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81)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80화(181/412)
#180. 돌아갈 시간
“네, 그래요. 박 단장, 그럼 30분 후에 곧바로 회의 시작합시다. 자료 빠지는 거 없이 꼼꼼히 준비해주시고요. 알았어요. 네, 그것도 오늘 결정하는 걸로 하죠.”
가을보다는 겨울이라 불러야 좋을 것 같은 2027년 11월 둘째 주 어느 날.
서울 워리어스가 2027년 KBO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했다.
시즌 내내 인천의 뒤를 추격하던 워리어스는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냈고,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인천을 4승 3패로 누르며 무려 8년 만에 정상에 복귀했다.
시즌을 시작할 때만 해도 최하위권으로 분류되던 전력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상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정규 시즌 맹활약을 해준 투수 최고참 이만식은 결국 팔꿈치 수술을 받은 후 긴 재활에 들어갔다.
경험 부족한 선수단을 잘 이끌어온 주장 조성오 역시 발목 수술로 인해 내년 시범 경기 합류가 불투명한 상태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그 누구보다 이 팀의 우승을 기대했던 두 사람이 한국시리즈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거다.
하지만 괜찮다.
괜찮을 거다.
한수혁을 대신해 지난 1년간 워리어스 구단을 잘 운영해온 박성훈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믿음직한 동생이 말한 것처럼 워리어스의 시대는 이제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 꼭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선수들과 코치진이 잠시 휴식에 들어가고 본격적인 스토브리그가 시작되었다.
프런트의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얼마나 알차게 선수단 전력을 강화하느냐가 앞으로 이 팀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음…….’
몇 시간 후면 프런트 전체 회의가 시작된다.
기존 선수들과의 연봉협상, 재계약, 용병 계약, 그리고 외부 FA계약 등등.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자금이다.
한수혁이 준 초기자금으로 어떻게든 구단 살림을 꾸려 가고 있다.
민태현이라는 전문가가 달라붙고 예상밖의 관중 수입 폭발로 1년 적자 폭을 100억 수준까지 떨어뜨려 놓았지만…….
결국은 모기업에서 수익을 내지 못하는 워리어스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시한부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FA 영입을 노린다는 게 가능한 걸까?
물론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파이터즈와 마찬가지로 구단 네이밍권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지원금을 받는 것.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한수혁이 반대했다.
구단의 소유주가 반대하는 일을 추진할 수는 없다.
박성훈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드르륵
한수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시리즈 우승 연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민예린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 한수혁.
지금쯤 LA해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놈이 왜 갑자기?
“어, 수혁아. 응, 거기 좋냐? 크으… 그래, 말만 들어도 힐링되네. 뭐? 나도 오라고? 이런 미친, 됐고. 그보다 무슨 일이야? 어? 예산 회의? 안 그래도 조금 있다 시작하려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돈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어떻게? 응? 뭘 보라는 거야, 대체?”
다짜고짜 뭔가를 검색해보라는 한수혁의 말.
박성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한수혁이 불러준 단어를 입력했다.
“ICJN연구소… 그래, 했어. 뉴스 나오네. 스위스 ICJN연구소, 로펠스의 품에 안기다. 주가 대폭등… 2028년 상반기 중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 확신. 전 세계 자동차 시장 대변혁… 이게 다 뭔 소리야? 대체 이게 우리랑 뭔 상관인데?”
– 저번에 내가 몰빵한 회사가 거기야.
“뭐라고?”
* * *
대부분의 선수들이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휴식에 집중하는 11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선수들이 있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해외 진출, 혹은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
그들은 이제 익숙한 고향팀을 떠나 새로 둥지를 틀 곳을 찾아야 한다.
“여어, 여기여. 준영이 형, 여기.”
“먼저 나와 있었네. 여기까지 거리가 꽤 될 텐데.”
“어, 차가 하나도 안 막히더라고. 머여, 근데 웬 양복?”
“그래도 사장님 만나는데 트레이닝복은 좀 그렇잖냐. 야, 그나저나 같이 밥 먹자더니 먼저 고기를 굽고 있네?”
“흐흐, 기다리다 입 심심해서 조금 먹었어. 괜찮여. 이제 시작이니께.”
서울과 인천의 경계선 즈음에 위치한 음식점 별실.
올 시즌을 끝으로 각각 해외 진출 자격과 두 번째 FA 자격을 획득한 류한결, 임준영이 마주 앉았다.
류한결이 데뷔한 후 7년간 줄곧 국내 최고 투수 자리를 다퉜던 두 사람이다.
객관적인 평가에서는 언제나 류한결이 한발 앞서기는 했지만, 임준영에게는 그가 가지지 못한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가 있다.
