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77)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76화(177/412)
#176. 우리는 강하다
‘스승님… 이 제자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 제가 틀렸던 걸까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그 와중에 무리의 선두에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선수 시절 몇 차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지도자로서는 초보나 다름없는 이대준 감독.
조성오와 이만식의 부상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그가 아련한 눈빛으로 스승 정윤석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스승을 붙잡고 묻고 싶다. 그리고 위로 받고 싶다.
그렇게 이대준이 아련한 눈빛으로 스승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기다리던 사람이 감독실로 들어왔다.
“보스, 절 찾으셨다고요.”
“네, 잘오셨어요, 벤자민. 이쪽으로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이거 오는 길에 몇 개 가져왔는데 맛있군요.”
수석코치 벤자민이 손에 들고 있던 귤 몇 개를 책상에 올려놓으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감귤농장을 한다는 안치욱의 부모님이 보내주신 귤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감귤이 수확될 시기가 돌아왔다.
11월이다.
병원에 누워 있을 두 제자의 얼굴이 또다시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이 자식들은 나이도 많아서 부상도 잘 안 여물 텐데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다쳐가지고…….’
이대준이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벤자민,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어떤 생각인가요, 보스?”
언제나처럼 벤자민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받아주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중요한 시기마다 옆에서 조언을 해준 그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직접 데려온 코치 사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전 제가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걸 떠나 수혁이 그 녀석이 제 품으로 들어온 것만으로도요.”
“동의합니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올해 워리어스가 거둔 성적은 모두 선수들과 코치들의 피땀으로 만들어낸 거니까요. 저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고요.”
“그건 좀 동의하기 힘들군요.”
벤자민이 생각하기에 이대준의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그가 운이 좋은 사람인 건 맞지만, 그 운을 바탕으로 여기까지 팀을 이끌고 온 건 온전히 감독 이대준의 역량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대준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가 그 운을 믿고 너무 무리한 짓을 벌인 것 같군요. 진작에 이만식하고 조성오, 그 두 녀석을 뺐어야 했는데…….”
“보스.”
“네, 말씀하세요, 벤자민.”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그리고 능력 있는 사람도 가끔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에 빠져들 때가 있다.
하지만 벌써 60년 넘는 세월을 살아온 벤자민은 세상의 이치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있었다.
“결과론일 뿐입니다. 거기서는 누구라도 그 두 친구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정말 그럴까요?”
“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보스를 따라다니던 행운의 여신이 잠깐 잠에 빠져든 것 같군요. 괜찮습니다. 본래 행운이란 그렇게 잠시 찾아왔다 떠나는, 장난꾸러기 같은 존재이니까요.”
벤자민의 말이 정답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이대준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어디인지 모르게 스승과 많이 닮은 자신의 보좌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이 되어주는 고마운 사람.
벤자민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이대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누군가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것이 한 팀을 이끄는 감독의 자세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벤자민.”
“그랬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우리도 우리 할 일을 하러 가볼까요?”
* * *
워리어스 덕아웃 앞, 이대준이 훈련을 끝낸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생각해보면 고참들의 부상과 이탈로 가장 놀란 건 자신이 아니라 함께 경기를 뛴 선수들일 것이다.
경기 전에 선수들에게 잔소리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이대준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한마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말부터 꺼내는 게 좋을까?
이대준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좋아, 8년 만에 정상도전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그 말을 들어야 할 두 노땅들이 여기 없구나.”
나름 긴장을 풀기 위해 던진 농담이었지만 워리어스 선수들 중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선수들의 얼굴에는 고참들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 그리고 오늘 경기에 대한 두려움.
그런 많은 감정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이대준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지난 선택에 대한 후회,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곱씹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선수들은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
그런 선수들이 이끌어줄 고참을 모두 잃은 채 한국시리즈 정상에 도전해야 한다.
1번 중견수 서형주
2번 3루수 안치욱
3번 유격수 한수혁
4번 1루수 월터 스미스
5번 포수 장덕수
6번 2루수 이창모
7번 우익수 김수학
8번 지명타자 강진석
9번 좌익수 최민석
선발투수 천상진
오늘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선수 중 한국시리즈 경험이 있는 건 인천 출신인 이창모와 매지션스 출신 최민석 정도가 유일하다.
1번부터 3번까지는 아예 올해가 첫 프로 무대였고, 4번 월터 스미스는 창단 이후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에 진출 못 한 시애틀 출신이다.
이 팀의 암흑기만을 기억하고 있는 김수학과 강진석, 거기에 매지션스의 백업 멤버였던 최민석.
그리고 사흘 휴식 후 또다시 마운드에 오른, 선수 생활 내내 방출을 걱정해야 했던 2군 투수 천상진.
어떻게 보면 아웃사이더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철저히 주류에서 제외되었던 선수들이 팀의 우승을 위해 한 시즌 동안 전력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지금, 리더를 잃은 채 불안해하고 있다.
이대준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선수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까?
불안해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들의 실력을 백 프로 발휘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을까?
