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7화(18/412)
#17. 연습경기 (1)
야구 선수, 특히 야구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프로야구 선수들은 대부분 미신 중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비슷한 훈련을 하고, 경기장에서도 비슷한 플레이를 하건만, 어떤 날은 3연타석 홈런이 터지고 또 어떤 날은 3연속 삼진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보니 자꾸 그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 요인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제 같은 거랄까.
메이저리거 시절을 떠올려보면 별의 별 놈들이 다 있었던 것 같다.
홈런을 친 날 입었던 속옷을 한달 내내 입는 미친 놈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놓아둔 대로 라커룸 물건이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난동을 부리는 놈들도 있었다.
젠장, 지금 생각해도 정말 정신 나간 놈들이었지.
아무튼 그런 미신과 징크스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것이 뚜렷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천적관계다.
객관적인 기량과 상관없이 되도록이면 상대하고 싶지 않은 찜찜한 상대.
혹은 그와 반대로 백 번을 붙어도 백 번 다 이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만만한 상대.
한 번 그런 관계가 성립되면 거기서 벗어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수원 커맨더스의 포수로 출전한 정대한은 올 시즌 내내 상대하게 될 워리어스의 신인 유격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과연 이 놈은 수원 커맨더스의 호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천적이 될 것인가?
“너구나, 한수혁이.”
“안녕하세요.”
“그래, 재미있게 해보자.”
“네, 선배님.”
정대한이 갸름한 눈으로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듣던 대로 엄청난 피지컬이다.
공식 프로필상 192cm라고 들었는데 온 몸이 근육질인데다가 팔다리가 유난히 길어 배터 박스가 꽉 차 보인다.
‘이거 바깥쪽이라고 안심할 수 없겠는데’
좌완 에이스 최경재와 벌써 5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그는 우 타자를 상대로 바깥쪽 꽉 찬 투심을 자주 요구하는 타입의 포수다.
스트라이크 존에 걸쳐서 들어오던 공이 살짝 바깥쪽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우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놈에게는 그렇게 안일하게 승부하면 안 될 것 같다.
팔다리가 시원하게 쭉쭉 뻗은 것이 바깥쪽 공이라고 해도 충분히 배트가 닿을 것 같다.
‘그럼 일단 선구안부터 체크해볼까’
정대한의 사인을 받은 최경재가 천천히 와인드업을 했다.
최경재를 수원 커맨더스의 1선발이자 국가대표로 만들어준 주무기 투심 패스트볼.
포심과 구속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그 공이 바깥쪽 높은 코스,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하나 정도 빠진 곳으로 날아들었다.
“볼.”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반응을 하지 못한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포수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바깥쪽에서 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요구하고 싶지만 오늘 감독의 요구는 한수혁이라는 거물급 신인의 기를 눌러주라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정대한이 이번에는 몸 쪽으로 바짝 붙는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다른 좌투수들과 달리 최경재는 우타자의 몸쪽으로 포심을 자주 던졌다. 그것은 최경재의 디셉션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공을 놓기 전까지 완전히 손이 가려지기에 타자 입장에서는 갑자기 공중에서 볼이 날아오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좌투수로서 우타자를 상대하는 약점이 거기서 상쇄되는 것이다.
컨디션을 조금 일찍 끌어올린 덕에 148km/h까지 올라온 최경재의 포심 패스트볼, 지난 시즌 그를 18승 투수로 만들어준 그 공이 한수혁의 무릎 쪽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정대한은 느꼈다.
한수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투기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 선명한 에너지를.
우우우우웅
이어 그가 난생 처음 보는, 아니, 예전 WBC에서 만난 거구의 외국 타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어마어마한 스윙이 바람을 갈랐다.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풍압이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스윙,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치 공이 쪼개지는 듯한 엄청난 파괴음이 그 뒤를 따랐다.
따아아아아악!
“커헉!”
정대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우 타자의 몸 쪽 낮은 곳, 타자의 정강이 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한수혁이 무릎을 꿇으며 그대로 걷어 올려버렸다.
