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8화(19/412)
#18. 연습경기 (2)
야구계에는 한 번 터진 마무리 투수는 반드시 또 터진다는 속설이 있다.
물론 자신은 마무리가 아닌 선발 투수이지만 공을 던지기 전부터 뭔가 뒤통수가 근질거리는게 기분이 찝찝하다.
배터 박스를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피지컬, 까까머리를 한 1년차 신인 주제에 마치 이 바닥에서 10년 이상 구른 것 같은 거만한 눈빛을 가진 저 신인.
첫 타석에서 얻어맞은 거대한 홈런의 잔상을 억지로 털어버린 수원의 에이스 최경재가 한수혁을 향해 혼을 담은 포심을 던졌다.
그리고.
따아아아악!
“···씨발.”
그 혼을 담은 공이 또다시 한수혁의 스윙에 제대로 걸렸다.
어퍼 스윙에 걸려 엄청난 포물선을 그렸던 첫 번째 타구와 달리 이번에는 빨래줄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간 타구가 외야 관중석을 그대로 직격했다.
쾅 하는 소리만 들어서는 아무래도 의자를 박살낸 것 같은데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다. 저놈이 얼마나 대단한 신인인지.
한국, 아니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비공식이나마 165km/h를 던진 괴물이다.
하지만 지금 저놈이 서 있는 곳은 마운드가 아니라 타석 아닌가.
물론 고교 시절 타자로서도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자신이 알기에 분명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도대체 던질 곳이 하나도 없다.
어디로 던져도 얻어맞을 것 같다.
방금 한수혁을 두 번째 상대한 최경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몸 쪽 높은 곳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낮은 코스는 이미 홈런을 처맞은 바 있다.
바깥쪽 낮은 코스로 몇 개를 던져봤는데 아예 꿈쩍도 않길래 가장 자신 있는 포심을 던졌다.
자신이 보기에도 썩 괜찮은 공이 코스 구석으로 찔러 들어갔다.
그런데 저 괴물 같은 놈이 그 공을 그대로 후려쳐 우측 관중석에 꽂아버렸다.
몇 년 전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팀 최대 유망주라는 놈을 상대할 때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 그놈은 데뷔 3년차에 내셔널리그 MVP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진짜야?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는데도 워리어스가 좋아서 국내에 남은 거야?’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구단과 계약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350만 달러라는 계약금에 뭔가 조건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으리라 속단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시애틀 단장이었다면 350만이 아니라 500만, 아니, 과감하게 천만 달러를 질러서라도 무조건 미국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천천히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돈 그 괴물이 홈플레이트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음 타자에게 뭐라고 속닥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실은 스테이크 사고 싶지 않으면 끝까지 볼을 고르라는 얘기중이었지만 최경재의 눈에는 마치 한수혁이 자신의 약점을 알아내어 다음 타자에게 전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발시발’
뭐지, 나도 모르는 버릇 같은 게 있는 건가? 그런 게 있으면 대한이 형이 알려줬을텐데?
당황한 최경재가 포수 정대한을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한수혁과 맥스 워커가 영어가 떠들고 있었기에 전혀 알아들을 방법이 없었다.
최경재의 멘탈이 마구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안한 마음은 제구력 난조로 이어졌고 결국 좌타자인 맥스 워커에게 백투백 홈런을 얻어맞고 말았다.
* * *
“으흐흐흐, 친구, 봤어? 어때? 내 홈런도 제법 쓸 만했지?”
“잘했어. 외국인노··· 아니, 맥스.”
“크하하, 고마워. 우리는 최고의 클린업이 될 수 있을 거 같군.”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최경재에게 홈런을 빼앗은 맥스 워커가 덕아웃에서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내 조언을 받아들인 맥스는 최대한 스윙을 부드럽게 가져가는데 주력했고, 그 결과 좋은 타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방금 이 놈이 때린 공은 꽤나 까다로운 코스였으니까.
피 같은 달러를 주고 데려온 놈이 내 뒤에서 오늘처럼만 해준다고 하면 꽤나 시너지가 일어날 것이다.
물론 타순을 짜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흠.
앞에서 나와 맥스가 연거푸 큰 걸 터뜨렸음에도 용케도 볼을 잘 지켜보던 안치욱은 결국 최경재의 몸쪽 변화구에 아쉽게 삼진으로 물러났다.
“공 잘 봤네. 기 죽지 마. 안치욱. 저 선배 공이 워낙 좋아서 그런 거니까.”