“애들아, 그러니까 내 말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이대준이 뭔가 말을 꺼내려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그것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 팀에서 유일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해 본 어떤 선수였다.
“제가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감독님.”
“응? 수혁이 네가?”
“네, 허락하신다면요.”
이대준이 멍한 표정으로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평소 필요한 말이 아니면 거의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 아니, 그걸 떠나 이런 상황에 누구보다 긴장해야 할 막내다.
물론 한수혁이 일반적인 막내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왜 자신이 한마디를 하겠다 자청하는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시즌 이 팀의 멱살을 잡아 끌고 여기까지 데려온 건 다름 아닌 한수혁이다.
주장 조성오가 없는 지금, 선수들에게 뭔가 한마디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한수혁일 것이다.
이대준의 시선이 한수혁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좋아, 수혁아. 그럼 부탁한다.”
이제부터는 감독이 아닌 선수들의 시간이다.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건 덕아웃의 감독이 아닌, 함께 그라운드에서 뛸 믿을 수 있는 리더다.
지금 이 팀에는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이대준이 덕아웃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한수혁의 입이 열렸다.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WBC에서 미국 애들하고 일본 애들 좀 상대해 봤잖아요.”
그의 첫마디를 이창모가 받아주었다.
“그랬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음, 겨우 이 정도가 세계 최고인 건가 하는, 뭐 그런?”
“뭐? 하하하, 그거 미국 애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네.”
“하든지 말든지, 뭐,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좋아, 말해봐.”
한수혁이 선수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희는 강합니다. 그리고 저는 인천에 우승트로피를 내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
생각도 못 한 한수혁의 당찬 선언에 선수들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조금 지나친 자신감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말을 한 것이 다름 아닌 한수혁이라는 것을 깨닫자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단 전체를 감싸고 돌던 긴장감이 조금 옅어졌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말 한마디에 워리어스 선수들의 머릿속에 승리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늘 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겁니다. 그게 뭐든 승리를 위해 필요한 거라면 정말 뭐든지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저희가 지는 일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한수혁이라 해도 나서는 모든 경기를 승리로 이끌 수는 없다.
심지어 그는 오늘 선발투수도 아니다. 그가 경기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타석에 국한된다.
하지만 한수혁은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없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서형주.”
“어? 어, 왜?”
“겉멋 부릴 생각은 버려. 관중들에게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겠다는 욕심도 버려.”
“갑자기?”
“너는 잘 모르겠지만 기본기에 충실한 너는 10개 구단 최고의 중견수다. 그걸 잊지 마. 그리고 안치욱.”
“어, 어, 그래, 수혁아.”
“공을 최대한 빠르게 강하게 치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오늘 2번으로 나선 네 임무는 뭐다?”
“출루……?”
“맞아.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배트가 나오는 네 습관을 인천 애들은 최대한 이용할 거다. 서두르지 마. 절대, 넌 그거 하나만 생각하면 돼. 그러고 덕수 형.”
“말혀.”
“잘 맞은 타구가 몇 번 안 넘어갔다고 스윙을 줄일 필요는 없어요. 형보다 힘이 센 타자는 이 리그에 없어요. 할 수 있는 걸 했음 좋겠어요.”
“알았어. 뭔 뜻인지 알겠네.”
“창모 형님.”
“그래, 수혁아.”
“전 형님 실력이 이미 미국 진출하기 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해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해요. 형님도 그걸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
“수학이 형.”
“어, 그래. 말해. 난 준비됐다.”
“10개 구단 우익수 중에 형이 제일 빨라요.”
“흐흐,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진석이 형.”
“나한테도 할 말이 있는 거야?”
“덕수 형 다음으로 힘이 제일 센 건 아마 형일 거예요. 제가 인천 투수들 진을 빼놓을 테니 실투를 노리세요. 네 타석 중에 한 번 정도는 실투가 들어오지 않겠어요?”
“실투, 그래, 실투… 실투… 좋아. 접수 완료.”
“민석이 형.”
“응?”
“전 서형주 저놈 대신 형이 1번에 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흐흐, 고맙다.”
“마지막으로 상진이 형.”
“받아 적을 수첩 꺼냈다. 자, 이제 말해봐.”
“제가 적으로 만나기 가장 싫은 투수가 바로 형이에요.”
“그거 진짜 최고의 칭찬이네. 고맙다. 오늘 경기 빨리 끝내고 같이 월드시리즈나 보자.”
“좋죠.”
“이봐,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월터의 말에 한수혁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월터.”
“젠장, 뭔가 엎드려 절 받는, 그래, 이 표현이 한국식이지? 아무튼 기분이 그렇군. 자, 말해봐. 나한테는 무슨 조언을 해줄 생각이지? 세계 최고 선수의 조언을 한번 들어보자고.”
“조언? 그런 건 필요 없을 거 같고.”
“음?”
“포수 미트는 준비했죠?”
“미트? 너 설마…….”
“네, 팀이 리드를 잡으면 제가 곧바로 마운드에 오를 겁니다. 제 공 잡을 준비나 하세요.”
워리어스 선수들의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