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7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77화(178/412)
#177. 반드시 이긴다
내가 회귀한 것을 자각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이 워리어스라는 구단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워리어스의 목표는 우승입니다.’
1년 전 내뱉은 그 말이 이제야 비로소 현실이 되어 내 눈 앞까지 다가왔다.
한 걸음, 우승까지 딱 한 걸음.
실패해도 좋다는 말은 지금 이 순간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이긴다. 무조건 이긴다.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 살아온 나를 위해, 그리고 같은 꿈을 꾸며 함께 달려온 저 많은 사람들을 위해.
“형,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무슨,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다들 수비 잘 부탁한다. 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직접 마운드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괜찮다.
장덕수, 월터, 이창모, 안치욱, 최민석, 서형주, 김수학, 강진석, 천상진.
등을 믿고 맡길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동료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있으니까.
한국시리즈 7차전 마지막 무대,
마운드 위에 선 투수의 표정에서 기분 좋은 흥분이 느껴진다.
우리 팀의 투수 중 내가 가장 믿는, 그리고 좋아하는,
언젠가 꼭 한번 1군 무대에 서는 게 소원이라던 어떤 좌완 투수가 있는 힘을 다해 초구를 뿌렸다.
슈우웅
퍼어엉!
“스트라이크!”
* * *
‘상진아, 지금이라도 일자리를 알아보는 건 어떨까? 아버지가 친구분 회사에 자리 하나 만들어줄 수 있다더라.’
‘딱 올해까지만 해보고 결정할게요, 어머니.’
‘그래, 네가 얼마나 야구를 좋아하는지 이 엄마가 모르는 건 아닌데… 휴우, 아무튼 알았다. 밥 잘 챙겨 먹고, 괜히 집에 돈 보내지 말고 그걸로 팀원들이랑 맛있는 거나 사 먹으렴. 그럼 엄마 들어간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 말조차 제대로 안 해주는 코치와 감독들 사이에서 몇 년을 버티다 결국 도망치듯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하고 나면 뭔가 달라져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괜한 망상이었다.
여전히 1군 무대는 멀어 보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방법이 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관중 하나 없는 2군 구장에서 공을 던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딱 올해까지만 해보고 안 되면 엄마 말 대로 취직해야겠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구단의 주인이 바뀌고, 그간 팀을 장악하고 있던 프런트 직원들과 코치들의 모가지가 몽땅 날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천상진은 1군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야구 같은 건 때려치우고 기술이나 배워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지금 한국시리즈 7차전 선발이 되어 이렇게 공을 던지고 있다.
슈웅
파앙!
“스윙! 아웃!”
12승 5패, 평균자책점 3.62.
인터넷 포털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정보들이다.
솔직히 꿈만 같다.
내가 정말 10승 투수가 됐다고?
내가?
야구 그만두고 취직이나 하라고 말씀하시던 부모님들은 이제 읍내까지 매일 나가 자신의 얼굴이 담긴 종이신문을 사 모으신다.
오빠가 2군 야구선수라는 걸 조금은 부끄러워하던 철부지 막냇동생이 친구들에게 줄 사인을 부탁한다며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그 모든 것들이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자신의 가족들이, 동료들이, 지금 내 어깨에 기대고 있다.
그 사실이 부담스럽긴커녕 오히려 기분 좋게 느껴진다.
던진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휴식이 부족하지 않냐고?
아니,
투수 천상진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단련해왔다.
공을 던지는 왼손으로는 숟가락도 한 번 들지 않았다.
내 왼손은 오로지 야구공을 던지기 위해 존재한다.
이 손으로 꼭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할 것이다.
슈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아웃!”
* * *
– 이야, 정말 대단합니다. 천상진 선수가 1회초 인천 레인저스의 1, 2, 3번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평소 맞춰 잡는 피칭을 즐기던 선수가 갑자기 탈삼진 머신으로 변했습니다.
– 엄청나네요. 오늘 이 경기를 TV로 보고 계시는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이 있다면 정말 두 눈 크게 뜨고 천상진 선수의 투구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야말로 투구의 정석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 그 정도인가요?
– 네,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투수와 타자 간의 대결은 결국 타이밍 싸움으로 귀결됩니다. 공의 속도와 궤적을 조절해 타자의 배트를 피하는 것, 사실은 그게 바로 투구거든요.
