을 준다고 해도 한수혁과는 안 바꿀 거다.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유망주 한수혁.
그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지는, 워리어스라는 황량한 사막에 피어난 꽃이자, 장래 이 팀의 에이스가 될 그 기특한 놈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한수혁!”
“네?”
한수혁의 이름을 불러 시선을 잡아 끈 이대준 감독이 크게 스윙을 하는 시늉을 하며 씨익 웃어보였다.
부담없이 크게 쳐보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한수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었다.
야구 잘하는 놈이 눈치까지 빠르다.
그렇게 믿음직한 표정을 지어 보인 한수혁이 마침내 타석에 들어섰다.
그라운드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 위에 있던 모든 선수들, 그리고 양 팀 덕아웃의 감독과 코치들이 일제히 숨을 죽인 채 한수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대준 감독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국내 팀 입단 만으로 야구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규격 외 신인이자, 현재로서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선수가 마침내 첫번째 타석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과연 저 녀석이 실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현 시점 국가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에게 어떤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까?
한수혁이라는 이 괴물이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오늘 이 타석이 KBO 역사에 길이 남을 대 선수의 첫 타석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과연···’
이대준 감독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한수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