엄청난 소리가 났지만 처음에는 외야 플라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타구의 발사각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슈아아악
하지만 아니었다.
45도, 아니, 거의 50도 각도로 쏘아 올려진 타구가 애리조나의 하늘을 가르며 끝도 없이 날아간다.
멀리, 멀리, 궤도를 유지한 채 계속 멀리.
수원의 외야수들조차 수비를 포기하고 타구의 궤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추진장치가 달린 것처럼 엄청난 고도 위를 비행하던 타구가 기어코 담장을 넘더니 아예 경기장 밖으로 날아가버렸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장외홈런이다.
휘릭
배터 박스에서 그 모습을 감상하던 한수혁이 배트를 뒤로 휙 던져버리고 천천히 1루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하건만 워낙 엄청난 것을 보고 난 후라 그런지 화도 나지 않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선후배, 적아를 떠나 저런 타구를 보려면 돈이라도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도리도리
그렇게 멍하니 한수혁을 바라보던 정대한의 시선에 감독의 얼굴이 들어왔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구용식 감독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마운드를 바라보았다.
팀의 에이스인 최경재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시발’
그제서야 이 팀의 에이스에게 어떤 징크스가 있는지 떠올랐다.
첫 대결에서 큰 거 한 방을 맞은 타자에게 호구를 잡히는 것, 그것이 바로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의 유일한 징크스였다.
문득 감독이 원망스러워졌다. 신중하게 승부하라고 주문했어야 했다.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달려가는 정대한의 머리속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 *
“헤이, 친구 멋진 홈런이었어.”
“고마워. 그리고 저 투수 공 끝이 약간 뜨는 거 같으니까 코스에 걸치는 공은 일단 신중하게 골라 봐.”
“그래? 흐흐, 좋은 정보군.”
내 말을 들은 맥스가 타석에 들어서서 신중하게 볼을 고르기 시작했다.
“볼.”
지난 번 내 조언을 받아들인 건지 이후 맥스는 장타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보다 빠르고 정확한 타구를 만들어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맥스는 내 홈런으로 멘탈이 터진 최경재의 공을 잘 골라내 1루로 출루하는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타자다.
좋아. 이로서 피 같은 내 달러가 휴지조각이 될 일은 없을 거 같다.
“흠.”
“안치욱 넌···”
“음?”
“저 투수가 너한테는 아마 몸쪽으로만 계속 붙일 거야.”
“그래? 무슨 근거로?”
그야 15년 빅리그 경력에서 나오는 투구 패턴 분석?
“아무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깨에 쓸데없는 힘 빼고 몸쪽 공을 기다려봐.”
“음. 좋아.”
타고난 재능의 크기와 상관없이 이제 막 프로에 입단한 신인에게 머리싸움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이럴 때는 옆에서 가이드라인을 잡아주고 자기 스윙을 하게 해주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내 말을 곱씹느라 타석에 들어가는 것조차 깜빡한 놈의 등을 밀어주며 한 마디를 보탰다.
“가볍게, 공 끝이 생각보다 더 좋으니까 크게 휘두를 생각 말고 가볍게.”
그렇게 놈의 등을 밀어 타석에 세운 나는 덕아웃으로 돌아와 벤치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대준 감독이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와 묻는다.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한 거야? 뭐 투수 약점이라도 발견한 건가?”
“아닙니다, 감독님. 그냥 열심히 하라고.”
“좋아. 그래 동기 사이라 해도 가끔은 그런 격려가 필요한 법이지. 잘했어.”
음.
그나저나 이 양반, 요즘 들어 눈빛이 왜 이렇게 부담스럽지?
* * *
내 조언대로 안치욱은 투수의 몸쪽 공에 타격 포커싱을 맞췄다.
그리고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는 내가 예고한 대로 안치욱의 몸쪽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생각했던 코스로 공이 들어오자 안치욱이 움찔하며 배트를 내밀었다.