– 계속 말씀하시죠.
–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천상진 선수가 던진 공의 최고 구속은 142㎞/h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KBO 리그 평균 구속이 143㎞/h인 걸 감안하면 평범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공이죠.
– 그렇죠.
– 그런 평범한 공으로 천상진 선수가 삼진을 잡아낼 수 있다는 건 딱 하나입니다. 타자가 무얼 노리고 타석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상황에 따라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지, 그걸 완벽하게 꿰뚫어 본다는 뜻이죠.
– 말로만 들어도 대단하네요.
– 네, 그러니 잘 지켜보시라는 겁니다. 한수혁 같은 투수의 플레이는 아무리 본다 해도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프로를 지망하는 아마추어 선수들이라면 지금 이 천상진 선수의 투구를 눈여겨보세요. 살아 있는 교본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 * *
1회초, 천상진이 인천의 1, 2, 3번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이어진 워리어스의 공격.
타석에 들어선 건 한수혁의 칭찬 아닌 칭찬으로 기분이 한껏 고양된 서형주였다.
이번 시즌 0.290의 타율에 0.362의 출루율, 그리고 8홈런 51타점, 44도루를 기록한 워리어스의 돌격대장.
비록 목표했던 타율 3할, 출루율 4할, 50도루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데뷔 1년 차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성적이다.
하지만 서형주는 조금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나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너무나 잘난 동기 덕분이다.
4할이 넘는 타율, 61개의 홈런과 162개의 타점, 심지어 도루까지 자신보다 4개나 많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절대 저럴 수는 없다.
‘젠장.’
말도 안 되는 한수혁의 성적을 떠올리면 자꾸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서형주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저 괴물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마음을 다잡으며 매일 그라운드를 달린다.
그런 서형주에게 오늘 한수혁이 한 말은 꽤 큰 충격이었다.
‘겉멋만 빼면 내가 국내 최고 중견수라고?’
1년 내내 눈만 마주치면 잔소리를 퍼붓던 괴물 놈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듣기 싫지 않다.
아니, 살살 녹아 귀에 착 감기는 게 솔직히 너무 기분 좋다.
‘좋아.’
지금 당장, 아니, 최소 몇 년간은 저 괴물을 따라잡는 게 무리일지 몰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나는 누가 뭐래도 천재 서형주이니까.
평소보다 짧게 배트를 잡아본다.
최근 어깨 상태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임준영은 역회전성 볼을 거의 던지지 않는다. 리치가 조금 짧아져도 괜찮다.
배트를 짧게 잡고, 고개를 더 숙이고, 오직 출루만을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그다지 보기 좋지는 않겠지만,
나도 저 괴물 동기 놈처럼 커다란 홈런을 치고 거만한 자세로 그라운드를 돌고 싶지만,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지금 당장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출루다.
자신을 믿고 데려온, 그리고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도와준 워리어스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따악!
초구 바깥쪽 포심을 가볍게 밀어 친 서형주가 1루를 향해 전력을 내달렸다.
수비력 만으로는 리그 최고라 불리는 인천 3루수 민주현이 몸을 날려 타구를 낚아챘다.
순간 서형주의 귓가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겉멋만 빼면 네가 최고다.’
한수혁이 한 말은 사실 ‘네가 최고 중견수다’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동기의 말 한마디에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확신을 갖게 된 서형주가 1루 베이스를 향해 힘차게 몸을 던졌다.
촤아아악
“세이프!”
찝찝한 흙먼지가 입 안으로 날아 든다.
하지만 상관없다.
살았다.
성공이다.
“우아아아아!”
“서형주! 서형주! 서형주!”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온다.
그 사이 사이, 끼어 있는 자신의 이름이 마치 음악 소리처럼 달콤하게 느껴진다.
땀에 절은 얼굴에 흙이 잔뜩 묻으며 꼴이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서형주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런 서형주가 저 멀리 대기타석에 있는 한수혁을 향해 외쳤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못 불러들이면 다 네 책임이야!”
* * *
시즌 중후반부터 6, 7번 타순에 배치되던 안치욱이 오늘 2번으로 올라온 건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서형주의 내야 안타로 시작된 무사 1루 찬스.
