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8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83화(184/412)
#183. 일단은 덤빌 수 있어야
모두가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은 자신만의 롤모델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말 그대로 롤 모델, 그 분야에서 정말 존경할 만한, 그리고 닮고 싶은 선수.
당연한 말이지만 올해 드래프트를 거쳐 프로야구에 입단한 100명이 넘는 신인들 중 대다수가 롤모델로 한수혁을 꼽고 있었다.
4할이 넘는 타율에 61개의 홈런과 160타점을 기록한 역대 최고 타자이자, 정규시즌 50이닝, 포스트시즌 19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무결점 투수.
한수혁이 존경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게 단순한 동경이나 존경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투수 겸 타자로 뛰는 선수들이 상당히 많다.
적어도 프로야구팀에 지명을 받을 수준의 선수들이라면 각자의 학교에서는 에이스 겸 4번 타자였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다.
“흐음…….”
올해 워리어스에 입단한 11명의 신인 중 세 명이 투타 겸업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신인과의 일대일 면담을 진행 중인 박재철.
그는 오랜만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며 기가 빨리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무지성으로 투타 겸업을 하겠다는 신인들을 설득하느라 말이다.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긴 한다.
타자로서, 그리고 투수로서 경기를 완전히 지배하는 한수혁의 모습.
메이저리거였던 자신이 봐도 이렇게 멋진데 철부지 고등학생들의 눈에는 얼마나 대단하게 보이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한수혁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입단 계약서에 사인을 한 후 첫 구단 행사나 마찬가지인 단장과의 일대일 면담이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제2의 한수혁이 되겠다는 거라니.
처음에는 설득해보려 했다.
‘으음, 그래,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요. 물론 프로라면 누구나 한수혁을 꿈꿀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혹시 그런 생각 안 해봤나? 투타 겸업을 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시즌 내내 엄청난 자기관리가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는… 글쎄요, 한수혁 선수가 괴물이라 불리는 건 그 실력이 아니라 자기관리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음, 자기관리라고 하니 제가 메이저리그에서 뛰던 시절 만났던 트레이너 한 분이 떠오르는군요. 자신을 밥이라고 부르라 했던 아주 친절한…….’
보통 박재철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한 발 뒤로 물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상관없습니다!’
‘음?’
‘꼭 하고 싶습니다! 시켜주십시오!’
‘…….’
전부 다 그런 식이었다.
평생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밀려본 적이 없는 박재철이었지만 가진 거라고는 패기밖에 없는 열아홉 살 고등학생들과의 말씨름에서 연전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난감한 노릇이다.
과연 어떻게 하면 이 철딱서니 없는 한수혁 빠돌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스프링캠프가 시작되기 전까지 박재철이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되고 말았다.
* * *
물론 워리어스에 입단한 모든 신인들이 한수혁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여기, 한수혁을 따라 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그저 같은 팀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하는 소년들이 있었다.
털썩
“…귀국하셨다더니 구단으로 안 나오고 바로 봉사활동 하러 가셨다고?”
“응, 그렇다네.”
“어디? 어디로 가신 건데?”
“코치님한테 물어보니 충청도 쪽인 거 같던데.”
“우리도 따라 갈까?”
“뭐래… 야, 지금부터 훈련 열심히 해둬야지. 그래야 내년에 1군에 얼굴이라도 내밀 거 아냐. 그래야 수혁이 형하고 같이 호흡을 맞출 수 있을 거 아니냐고.”
“…그치, 그건 그런데… 맙소사, 이러다가 우리 정말 올해는 수혁이 형님 못 보는 거 아냐?”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는 선배를 제멋대로 형님이라 부르고 있는, 야구선수 인생의 목표를 한수혁과 함께 우승하기로 잡은 두 명의 특급신인.
1라운더 최마루, 3라운더 박동석이 한수혁의 부재에 좌절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 그는 장덕수와 함께 시즌 중 부과된 사회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 * *
“그냥 남은 빵이나 먹고 말아도 되는데요.”
“에헤이, 한수혁 선수.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메밀 막국수는 한번 먹어봐야죠. 강원도만큼이나 유명하다니까요? 대표님이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거는 제대로 챙겨주라고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셨는데요. 그리고 여기 장덕수 선수를 보세요. 어디 빵으로 해결될 몸입니까?”
“음… 형, 배 많이 고프세요?”
“아녀, 괜찮여. 그냥 빵 한 박스 정도 먹으면 대충 허기는 채워질 것 같어.”
“…알았어요. 그럼 가요.”
시즌 중 벤치 클리어링으로 나란히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한수혁과 장덕수는 운영팀 직원과 함께 이곳 성진학교로 내려왔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학교, 전국에서 유일하게 청각장애 학생들로 구성된 야구부를 운영 중인 학교.
예산 부족과 선수 정원 미달로 한동안 정식대회에 출전조차 못 하던 그들은 불과 2년 전, 다시 고교야구리그에 복귀했다.
몇몇 프로구단에서 사용하던 낡은 용품들과 야구공을 기부 받고, 거기에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돈으로 간신히 운영비를 충당하고,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고, 선수 숫자는 그보다도 더 부족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리고 선생님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자기 몫을 해내겠다는, 그리고 반드시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말겠다는 각오로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 성진학교에 한수혁이 봉사를 나오게 된 건 그들에게 큰 행운이었다.