하지만 비교적 잘 맞은 타구가 2루수 정면으로 가며 아웃.
“오늘 출루 내기 기억하지? 친구, 한 번도 출루 못했다고.”
“······”
맥스 워커의 도발에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안치욱이 애써 태연한 척 해바라기 씨를 씹어 댔다.
스코어 1대 0, 생각지도 못한 선취점을 뺏긴 수원 커맨더스 선수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경기 시작 때만 해도 여유가 넘치던 얼굴에 왠지 모를 비장미가 흐른다. 아마 상대 감독이 크게 한 소리를 한 모양이다.
1회말 우리 팀의 마운드에 오른 건 올 시즌 4선발이 유력한 정태호 선배였다.
어차피 가능한 많은 투수들이 짧게 이어 던질 것이기에 누가 먼저 등판하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물론 팬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지만.
﹂아아··· 저쪽 팀은 최경재가 나오는데 우리는 정태호가 웬 말이냐. 눈이 썩는 거 같네
﹂말넘심. 그래도 우리 4선발임
﹂다른 팀 가면 패전처리나 할 놈이 첫번째 선발로 나오다니···
﹂그런 건 됐고 한수혁 홈런은 지금 다시 봐도 개쩐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래··· 그거나 계속 돌려보자. 어차피 한참 동안 수비해야 할 것 같은데
팬들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번부터 3번까지 연속 3안타를 얻어맞은 정태호는 수원 커맨더스의 4번 타자 강태용에게 만루홈런을 얻어맞고 말았다.
안타 4개가 전부 외야로 날아가는데야 내가 뭐 손쓸 방법이 없다.
그렇게 스코어는 순식간에 4대 1.
이대준 감독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반대로 수원 구용식 감독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타임!”
급기야 이대준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 정태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지난 시즌 수원과 마지막 경기에서 호투를 한 기억 때문에 첫번째 투수로 내보낸 것인데 괜히 상대팀 기만 살려준 셈이 되었다.
그렇게 정태호가 물러난 마운드에는 우리 팀의 진짜 에이스인 라이언 스타크가 올라왔다.
“아웃!”
아직 컨디션이 한참 덜 올라왔지만 그래도 역시 좋은 투수였다.
5번과 6번, 7번 타자를 차례로 범타로 잡은 라이언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만약 용병 2명을 선발투수로 기용할 수 없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워리어스를 우승시키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절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다. 훌륭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어서.
“수혁아.”
“네, 선배님.”
“손바닥 한 번만.”
“네?”
“그냥 홈런 타자 기 좀 받고 싶어서.”
“······”
공수가 교체된 후 선두타자로 나서게 된 최고참 조성오 선배가 내 손을 잡고 한 번 씨익 웃더니 후다닥 타석으로 달려나갔다.
대학 졸업 후 이 팀에 입단해 워리어스에서만 11년을 뛴 터줏대감 조성오.
처음에는 2루수로, 서른 살이 되어서는 3루수로, 그리고 다시 지난 시즌부터는 1루수로 전향한 좌타자.
0.275 / 0.341 / 0412 12홈런 59타점이라는 성적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그래도 꾸준한 활약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
내가 이번 캠프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선수 중 하나다.
비록 적지 않은 나이지만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강인한 피지컬과 최근 몇 년 간 아주 미세하지만 매년 상승하고 있는 공격지표.
외부에서 볼 때는 소극적인 플레이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아마 그건 저기 황성민이나 송기태 같은 팀 내 주류 세력들에 밀려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탓일 거다.
팀을 우승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팀을 이끄는 베테랑의 존재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커리어로 후배들을 한데 모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고참이 필요하다.
“아웃!”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을 당한 조성오 선배가 분한 표정으로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탐이 난다.
음, 이 선배를 제이콥 월드로 초대해보는 건 어떨까?
피똥을 싸게 될 수는 있어도 그 과정만 버텨내면 새사람으로 만들어볼 수 있을 거 같은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