국내 최고 수준의 도루 저지 능력을 가진 손영진의 어깨와 인천 내야진의 수비력을 생각하면 아무리 서형주라 해도 쉽게 뛸 수는 없는 상황.
그럼에도 서형주는 최선을 다해 스타트와 복귀를 반복하며 임준영의 신경을 긁어댔다.
그런 주자의 움직임 덕에 평소보다 1-2루 사이의 시프트 간격이 헐거워졌고, 안치욱이 때린 강하고 빠른 타구가 그 사이로 향했다.
따악!
“아웃!”
하지만 인천 내야진은 역시 강했다.
빅리그 실패 후 국내로 돌아온 이창모를 갈 곳 없는 선수로 만든, 수비력 하나만 놓고 보면 국내 최고라 할 수 있는 인천 2루수 손재후가 그 타구를 기어코 잡아냈다.
1사 주자 2루.
타석에서 본 임준영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지난 몇 경기에서 임준영이 나를 거른 건 감독의 지시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임준영은 스스로 나를 거르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우우우!”
“승부해! 승부하라고!”
볼 네 개가 연속으로 날아왔다.
어떻게든 자신을 홈으로 불러들이라던 서형주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투수를 노려보았다.
감독의 지시로 볼넷을 내줄 때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얼굴을 하던 사람이다.
그런 임준영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한 채 볼을 던진다.
선택했구나.
임준영은 나와 상대해 이기는 대신 오늘 경기의 승리를 택했다.
진심이다.
오늘 경기에 진심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임준영 역시 오늘 경기를 잡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좋아.
그래, 쉽게 얻을 수 있는 우승트로피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한 보람이 없겠지.
전력으로 덤벼봐라.
우리는 이긴다.
그리고 트로피를 가져온다.
스슥
1루로 나가자마자 벤치를 향해 도루 사인을 보냈다.
오늘 경기는 찰나의 실수와 순간의 선택으로 결정 날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의 싸움이 아니다.
이미 이 경기는 야구가 아닌 전쟁이다.
상대의 숨결, 행동, 움직임을 읽고 머릿속 생각을 예측해야 한다.
스스슥
한참 동안 고민하던 벤치에서 다시 나와 서형주에게 사인을 보내왔다.
변칙 플레이가 가미된 더블 스틸.
성공을 위해 필요한 건 나에 대한 인천 선수들의 두려움, 그리고 2루에 있는 서형주의 감각이다.
팀 내에서 최고 수준의 주루 센스를 가지기는 했지만 저놈은 아직 풋내기다.
과연 얼마나 내 의도에 맞춰 움직여줄 수 있을까?
하지만 망설이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월터가 타석에 들어서고, 1루를 향해 몇 번 견제구를 던지던 임준영이 드디어 투구 동작에 들어가려던 순간,
타닥
2루를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더블스틸을 방지하기 위해 2루 주자의 발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인천 배터리와 내야진.
그런데 1루 주자인 내가 먼저 스타트를 끊자 임준영의 호흡이 아주 잠깐 흐트러졌다.
순간 유격수와 3루수의 시선, 그리고 무게중심이 2루 베이스 쪽으로 기울어졌다.
저건 그냥 반사적인 거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오히려 잘 훈련된 선수이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반사적인 행동.
타다닥
그 아주 잠깐의 순간을 캐치해낸 서형주가 3루를 향해 전력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나에 대한 과도하리만큼의 견제,
2루 주자가 아닌 1루 주자가 먼저 스타트를 끊음으로써 발생하는 수비진의 당황,
머릿속의 정보와 시각 정보 사이의 괴리로 발생하는 순간적인 딜레이,
이에 따라 휘청휘청 흔들리는 내야수들의 위치.
“3루!”
그 작은 차이들이 모이고 모여 3루로 향하는 포수의 송구를 아주 미세하게나마 늦게 만들었다.
촤아악
“세이프!”
“와아아아!”
“시발! 지금 뭐 하는데?”
“서형주! 서형주! 서형주!”
더블스틸을 허용한 손영진이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게 볼넷까지 주며 어떻게든 이닝을 막으려 했던 임준영이 아쉬운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됐다.
오늘 경기를 가져오기 위한 첫 번째 모험이 멋진 성공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