“그 좋은 공을 넌 2개나 담장 밖으로 넘겼는데?”
“그야 내가 대단한 거고.”
“······”
그렇게 안치욱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최경재는 다음 투수와 교체되었다.
코치에게 공을 넘기고 마운드를 내려가던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우리 덕아웃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나에게 얻어맞은 연타석 홈런이 머리속에 꽉 차 있을 것이다.
좋은 징조다.
우리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경우 상당히 높은 확률로 만나게 될 팀의 에이스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었으니까.
정규시즌에 들어가서 큰 거 몇 방만 더 때려주면 아주 나만 보면 오줌을 질질 싸게 될 것이다.
“아웃!”
최경재가 오줌을 지리든 말든 경기는 계속되었다.
신입들의 홈런에 기운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수원 커맨더스의 투수들이 아직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걸까.
4대 3 한점차로 끌려가던 우리 팀은 조성오 선배의 적시타와 김수학 선배의 절묘한 스퀴즈, 그리고 상대 실책 등을 묶어 단숨에 3점을 추가하며 6대 4로 게임을 뒤집는데 성공했다.
반면 정태호 선배의 뒤를 이어 받은 라이언 스타크와 브룩스 파커, 두 명의 용병은 각각 2이닝씩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이대준 감독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그 사이 정기호 선배와 이창모 선배가 연속 볼넷으로 출루했고, 내가 날린 타구가 또 한 번 경기장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따아아악!
발사각이 워낙 낮았던 탓에 홈런이 되지는 못했지만 외야수가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펜스를 직격한 2루타로 스코어는 8대 4로 벌어졌다.
이제는 스테이크를 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한껏 가벼워진 맥스 워커가 또 한 번 큰 스윙을 해보았지만 상대 좌익수의 호수비에 걸리며 아웃. 그 사이 나는 3루로 진루.
타점을 올리겠다는 생각에 공을 정확히 맞추는데 집중한 안치욱이 희생플라이를 만들어내며 다시 1점 추가.
스코어 9대 4.
내기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자기 출루를 포기하고 가벼운 스윙으로 희생플라이를 만들다니.
음.
이런 게 바로 강아지를 키우는 맛 같은 건가? 처음으로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을 때의 기쁨이란 게 이런 걸까?
모르겠다. 메이저리그 시절 후배에게 조언을 해준 적도 없고, 그렇다고 진짜 강아지를 키워본 적도 없으니.
그저 생각보다 내 말을 잘 따라오고 있는 저 놈이 기특할 뿐이다.
“방금 공은 배트 스피드가 조금만 빨랐어도 2루타였어. 오늘 경기 끝나고 스윙 만 번.”
“······”
괜히 어깨에 힘 들어가지 않게 한 번 눌러주고.
그나저나 실전을 치러보니 의외로 더 괜찮다.
출루율이 3할 중반에도 못 미치는 저 테이블 세터가 조금 문제이기는 하지만, 내가 3번에 서고 좌타자인 맥스가 4번, 오늘 타점을 올린 조성오 선배가 5번, 그리고 저 정신 나간 놈이 대오각성해서 6번에 서주기만 한다면···
그렇게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황성민 대신 대타로 나선 장덕수 선배가 좌측 담장을 살짝 넘기는 홈런을 때려냈다.
캠프 내내 황성민과 송기태의 등쌀에 눌려 울상이던 그가 모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라운드를 돌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덩치만큼이나 힘 하나는 진짜 제대로다.
그러고보니 아직 장덕수라는 포수에 대해 파악한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
그냥 황성민과는 달리 포크볼을 잡을 줄 알고, 투수를 윽박지르기보다는 편하게 해줄 줄 아는 선수라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만에 하나 황성민의 트레이드가 성공하면 저 선배가 주전 포수로 나서야 하는데···
그렇게 워리어스가 10대 4로 크게 앞서 나가자 이대준 감독은 나와 맥스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을 벤치로 불러들였다.
우리 마운드에는 토종 에이스 이만식 선배를 시작으로, 이 팀의 필승조와 마무리투수 후보가 줄줄이 올라와 6점차 리드를 지키기 위한 혼신의 투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15대 10으로 패배했다.
* * *
“수고 많았습니다. 좋은 팀을 만드셨네요.”
“···덕담 감사합니다. 오늘 수원에게 한 수 배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선배님.”
