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8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84화(185/412)
#184. 기회
“자, 그럼 이제 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안건이 여러 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로 묶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KBO와 메이저리그 사무국 간의 협력 강화, 한미 간 포스팅 시스템 개편, 그리고 거기에 조건부로 따라오는 몇 가지 개정안의 도입이 오늘 윈터미팅의 안건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윈터미팅이라 하면 리그 운영과 관련된 여러 현안들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트레이드와 관련해 각 구단 사장과 단장이 한데 모여 논의하는 모임을 뜻한다.
한국 야구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미국과 달리 트레이드와 관련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조금 다르다.
특히나 오늘처럼 단장이 아닌 사장급 모임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더더욱.
KBO의 요청에 따라 한 곳에 모인 10개 구단 사장단.
구단 대표 겸 사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박성훈이 묘한 표정으로 다른 구단 사장들을 둘러보았다.
‘이 인간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리그이기는 하지만 한국과 미국, 일본 각국의 프로야구 사무국들은 서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선수의 해외리그 진출부터 시작해서 선수 및 코치진 간의 기술 교류, WBC 주최 등 야구 세계화를 위한 공동 사업, 그리고 리그 활성화를 위한 공동 마케팅까지, 서로 협력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세계 야구판에서 한국은 항상 약자였다는 점이다.
미국과 일본이 주도적으로 끌어가는 시장에서 언제나 손해를 보는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뭔가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간 한국 측이 원했던 여러 가지 사안들, 예를 들면 25세 이하 국제 유망주 계약과 관련된 일부 규정 개정이라든지 한국에서의 메이저리그 개막식 개최, 선진 야구 기술 교류를 위한 연수 프로그램 마련 등등.
이런 한국의 요구에 대해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온 것이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당연하게도 몇 가지 부가적인 사안들이 딸려 왔다.
일단 미국 측은 현재 7시즌 이상으로 되어 있는 한국 선수의 해외진출 포스팅 규정을 일본과 동일하게 맞추자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몇 차례 변경이 가해지기는 했지만 2027년 현재 일본 선수들은 한 시즌 이상만 뛰면 곧바로 포스팅을 통해 메이저리그로 진출할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제약들이 따라붙긴 했지만 어쨌든 7시즌 이상이 강제되는 한국보다는 해외진출이 훨씬 자유로운 상황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일본과 한국, 각각 다르게 체결되어 있는 포스팅 관련 규정을 이 기회에 삼국 모두 동일하게 개정하자는 입장이었다.
이유야 뻔했다.
한수혁.
WBC를 통해 자신의 기량을 세계에 알린 초특급 유망주.
아직까지도 한수혁에 대한 일부 비관적인 시선들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 KBO에서 올린 기록은 하위리그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든지, WBC 같은 단기전 활약만으로 빅리그에서의 성공을 낙관할 수는 없다든지, 그런 것들 말이다.
시즌 162경기를 치러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동거리, 거기에 KBO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리그 수준으로 인한 피로감,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시아 선수들의 고질적인 문제인 내구성 등등.
메이저리그 일부 전문가들이 한수혁을 깎아내리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 구단들에게 한수혁은 무조건 긁어봐야 할 복권이었다.
25세 이하 외국인 선수들은 3년 차까지 최저 연봉에 묶여 있어야 한다.
2천만 달러로 제한되는 포스팅비를 모두 지불한다 해도 한수혁 같은 선수를 최저 연봉에 3년 동안 기용할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아닐 수 없다.
내부 사정 때문에 반대하는 구단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빅리그 구단들이 이번 한미 포스팅 규정 개정에 찬성표를 던진 이유다.
그렇게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입장이 정해졌고, 한국 구단들을 유혹하기 위한 달콤한 제안들과 함께 포장되어 KBO로 전달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제안을 받아 든 한국 구단들 대부분이 적극적인 수용의사를 보였다는 거다.
‘그런 미친놈은 빨리 미국으로 내보내야 해.’
포스팅 규정이 통과된다고 해도 곧바로 한수혁이 미국 진출을 할 리는 없지만 어쨌든 빠져나갈 구멍은 열어 놔야 한다.