“서 대리님, 제가 말씀드린 거 서울 가면 바로 처리 부탁드릴게요.”
“네, 한수혁 선수. 저야 그게 일인데요, 뭐. 다른 건 몰라도 운영비 부족 때문에 대회 못 나가는 일은 없도록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돈이 생각보다 많이 나갈 텐데 사비로 처리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저 돈 많아요.”
“하하하, 하긴, 올해 그런 성적을 거두셨으니 연봉도 엄청 오르실 테고, 휴우, 부럽네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학교 측과 협의해서 문제 없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혹시 예전에 은퇴하신 선배님들 중에서 이 학교 감독 희망하는 분 있으신지도 알아봐 주시고요.”
“오오, 안 그래도 놀고 있는 분들이 몇 있는데… 알겠습니다. 그것도 바로 처리하죠. 자,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아이들과 처음 만난 한수혁은 그 자리에서 성진학교 야구부의 운영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딱히 인류애가 넘치거나, 갑자기 불어난 재산을 주체 못 해서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음에도 여러 제약으로 그것을 시도조차 못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민태현의 설명에 따르면 배당금만 받아도 평생 야구단 하나 운영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 했다.
그럼 된 거다.
이제 한수혁은 돈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거다.
뭔가를 꼭 해야 한다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하고 싶은 일만을 하고 사는 그런 삶.
“저쪽 골목만 돌면 나옵니다. 제가 예전에 딱 한 번 먹어봤는데… 그 집 막국수랑 수육이…….”
“수육!”
“장덕수 선수라도 반응을 해 주시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자, 가시죠. 저기… 음?”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두 사람을 안내하던 운영팀 서 대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한수혁과 장덕수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야, 이 새끼 눈빛 봐라? 사람 하나 잡겠네. 안 그러냐? 크크.”
“근데 얘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됐고, 야 이 새끼야. 내 옷에 물을 엎었으면 배상을 하라고, 배상을!”
술 취한 남자 여럿이 누구 하나를 둘러싸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겁먹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경찰에 신고를 한 듯했지만 술 취한 놈들은 그런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서 대리의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한수혁과 장덕수를 얽히게 해서는 안 된다.
벤치 클리어링으로 인해 사회봉사를 나온 선수들이 저런 폭력사태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는 순간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을 것이다.
“자, 저쪽으로 좀 돌아서 가시죠. 뭔지 몰라도 경찰이 금방 와서 해결할 겁니다. 우리는 절대 저런 일에… 한 선수? 한수혁 선수? 저기… 한수혁? 야! 한수혁!”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남자들에 둘러싸여 혼자 벌벌 떨고 있는 학생이 성진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걸 한수혁이 봐 버렸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폭력의 현장 한가운데로 한수혁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한수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장덕수 역시 바로 따라붙었다.
“그만.”
얼음장 같은 한수혁의 목소리에 놈들이 잠깐 움찔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남자들의 얼굴이 비춰졌다.
아직 앳된 끼가 남아 있는, 고작 스무 살 남짓밖에 안 되어 보이는 놈들이었다.
“뭐야? 이 새끼랑 아는 놈이야?”
“어, 나 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누군데? 이 동네 놈이야?”
사복 차림의, 그것도 가로등 조명 아래 희미하게 비치는 한수혁의 모습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두 사람을 지켜야 하는 서 대리는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알아보는 게 나았을까? 유명인이 개입한 걸 알면 그냥 물러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뭔가를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다.
술이 잔뜩 취한 놈들이 타깃을 한수혁으로 바꾸려던 순간,
쿠웅
“머여.”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수십 명의 상대를 혼자 쓰러뜨리는 주인공이 등장하곤 한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맨몸으로 수십 명을 상대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아주 잠깐 삐끗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 즉시 게임은 끝나는 거니까.
하지만,
“머냐고.”
그것도 수십 명이 동시에 덤벼들 수 있을 때의 얘기다.
애초에 덤벼들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대로 게임은 끝인 거다.
어두운 골목길,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괴물의 실루엣.
시즌이 끝나고 몸이 좀 불어난 탓인지 키 2미터, 몸무게 125㎏를 돌파한 장덕수의 등장에 놈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혀봐.”
“네?”
“혀보라고.”
“대체 뭘……?”
“하려던 거 해보라고, 이 잡놈 새끼들아.”
“히익!”
장덕수의 으름장에 열 명이 넘는 사내들이 반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그대로 어디론가 도망가버렸다.
“장덕수 선수! 한수혁 선수! 여기서 이러시면… 어이, 거기 찍지 마세요! 찍기 말라고! 아, 안 되겠네. 일단 저쪽으로, 여기 이분도 일으켜드리고. 어? 성진학교 학생이네?”
뒤늦게 달려온 서 대리가 현장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신고 받고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고, 결국 일행은 저녁식사조차 포기한 채 파출소로 향해야 했다.
물론 한수혁을 알아본 누군가가 현장 동영상을 제보해준 덕분에 아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놈들 대충 누구인지 알겠으니 걱정 마세요. 일단 잡은 후에 다시 학교 측으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보다 한수혁 선수.”
“네?”
“WBC의 영웅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시 바쁘지 않으시면 여기 파출소에 걸어놓게 사인 하나만 해주 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