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8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79화(180/412)
#179.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출신 신인선수 역대 계약금 1위’
‘오타니 쇼헤이 이후 첫 투타 겸업 도전’
‘시애틀과 클리블랜드의 프랜차이즈 스타’
‘두 번의 사이영상, 양대 리그 MVP 1회, 수십 번의 벤치 클리어링, 역대 최다 퇴장 선수’
‘월드시리즈 2회 진출, 그리고 한 번의 우승’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된 내 지난 삶의 기록들.
그리고…….
처음으로 빅리그에 무대에 섰던 기억,
첫 삼진, 첫 승, 첫 안타, 첫 홈런의 기억,
계속되는 부상과 좌절, 극복,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영광의 순간들.
지난 내 삶에 켜켜이 쌓아 올려진 기록과 기억들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다름 아닌 한 통의 짧은 메시지였다.
[한수혁 님 연락처 맞을까요? 여기 서울 성진병원입니다. 고인의 부탁을 받아 메시지 남깁니다. 이런 연락 드리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박성훈 님이 어제 사망하셨습니다.]삶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아니, 애초에 그걸 본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누군가는 가족 때문에, 연인 때문에, 짊어진 삶의 무게 때문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는 길을 가게 되고, 그걸 위해 인생을 쏟아붓게 된다.
나는 그게 너무나도 싫었다.
내 유년 시절 기억에 온통 결핍만을 심어줬던 생물학적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는 특히 그랬다.
그리고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어른인 어머니를 잃고 난 후에는 다른 누군가의 뜻에 인생이 휘둘리는 걸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마음대로 모든 걸 결정하고 살아왔다.
야구선수로의 성공, 그에 따르는 부와 명예.
오직 그것만이 지난 내 삶의 상처들을 치유해줄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보답이라 애써 자위하며,
모든 걸 버리고 오직 야구 하나만을 위한 인생을 살았다.
분명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주도한 삶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내 정신적 버팀목을 잃은 후에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성훈이 형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내가 한 선택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멈출 수 없었기에 계속 그 길로 나아갔다.
아무리 틀린 길이라 해도 가다 보면 어딘가 나오겠지, 아주 운이 좋으면 내가 이탈한 그 경로 어딘가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
되도 않을 멍청한 생각을 하며 헛된 시간을 보냈다.
“플레이!”
그렇기에 회귀 후 내가 가장 바란 건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시간, 그리고 그들과 함께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이었다.
1루, 2루, 3루, 외야, 덕아웃, 그리고 저 멀리 응원석과 관계자석.
지난 1년 동안 이 순간을 위해 함께 달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뜬 채 오직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랬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전생에 그렇게도 바라던,
바로 그 순간이다.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려온 바로 그 순간.
스르륵
오늘따라 마운드에서 느껴지는 흙의 감촉이 너무나 좋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까다로운 내 취향에 딱 맞춘 마운드 상태.
그 감촉을 즐기며 천천히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슈우우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 169㎞/h! 169㎞/h! 한수혁 선수가 던진 공이 또다시 국내 최고 구속인 169㎞/h를 기록했습니다! 8회초, 공 아홉 개로 세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낸 한수혁 선수가 동료들과 함께 덕아웃으로 들어갑니다!
– 으아아아! 엄청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저도 모르게 이게, 후아… 숨이 잘 안 쉬어질 지경이네요!
* * *
너무 엄청난 걸 본 탓일까.
삼진을 당한 인천의 1, 2, 3번 타자들, 그리고 덕아웃에 앉은 코칭스태프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7회말 수비에서 임준영이 한수혁에게 만루 홈런을 허용하는 순간,
그래, 좌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았다.
2번의 공격 찬스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넉 점의 점수 차이를 뒤집는 것.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다.
워리어스에서 한수혁을 등판시킨다 해도,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보다 많이 떨어진 구속, 그리고 너클볼 위주의 피칭.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급하게 일본에서 너클볼을 던질 줄 아는 불펜 투수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감도 잡기 힘들었던 너클볼이 배트에 걸리기 시작한 순간,
할 수 있다는,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인천 타자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슈웅
퍼어엉!
마운드에 오른 한수혁은 너클볼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어깨이상설 따위는 헛소문에 불과했다는 듯 아홉 개 연속 포심을 던지며 인천 타자들을 학살했다.
부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 걸어두었던 리미트가 풀려버렸다.