지금 이 상태대로라면 앞으로 최소 6시즌 동안 저 악마 같은 한수혁을 상대해야 한다.
열어주자. 어차피 포스팅으로 미국에 건너갈 선수는 10년에 한둘 나올까 말까다.
게다가 선수가 포스팅을 원한다 해도 구단이 승인을 안 해주면 그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 괴물을 KBO에서 쫓아내기 위한 거다.
빅리그 구단들이 한수혁을 데려오기 위해 제안한 개정안을 한국 구단들 역시 한수혁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타니 룰, 그것도 꼭 적용해야 합니까? 괜히 그것 때문에 선수들이 헛바람이 들어서 너도 나도 투타 겸업을 하겠다고 나서면…….”
‘얼씨구?’
인천 레인저스 사장의 발언에 박성훈이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구구절절 다른 이유를 대고 있지만 그냥 싫은 거다.
안 그래도 상대하기 어려운 한수혁에게 오타니 룰이라는 날개를 달아주기 싫은 거다.
하지만 어쩌랴,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오늘 논의된 여러 사안들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 보내왔다.
단 하나라도 한국이 거부하면 모든 건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자, 그럼 투표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한미 간 공동사업 협력 및 일부 규정 개정안에 대해… 찬성 8표, 반대 2표로 가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 *
“수혁아, 소식 들었냐?”
“무슨 소식이요?”
“포스팅 시스템이 바뀐다네. 그리고 오타니 룰도 내년부터 적용된다고 하고. 잘됐네.”
“그런가요? 뭐 확실히 도움은 될 것 같네요.”
“그려, 암튼 그나저나 쟤가 어제 갸 맞지?”
“흠, 그런 거 같아요. 가보죠, 제가 얘기해볼게요, 덕수 형.”
“그려, 먼 일인지는 몰라도 혼내지는 말고 말로 혀.”
어젯밤 우리가 구해준, 뭔 일인지 몰라도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었던 놈은 다름 아닌 성진학교의 야구부 선수였다.
첫날 훈련을 빼먹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놈이 왜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었나 궁금했는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금 이해가 가긴 했다.
오랜 시간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며 전력을 다해 달려온 아이.
음, 신체적 나이로만 따지자면 나와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 놈을 아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언론에 이름을 오르내리며 사상 첫 청각장애 프로야구 선수가 될 거란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봉사활동을 오기 며칠 전 대전과 부산에서 실시한 육성선수 테스트에서도 탈락했고, 그 상태로 길거리를 헤매다가 불량배들하고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최재민이라고?”
이번 봉사활동 동안 수화를 도와주고 있는 선생님이 급하게 따라붙어 녀석에게 내 말을 전했다.
“맞다고 하네요.”
“좋아, 얘기는 대충 들었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내 입에서 프로야구 선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화색이 된 선생님이 다시 그 말을 최재민에게 전달했다.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녀석의 중간에서 선생님이 바쁘게 움직이며 수화를 이어갔다.
“네, 한수혁 씨.”
“일단 한 가지는 확실히 하자고, 나는 임시지만 너희를 가르치러 온 선생이라는 거.”
“…그럼 한수혁 선생님?”
“음, 그것도 뭔가 좀 이상하네. 됐다. 그냥 형이라고 불러라. 아무튼, 일단 유니폼을 입었으면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겠지. 어디 한번 보여줘봐. 네 실력을. 포지션은 어디인데?”
“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을 그라운드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녀석의 실력을 관찰했다.
이 팀의 주전 유격수이자 4번 타자라고 한다.
물론 실력은 딱 생각했던 대로였다.
정식 프로 선수가 되기에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육성 선수로는 한번 키워볼 만한, 특히 타석에서의 집중력과 배트 스피드, 그리고 선구안만큼은 제법 쓸 만한 녀석이었다.
역시나 문제는 딱 하나였다.
“최재민, 이리 와봐.”
“네, 선생님.”
“선생님 말고 형.”
“네! 수혁이 형!”
수화라는 건 참 이상하다.