어쨌든 짧지 않은 시간 국내 야구계를 양분했던 두 사람은 이제 또 한 번의 도전을 앞두고 있다.
“내일 바로 포스팅 신청하는 거지?”
“어, 그렇다네.”
“솔직히 말해봐.”
“멀?”
“어디로 갈 생각이냐?”
“나야 모르지. 에이전트가 알아서 허니께.”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솔직히 불어봐. 어디야? 제일 유력한 팀이?”
“그게 음… 나 참, 이거 진짜 어디 가서 말하면 클나는디.”
“내가 그걸 어디 가서 말해. 괜히 빼지 말고 말해봐. 마음 속으로 제일 당기는 데가 어디인지.”
임준영의 재촉에 류한결이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음… 부모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따뜻한 곳이 좋긴 허지.”
“따뜻한 곳? 혹시 LA? 다저스로 간다고? 어, 거기 선발진이 좀 빡빡할 텐데?”
“LA는 LA인데 그 LA는 아닐 거 같어.”
“어? 그럼 설마…….”
“그 설마가 맞을겨. LA 옆에 그 쪼매난 동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래저래 거기가 제일 낫긴 헌디… 형, 나를 진짜 동생으로 생각하고 한번 말해줘봐. 어떻게 생각혀?”
“음…….”
엄밀히 말하면 다른 도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팀명 앞에 같은 LA가 붙으며 명문 구단 다저스와 이래저래 비교를 당하고 있는 에인절스다.
구단 운영, 선수 육성 모든 면에서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구단.
오타니 쇼헤이가 은퇴하기 전까지 슈퍼스타를 여럿 보유하고도 좀처럼 성적을 내지 못하며 윈나우 탱킹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하던 팀.
임준영은 문득 동생 류한결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그냥 네 운명인가 보다.”
“뭐가?”
“소년가장 말이야.”
“그런겨?”
“뭐, 그래도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무엇보다 거길 가면 최소 2선발은 보장받고 들어가는 거잖아.”
“그치?”
임준영의 머릿속에 지난 7년간 류한결을 따라잡으려 노력했던 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자신보다 5년이나 후배인 녀석이지만 투수로서 임준영이 자신 위에 이름을 허락하는 건 류한결이 유일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 괴물이 등장하기 전의 일이지만.
“근디 형.”
“어?”
“그거 맛없는 부위 말고 이거 먹어. 살치살, 이게 입에서 살살 녹네.”
“흠, 싱겁긴.”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라… 형은 어쩔겨? 뉴스에서는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 거 같은데 막상 소식이 안 들리네?”
“아직 결정된 게 없어서 그래.”
“어허… 이거 봐. 동생한테는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털어놓게 하고 본인은 나 몰라라 하겠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솔직히 말해봐. 미국 안 갈겨? 혹시 인천에 계속 남을 건가? 아님 매지션스? 거기도 아녀? 음, 혹시 워리어스? 근데 거기는 돈 없잖여.”
KBO 투수 BIG3 류한결, 임준영, 최경재.
그중 류한결은 해외 진출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인 반면 나머지 두 사람은 아직 자신의 거취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임준영이 그랬다.
텍사스에서 아주 큰 오퍼가 들어왔다더라, 원 소속팀 인천에서 역대 최고 금액을 약속했다더라, 매지션스에서는 인천 제시액에 무조건 10%를 더 준다고 했다더라.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지만 임준영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장을 밝힌 적이 없었다.
“빨리 말혀봐. 궁금해서 죽겄네. 혹시 나랑 같은 지구로 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다. 그게 더 재미있으려나? 암튼 빨리 말혀. 나 속 타 죽어.”
“음…….”
류한결의 재촉에 뭔지 모를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인 임준영이 드디어 젓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 * *
“오빠!”
어쩌면 곧 류한결의 새로운 둥지가 될지도 모를 로스앤젤레스의 외각.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휴양도시 산타 모니카의 해변에서 민예린이 세상 모든 걸 가진 행복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크게 안 불러도 다 들려. 왜? 어디 다녀온 건데?”
“이거! 이거! 햄버거 먹어봐요! 와! 예전에 나 먹던 곳 없어져서 속상했는데 이게 더 맛있어요!”
“나 햄버거 안 먹는데.”
“히잉, 그러지 말고 이거 한 입만 먹어보세요.”
마이너리그 시절 먹던 딱딱한 빵과 잼, 그리고 대체 뭐로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패티에 질린 탓일까, 식단 제한을 푼 이후에도 단 한 번도 햄버거를 입에 댄 적 없던 한수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음…….”
“어때요? 맛있죠? 맛있죠?”
솔직히 말하면 맛은 없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생각했던 딱 그 맛이었다.
조금은 과하게 느껴지는 기름기와 뭔가 시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소스.