168, 169, 168, 다시 169㎞/h.
누군가는 말한다.
아무리 빠른 공이라 해도 미리 구종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쳐낼 수 있다고.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냥 빠른 공이 아니다.
3,000RPM에 달하는 말도 안 되는 회전수, 거기에 인천 타자들의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드는 칼날 같은 제구력.
받는 포수조차 숨을 헐떡일 정도로 파괴적인 공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존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저건 괴물이야.”
“못 이겨, 못 이긴다고.”
8회말, 임준영을 대신해 마운드에 오른 김용재가 워리어스의 5, 6, 7번 타자를 범타로 처리했건만 인천 덕아웃과 관중석에서는 아무런 함성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좌절감이 가득한 한숨만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경기를 포기해서가 아니었다.
저 멀리 워리어스 덕아웃에서 한수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야구장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못 친다.
저건 절대 못 친다.
만약 야구에 신과 악마가 있다면 저건 악마가 분명하다.
인천 선수들의 눈에 한수혁은 악마, 그 자체였다.
* * *
“수혁아, 그럼 부탁한다.”
“챔피언, 자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순간이야. 가서 끝내고 오라고.”
9회초 마지막 수비.
오늘 경기 전까지도 줄곧 내 마무리 등판을 반대하던 이대준 감독, 그리고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던 벤자민 수석코치의 격려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이번 등판을 위해 나는 성훈이 형, 제이콥, 그리고 이대준 감독과 이번 겨울까지 절대 투구 연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내걸어야만 했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다.
나보다 더 내 몸을 걱정해주는 사람들.
지난 삶에서 그토록 바라던 내 편들이 생겼다는 게 너무나 기분 좋다.
그런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오직 승리만을 위해 모든 걸 내버렸던 과거의 나와는 다르다.
이거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길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빌어먹을,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데? 나는 공 잡을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말이야.”
“월터.”
“왜.”
“어디 다른 데 갈 생각하지 말고 이 팀에 오래 있어요.”
“젠장.”
“잘해줄게요.”
“빌어먹을…….”
언제 던질지 모를 너클볼을 잡기 위해 포수가 장덕수에서 월터로 교체되었다.
이번 시즌 내내 지켜왔던 안방을 내준 탓일까, 아니면 내 공을 받아 줄 수 없다는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걸까.
덕아웃에 물러 앉은 장덕수의 표정에는 진한 아쉬움이 떠올라 있었다.
괜찮다.
오늘이 끝이 아닐 테니까.
이번 시즌 갑자기 주전 포수로 발탁된 장덕수의 미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애 첫 우승을 코앞에 둔 채 긴장감에 떨고 있는 다른 선수들.
그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이건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라고.
우리 야구는 이제 막 시작될 거라고.
“플레이!”
인천의 4번 타자 이한범.
빠른 공에 강점이 있는, 좌우 가리지 않고 타구를 보낼 수 있는 중장거리 타자.
머릿속에 올 시즌 그가 기록한 타격 지표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한 시즌 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두 팀이 정상 바로 직전에서 서로에게 진검을 겨눈 상황.
데이터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는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자신있는 공을 던지고,
슈웅
부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타자는 그걸 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뿐이다.
한국시리즈 7차전 마지막 이닝,
야구선수로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데이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더 강한지,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한지를 겨루는 진검승부.
슈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볼 카운트 투 스트라이크 노 볼.
완벽하게 제압하고 싶다.
오늘을 기점으로 세워질 워리어스의 왕조가 그 누구에게도 얕잡아 보이지 않도록,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장벽을 쌓아 올리고 싶다.
유인구 따위는 필요 없다.
승부다.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아웃!”
– 168㎞/h 포심! 169㎞/h 포심! 그리고 이어진 105㎞/h 너클볼에 이호범 선수가 속수무책으로 삼진을 당하고 맙니다! 이제 워리어스의 정상 등극까지 아웃카운트 두 개만이 남았습니다!
원 아웃.
5번 타자 민주현이 타석에 들어선다.
오랜 경험이, 그리고 내 감각이 말해준다.
상대가 빠른 공을 때리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걸.
슈웅
부웅
퍼엉
“스윙!”
어쩌면 조금은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169㎞/h 포심에 대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한 타자에게 105㎞/h 너클볼을 던진다는 건 말이다.
오늘 이 일로 인해 저 타자는 오랜 슬럼프에 빠져들 수도 있다.