수원 커맨더스와의 경기가 끝난 후 이대준 감독은 홀로 구장 사무실로 돌아와 가만히 눈을 감았다.
10대 4로 크게 앞서가던 경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내심 4선발로 생각하고 있는 정태호가 1회 4점을 내준 건 그냥 사고라 치부할 수도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실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넘어가자.
그것까지 고민하다가는 사표를 던지고 싶을 것 같으니까.
그 뒤를 이어 등판한 라이언 스타크와 브룩스 파커는 꽤 좋았다.
지난 시즌 이 팀의 막장 수비에도 불구하고 나란히 3점 후반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두 용병은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팀의 원투 펀치가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현재 팀 사정상 무조건 3선발을 맡아줘야 할 이만식이 2이닝 동안 1실점을 한 건 그럭저럭 납득할 만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안타를 3개, 볼넷을 2개나 내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짜 핵폭탄은 그 다음에 터졌다.
홍영식을 필두로 한 이 팀의 필승조들과 마무리 최정수가 개 털리듯 털리며 순식간에 10점을 내준 것이다.
사실 이대준 감독에게 이런 모습이 마냥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예전 그가 현역으로 뛸 때도 이랬다.
부족한 투수력을 타격으로 메우는 팀, 그것이 바로 워리어스의 정체성이었다.
문제는 지금 이 팀의 경우 타격마저 개판이라는 거다.
한때 리그를 호령했던 워리어스의 강타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한 마디로 투타 양면에서 답도 없는 팀이 되어버린 것이다.
10대 4로 앞서던 스코어가 순식간에 15대 10으로 뒤집어지던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속에서 재생되었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위가 아파온다.
이러다가 고질병인 위염이 다시 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 되겠다. 좋은 것만 생각하자.
‘한수혁···’
방금 전 연습경기 첫 타석에서 어마어마한 장외홈런을 때려낸 후 거만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돌던 한수혁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위 전체로 번져 나갈 것 같던 고통이 차츰 가라앉는다.
머리속에 꽉 들어찼던 이번 시즌에 대한 걱정이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 들어간다.
됐다. 효과가 있다.
그래. 비록 팀이 이 모양 이 꼴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는 한수혁이라는 최강의 카드가 있지 않은가?
워리어스가 좋다며 메이저리그까지 걷어찬 역대 최고의 루키.
고교 시절 165km/h를 던지며 자신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린 월드클래스 유망주.
비록 올 시즌 1년 간은 그 멋진 투구를 볼 수 없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입단하고 첫 해 어깨 부상으로 드러눕는 신인 투수가 어디 한 둘이던가.
부상당했다 치고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다.
‘아니, 설사 투수를 못한다고 해도···’
솔직히 말하자면 투수를 영영 못해도 상관없을 거 같은 기분이다.
그 녀석이 친 홈런타구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저게 과연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타구의 궤적인가?
자신이 마운드에 서서 저런 타구를 맞는다면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아 오줌을 지려버렸을지도 모른다.
공격력에 묻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고 있는 수비력은 또 어떤가.
유격수와 3루, 2루, 어디에 던져 놓아도 제 몫을 해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프로에서 십년 이상 굴러먹은 베테랑처럼 노련한 플레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심지어 리더십까지 갖췄다.
2군으로 처박을까 고심하다가 단장의 지시 때문에 일단 캠프에 그대로 뒀던 안치욱.
그리고 아직 팀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새 외국인 용병 타자 맥스워커.
그 두 놈을 데리고 출루 내기를 했다는 소리를 듣고 온 몸에 전율이 일기도 했다.
올해 입단한, 이제 고작 스물에 불과한 어린애가 대체 어떻게 그런 발상을 떠올렸던 걸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기를 한 그 세 놈에게 곧바로 외출허가를 내려주었다. 나가서 스테이크를 실컷 사 먹고 오라고 말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겠군’
이대준이 자신의 책상에서 다이어리 하나를 꺼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 시즌 팀의 전력구상이 담긴 자신만의 비밀 노트였다.
당초 물음표로 되어 있던 유격수 자리에 한수혁이라는 이름을 적어보았다.
갑자기 자신감이 차오르고,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불러온다.
역전패를 당한 후부터 시작되었던 위통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지 오래다.
‘한수혁···’
모든 고민과 번뇌에 대한 해답은 다름 아닌 한수혁이었다.
스프링캠프가 거의 끝나가고 시범경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한수혁에 대한 이대준 감독의 의존도는 최고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