예전 같으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맛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한수혁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맛있다. 예린이 네가 딱 좋아할 맛이네.”
“그렇죠?”
“응, 그런데 나 아직까지는 식단을 좀 조심해야 하니까 남은 건 네가 다 먹어도 돼.”
“히히, 네. 안 그래도 맛만 보려고 딱 하나만 샀어요. 그럼 맛있게 먹겠습니다!”
한수혁과 민예린.
두 사람이 이곳 미국으로 휴가를 온 지도 벌써 보름여가 흘렀다.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가 끝난 다음 날 곧바로 정밀검진을 받은 한수혁은 최소 한 달간 간단한 러닝과 재활 운동 외 그 어떤 훈련도 하면 안 된다는 결과를 받아 들었다.
그 덕분에 몇몇 선수들과 함께 팀 마무리 훈련에서까지 제외되었다.
평생 운동밖에 모르고 살던 그에게는 꽤나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런 한수혁에게 민예린이 제안했다.
“오빠, 우리 같이 LA 갈래요? 아는 언니가 거기 별장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했거든요.”
별장의 주인은 한수혁 역시 아는 사람이었다. 지난번 잠깐 한국에 들어왔을 때 민예린과 함께 만났던 김은별이라는 배우.
그렇게 두 사람의 미국 여행이 시작되었다.
지난 한국시리즈 결승전에서 한 차례 포옹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아직도 두 사람의 사이는 뭐라 정의하기 힘든 그런 사이였다.
친구라 하기에는 많이 가깝고, 연인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히이잉… 이제 이 생활도 오늘이면 끝이네요.”
“음.”
지난 보름여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일과는 지루하리만큼 똑같았다.
늦은 아침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햇살이 제법 따뜻한 낯 시간에는 산타모니카 해변까지 걸어와 일광욕이나 산책을 즐기고.
민예린이 자신있게 추천해주는 해변 인근 음식점에 들러 점심을 먹고, 가끔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제로 수다를 떨기도 하고.
그렇게 해가 진 후에는 별장으로 돌아와 민예린이 해주는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민예린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수혁으로서는 난생 처음 해보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목적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도, 여자와 단둘이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그 모든 것이 한수혁에게는 너무나 새로운 일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수혁은 많은 것을 생각했고, 또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래전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여자.
그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과거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건 자신뿐이다. 그 여자는 한수혁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그냥 딱 한 번만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사람을 앞에 두고 그냥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마웠다고.
그 말 한 마디만 하고 나면 모든 걸 정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린아,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너, 미국에도 지인들이 많다고 했지?’
‘부탁! 그거 좋죠. 네, 많아요. 없으면 나가서 당장 만들게요. 그보다 무슨 부탁인데요?’
조금은 이상한 일일 수도 있지만 한수혁은 그 일을 민예린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지금쯤 열여덟 살이 되었을,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하지만 아무 단서도 없는 건 아니다.
일단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음악활동을 했다는 것, 그리고…….
‘음… 어떻게 생겼냐 하면… 키는 너보다 크고, 다리는 좀 더 길고, 대신 허리가 얇고 짧아. 그러고 보니 얼굴도 좀 더 작은 거 같… 어, 어, 야, 왜 그래? 그거 내려놔. 위험해.’
한 대 맞을 뻔했다.
어쨌든 민예린은 한수혁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한수혁은 자신에게 상처가 될 일을 시킬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름을 몰라서 어렵기는 한데… 그래도 음악을 한다고 하니까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찾아볼게요. 여기는 워낙 땅이 넓어서 아주 유명하지 않으면 찾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아! 혹시 그분 어떤 음악 하시는 분이에요? 노래 같은 거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약간은 기억나.’
‘불러보세요. 잠시만요. 여기 어플 켜볼게요.’
‘크흐흠, and somewhere…….’
‘오빠.’
‘응?’
‘됐어요. 그냥 제가 찾아볼게요.’
당연한 말이지만 보름이라는 짧은 미국 체류 기간 동안 그녀의 흔적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괜찮다.
급한 일은 아니다. 민예린의 말처럼 언젠가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될 날이 올 거다.
민예린이 차려준 마지막 저녁 식사.
어느 틈에 구해온 건지는 몰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속부터 돌려놔야 한다며 만들어준 따듯한 찌개와 반찬들.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골고루 입에 넣고 천천히 식사를 마친 한수혁이 말했다.
“예린아.”
“네, 오빠.”
“고마워.”
짧은 휴식은 끝났다.
아직 본격적인 훈련을 재개할 수는 없지만 한수혁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구단의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
박성훈 대표와 박재철 단장이 열심히 하겠지만 역시 결정을 내릴 사람이 옆에 있어야만 한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