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7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74화(175/412)
#174. 패배는 없다
“형,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나야 항상 똑같지. 너는 어때?”
“저도 늘 그렇죠.”
“좋네.”
“좋죠.”
내가 천상진이라는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모두 생략한 짧고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
한때 야구선수를 포기하고 회사라도 다녀야 하나 고민했던 이 사람은 이제 한국시리즈 4차전을 맡길 수 있는 듬직한 선발투수가 되었다.
워리어스를 제외한 9개 구단 선수들에게 SNS 경계령을 내리게 만든 인물, 심리학자를 고용한 새로운 방식의 전력 분석을 고민하게 만든 선구적인 인물.
2027년 KBO에서 가장 많은 여성팬을 보유한 선수.
올 시즌 12승 5패 평균자책점 3.62를 기록하며 10개 구단 4선발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한 투수.
그런 천상진이 말한다.
“수혁아, 그런데 어제 양키스 경기 봤냐.”
“끝까지는 못 봤어요. 졸려서.”
“루카스 앤더슨 말이야. WBC 때 네가 상대했던 그 타자.”
“네.”
“몸쪽 공 들어오면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맞아요. 걔 원래 그래요.”
“흐흐, 맞구나.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네.”
내가 천상진이라는 선수를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건 이 사람이 나만큼이나 야구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거다.
“그나저나 형, 오늘은 어떻게 던지실 거예요?”
“음… 잘?”
“그쵸. 맞아요. 잘 던져야죠.”
굳이 많은 말은 필요치 않았다.
라이언 스타크의 부상으로 갑자기 시리즈의 흐름이 이상하게 변해버렸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천상진이라는 투수를 그 누구보다 믿는다.
* * *
슈웅
퍼엉!
“스트라이크! 아웃!”
“우우우우!”
“야 이, 시발! 왜 그런 똥볼을 그냥 쳐다만 보는 건데?”
6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인천의 6번 타자 곽지섭이 배트 한 번 내밀지 못하고 그대로 스탠딩 삼진을 당하자 인천 관중석에서 욕설이 날아왔다.
이번 시즌 워리어스 선발진의 든든한 한 축이 되어주었던 천상진과 WBC 브레이크 후 선발로 전환한 영건 김용재 간의 맞대결.
6회말까지 레인저스가 2 대 1로 한 점 앞선 가운데 경기는 7회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인천 마운드에는 여전히 김용재가 서 있었다.
올해로 3년 차가 된 이 젊은 투수는 인천이 임준영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점 찍은 차세대 에이스 후보였다.
최고 구속 155㎞/h에 달하는 포심과 체인지업, 투심, 커브.
임준영을 빼다 박은 듯한 투구 레퍼토리, 거기에 임준영으로부터 직접 배운 마운드에서의 마음가짐까지.
차곡차곡 에이스 수업을 받고 있는 그는 오늘 경기에서 팀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
1회초가 가장 큰 위기였다.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한수혁과 승부를 걸다가 펜스 최상단에 맞는 초대형 2루타를 허용했다.
다행히 다음 타자를 잘 처리하며 무실점으로 막아냈지만 가슴이 철렁해지는 순간이었다.
경기 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 임준영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너도 한수혁하고 정면 대결을 해야 할 날이 올 거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아니야. 피해라. 아직은 힘들어.’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오기가 발동해 승부를 건 게 화근이었다.
어쨌든 정신이 번쩍 든 김용재는 4회 두 번째 타석에서는 한수혁을 고의사구로 내보냈다.
그렇게 4회, 5회, 6회 세 이닝을 무사히 막아낸 그에게 감독이 물었다.
조금만 더 던질 수 있겠냐고
워리어스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덤벼든 덕분에 6회까지 투구 수는 고작 89개.
김용재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그런 김용재의 앞을 또다시 한수혁이 가로 막고 나섰다.
7회초 선두타자로 나선 한수혁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자신을 노려본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김용재는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팀의 승리를 위해 또다시 그를 피해야 하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타자 1루로.”
“우우우!”
벤치에서 자동고의사구 요청이 나왔고 한수혁이 한숨을 푹 쉬며 1루로 걸어 나갔다.
김용재가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앞으로 몇 년 후면 임준영 선배처럼 더 좋은 투수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때는 꼭 저놈과 승부를 하리라.
물론 그 다짐의 대상인 한수혁은 자신보다 더 어린 1년 차 신인에 불과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플레이!”
무사 주자 1루 상황에 상대팀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올 시즌 워리어스에서 한수혁 다음으로 높은 0.301의 타율에 0.380의 출루율, 0.515의 장타율, 그리고 홈런 24개, 91타점을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베테랑 조성오.
한수혁 때문에 무사 1루를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인천 벤치가 김용재를 그대로 밀어붙인 건 바로 이 조성오 때문이다.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김용재를 상대로 단 하나의 안타도 때려내지 못한, 특히 김용재의 주무기인 파워커브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조성오.
김용재의 임무는 바로 이 조성오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한수혁이 도루를 시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설사 2루에 이어 3루까지 허용한다 해도 상관없다.
아직 한 점의 여유가 있다. 한 점 정도는 줘도 된다.
자신의 임무는 이 조성오를 완벽하게 잡아내고 다음 투수에게 마운드를 인계하는 것이다.
올 시즌 중반 한국으로 넘어와 워리어스의 중심타자로 거듭난 월터 스미스.
그런 그를 상대하기 위해 지금 인천 불펜에서 언더핸드 투수가 몸을 풀고 있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거의 사라진, 오직 용병 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키워진 언더핸드 투수가 말이다.