분명 중간에 다른 사람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이상하게 그 손짓 하나하나에 감정이 묻어나오는 걸 느낀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좋아, 너도 이미 아는 얘기겠지만 정리하는 차원에서 내 의견을 말해주지. 청각장애를 갖고 프로야구 선수로 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 수비수는 쉴 새 없이 다른 동료들과 의견을 주고받아야 하지. 타격음만 듣고도 타구의 방향과 위치를 예측해야 하고. 주루도 마찬가지야. 사인만 보고 플레이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니까.”
“네… 형, 알아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너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 타격, 주루, 수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거 같은데… 맞지?”
“맞아요. 남들보다 두 배 더 노력해서 최대한…….”
“아니.”
내가 바로 말을 끊어버리자 녀석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 공수주를 모두 갖추려 했다… 물론 틀린 길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노력만으로 장애를 뛰어넘는 게 불가능하다면?
녀석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필요했다.
“하나만 묻자. 네가 되고 싶은 건 프로야구 선수로서 정상에 올라 돈과 명예를 안고 싶은 건가?”
“아니요.”
“그럼?”
“그냥…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장애가 없는 사람들처럼 제 몫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딱 한 타석, 혹은 수비 한 이닝만이라도 그라운드에 나가 그걸 증명하고 싶어요.”
“좋아.”
방금 녀석의 대답이 최재민이라는 야구선수의 앞길을 결정했다.
그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걸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예전의 내게는 그걸 도와줄 사람이 전혀 없었다면, 지금 녀석에게는 내가 있다는 점이 달랐다.
나는 결국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나서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재민이라는 야구선수에게 필요한 건 그저 누군가의 작은 배려와 관심뿐이다.
“최재민.”
“네, 형.”
“다 잘할 생각을 버려. 내가 보기에 넌 타격에 꽤 재질이 있어 보이거든. 잘만 다듬으면 1군에서 왼손 대타 정도로는 충분히 활용 가능할 거 같은데.”
“정말이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래.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줄까? 공수주 중에서 그나마 청각에 가장 덜 영향을 받는 게 타격이야. 볼 판정은 베이스 코치가 수신호로 알려주면 되고, 타석에 들어선 선수가 누군가와 말을 섞을 일은 없으니까.”
“아…….”
“하루 연습 중 타격에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하지?”
“절반… 정도요?”
“팀 훈련 말고 개인 훈련시간 전부를 타격에만 투자해봐.”
“네? 정말 그래도 될까요?”
“돼. 어차피 정석대로 해도 안 될 일이라면 모험이 필요한 거니까. 다만…….”
“다만……?”
“네가 설사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 해도, 그래서 타석에 들어선다 해도 주루나 수비를 맡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꿀꺽
녀석의 침 넘기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려왔다.
“타격 딱 하나만 보고 쓸 수 있을 정도로 방망이를 잘 쳐야 한다는 거다. 주루도, 수비도 안 되는 선수를 왜 엔트리에 두는지 누군가 물었을 때 아, 쟤보다 나은 대타는 우리 팀에 없거든. 딱 그런 소리가 나오게 말이야.”
“이해했어요!”
“물론 지금 내가 말한 건 그저 가능성일 뿐이야. 말이 그렇지, 주루와 수비도 안 되는 반쪽 선수가 1군 엔트리에 들어가려면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를 테니까. 그래도 한번 해볼 건가?”
“네, 형! 전 꼭 해보고 싶어요.”
“좋아, 그럼 내가 여기 있는 며칠 동안 직접 공을 던져주마. 내 공을 하나라도 친다면 바로 워리어스 육성선수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게 해주지.”
“진짜요? 정말요?”
“그래,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러니까 어디 한번 하고 싶은 걸 해봐.”
누군가는 말한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이라고.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하라고. 그게 세상을 잘 사는 지름길이라고.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는 굳이 그런 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될 힘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될 자유가 있다.
저 녀석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른다.
정말 워리어스의 육성선수가 될 수 있을지, 설사 된다 해도 2군 무대를 뚫고 1군까지 올라와 그렇게 소원하던 프로 무대를 맛볼 수 있게 될지.
솔직히 말하면 확률은 아주 낮고도 낮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녀석에게 기회를 줘볼 생각이다.
그 작은 기회가 녀석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그리고 언젠가는 저 작은 소년이 어른이 되어 또 누군가의 인생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내가 예전에 되지 못했던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