결국 야구란 그런 것이다.
진 쪽에 큰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는 잔인한 게임.
내 사람들에게 그런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나는 또 한 번 전력을 다해 공을 던진다.
슈웅
퍼엉!
“스트라이크!”
슈웅
부웅
“스윙! 아웃!”
“우아아아아아!”
“진짜! 으아! 진짜!”
“한수혁!”
“한수혁! 수혁아!”
“수혁 오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함성 소리가 마구 뒤섞여 귓가로 파고든다.
투 아웃.
인천에서 마지막 승부수로 꺼내든 대타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타석에 들어섰다.
문득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의 내게 우승은 희망이 아닌 목표였다는 거다.
모든 걸 버리고 달려온 나에게 남은 건 그것밖에 없었기에, 나는 목숨을 다해 뛰었고 결국 그것을 얻어냈다.
그렇기에 우승의 기쁨 같은 건 없었다.
약간의 안도,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커다란 허무함.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진정으로 승리를 원한다. 그리고 우승을 꿈꾼다.
그리고 그 기쁨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싶다.
“플레이!”
삶의 모든 순간에는 선택이 필요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다.
나는 지난 인생에서 내 잘못된 선택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
그런 내게 하늘은 두 번째 기회를 줬다.
뒤틀린 내 선택과 삶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그렇기에 확신한다.
아무도 나를 넘어서지 못한다.
내 공을 칠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
스르륵
슈웅
파앙!
“스트라이크!”
누구도 나를 넘어설 수 없다.
슈웅
부웅
파앙!
“스윙!”
누군가 나에게 허락해준 두 번째 삶,
지난 내 인생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누구도 내게서 그걸 빼앗아갈 수는 없다.
슈우우웅
부우웅
파아앙!
“스트라이크! 아웃! 게임 셋!”
– 배, 배, 배, 배, 백칠십! 백칠십! 한수혁 선수가 던진 마지막 공이 170㎞/h를 기록하며 그대로 경기가 끝나고 맙니다! 서울 워리어스가 인천 레인저스를 6 대 2로 꺾으며 2027년 한국시리즈 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
“우아아아아!”
“수혁아! 이 미친 놈아! 이 정신 나간 놈아!”
“한수혁! 이리 와! 이리 오라고!”
“으아아! 우리가 이겼어! 이겼다고!”
그라운드 위에 있던, 그리고 덕아웃에 앉아 있던 동료들과 코치들이 우르르 나에게로 달려온다.
1루와 3루 안전망이 무너져 내리고 수많은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들어온다.
파바바바방!
파방!
파바방!
부우우우웅
부우웅
야구장 외벽에 설치되었던 폭죽들이 일제히 발사되고, 미리 대기 중이던 드론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잠실 밤하늘에 워리어스의 이름을 새긴다.
“수혁아!”
“진짜 고맙다! 미안하다! 시발! 니가 최고야!”
샴페인을 뒤집어쓴 팀원들이 나를 끌어안고 알아듣기도 힘든 말들을 쏟아낸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즐겁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즐거움에 몸부림을 친다.
“흐어어엉, 오빠! 오빠아아!”
“이리 와. 민예린.”
“흐어어엉… 네?”
“이리 오라고.”
연예인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건지, 눈물 콧물로 엉망진창이 된 민예린이 내게로 다가왔다.
와락
“…오빠?”
“고맙다.”
“…….”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맺는 걸 두려워했던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을 힘들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진 민예린을 뒤로하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려는 내게 기자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한수혁 선수! 한 말씀만! 소감 한 말씀만 먼저 부탁드립니다!”
“그냥 들어가지 마시고 제발! 딱 한 마디만!”
발걸음을 멈추고 기자들이 내민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꼭 해야 할 말이.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워리어스의 우승, 그리고 왕조 건설은 이제 시작입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누구보다 이 자리에 먼저 서야 할 사람들이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너머에 있을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듣길 기원하며.
“성오 형, 그리고 만식이 형, 빨리 치료 끝내고 돌아와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꼭 우승반지 끼게 해줄 테니까 다치지만 말고, 그냥, 그냥 그거면 돼요.”
“잠시만, 잠시만, 한수혁 선수, 한 말씀만 더!”
점점 빛을 잃어가는 야구장 조명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내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 그리고 사랑받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정말 고마웠다고.
이제야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