김용재의 입가에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파워커브의 그립을 잡고 있었다.
* * *
오늘 경기가 시작되기 전 조성오는 후배 한수혁에게 이렇게 물었다.
“수혁아, 구종을 알면서도 못 치면 그건 바보겠지?”
한수혁이 보는 선배 조성오의 가장 큰 장점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단단한 피지컬이었다.
흔히 말하는 강골, 선천적으로 단단함과 힘을 갖고 태어난 사람.
그 덕에 조성오는 제이콥의 도움을 받아 제2의 전성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조성오의 가장 큰 단점은 뭘까?
그건 바로 부족한 자존감이었다.
팀의 주전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세 번이나 들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야구 선수로서 그의 자존감을 바닥을 기고 있었다.
물론 이해는 간다.
2021년부터 6년 넘게 이어져온 팀의 암흑기, 그 틈을 타 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적폐 세력들.
그 혼란한 상황에서 팀의 주장으로서 아무것도 못 한 후유증일 것이다.
그것은 올 시즌 3할, 24홈런, 91타점이라는 멋진 성적을 올린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선배님.”
“응?”
“제이콥이 얼마 전에 그러더라고요.”
“뭐라고?”
“선배님 정도면 빅리그에 가도 1루 백업이나 대타 롤 정도는 충분히 수행 가능할 거라고요.”
“그래? 제이콥이? 정말?”
거짓말이다.
제이콥이라는 인간은 나 외 다른 사람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에게 일이 주어지면 적극적으로 수행하기는 하지만, 그 외 지나간 일이나 사람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랄까.
올 시즌 중반까지 자신이 직접 트레이닝을 시켰던 조성오에 대해서도 이미 까맣게 잊고 있을 거다.
지금 내 말은 그러니까 그냥…….
음, 부족한 조성오의 자존감을 북돋기 위한 그런 거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도?”
“네, 지난번에 미국 애들 상대해 봤는데 별 거 없더라고요.”
“오… 진짜?”
내 말이 제대로 먹힌 건지 조성오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모르겠다.
기술적으로 조성오 선배가 김용재의 파워커브에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저건 그냥 심리적인 거다.
어릴 때부터 발목이 묶여서 자란 코끼리가 성장한 후에도 그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는, 뭐 그런 거랄까.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결국 맞아 떨어졌다.
따아아악!
“안 돼!”
“뛰어! 뛰어! 제발!”
타격음이 들리자마자 전력을 다해 2루로 달렸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타구가 그려 나갈 궤적이 훤히 예상된다.
터엉
“와아아아아!”
2루 베이스를 밟고 돌자마자 원정 관중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좌중간을 완전히 가른 타구가 원 바운드로 펜스를 맞췄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타구 속도와 인천 수비진의 위치를 감안하면 홈까지 들어가기에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
베이스러닝을 할 때는 아주 작은 망설임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이어지곤 한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멈추지도 않았다.
3루 베이스 코치가 잠깐 멈칫하더니 정지 사인을 냈다.
인천 우익수의 어깨를 감안하면 그게 맞는 판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기 상황을 감안할 때 모험이 필요한 순간이다.
무사 주자 2, 3루를 만든다 해도 다음 타자인 월터 스미스는 언더핸드 투수에게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을 정도로 약하다.
희생플라이조차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그렇기에 달린다.
숨결 하나,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통제될 정도로 완벽히 단련된 내 육체는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타다닥
“아아악!”
“안 돼! 아니, 돼! 아니지, 안 돼! 몰라! 에이 씨발!”
내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바로 달리자 관중석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굳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관중들의 반응, 그들의 시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인천의 우익수가 2루수에게 중계를 했다는 걸, 그리고 곧 강력한 송구가 홈을 향해 날아올 거라는 걸 말이다.
3루에서 멈추리라 생각했던 주자가 홈으로 뛰어들자 홈플레이트를 지키는 포수의 눈빛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나와 충돌한 후 한동안 후유증으로 고생했던, 한국시리즈에 들어와서야 다시 포수 자리에 복귀한 손영진이 자세를 잔뜩 낮추고 충돌에 대비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저 선수와의 충돌이 아니다.
촤아악
“우아아아!”
관중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내 시야의 바깥에서 송구가 날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그 감각이 발동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나 혼자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듯한, 컨디션이 극에 달한 날에만 발동되는 그 미묘한 감각.
그것을 느끼며 홈플레이트를 향해 왼손을 뻗어본다.
느리게만 느껴지는 포수의 미트가 내 왼손을 태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온다.
스슥
왼손을 뒤로 접어 그 미트를 피하고,
슥
대신 몸을 살짝 회전시키며 오른손을 앞으로
촤아아아악!
내 손끝이 홈플레이트를 스치는 순간,
“세이프! 세이프!”
“와아아아아!”
“미친! 미친!”
“살았어! 살았다고!”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며 엄청난 함성이 내 귀로 쏟아져 들어온다.
아웃 타이밍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실수로 주자에게 홈을 내준 포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 3루까지 내달린 조성오가 양손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고 나를 바라보았고, 덕아웃에 앉아 있던 동료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나를 둘러쌌다.
두꺼운 가을 점퍼로 어깨를 감싼 천상진이 손가락으로 전광판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즐겁다.
내가 생각하는 플레이가 현실로 구현되었을 때 나는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낀다.
이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은, 정말 뭐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한수혁! 이 미친 자식아! 끄아아! 끄아!”
“안치욱.”
“왜! 이 미친놈아!”
“덕아웃에서 간식 먹지 마라. 입에서 단내 난다.”
“…정말?”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패배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