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94)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93화(194/412)
#193. 팀에 필요한 선수
[Small opportunites are often the beginning of great enterprises.]작은 기회로부터 종종 위대한 업적이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가 남긴 말이다.
프로야구단의 한 팀에 소속된 선수의 숫자는 대략 100명.
1, 2군에 정식 등록된 선수만 60여 명이고, 그 외 등록되지 못한 육성선수와 군입대 선수의 숫자를 모두 합하면 그 정도의 숫자가 나온다.
그런데 그중 1군 출장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선수는 기껏해야 30명 내외다.
이제 데뷔 1년 차에 불과한 선수가, 그것도 다른 어떤 포지션보다 경험이 우선시되는 포수가 1군 무대에 서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여기 주전포수 장덕수의 부상으로 갑자기 1군으로 콜업된 신인 포수 하나가 있다.
본래대로라면 우익수 겸 백업포수를 맡고 있는 월터 스미스가 포수 마스크를 썼겠지만, 이대준 감독은 지금이 신인 포수에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줄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7할에 가까운 팀 승률, 거기에 포수가 누구인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에이스 한수혁의 등판일.
심지어 상대할 팀이 시즌 시작부터 대놓고 탱킹을 하고 있는 서울 파이터즈다.
이대준이 박동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긴장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걸 해봐. 수혁이가 잘 리드할 테니까.”
“네? 네, 네! 알겠습니다! 감독님!”
“깜짝이야. 소리는 지르지 말고 조용히 대답해. 혹시 고참들이 목소리 크게 하라고 군기라도 잡은 건가? 야! 누구야, 누가 우리 막내한테 겁을 준 거야, 어?”
“아닙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흐흐흐, 알아. 우리 팀에 그런 놈 없다는 거. 아무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편하게 해도 돼. 오늘 경기로 너를 평가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냥 마침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고 나는 너에게 작은 기회를 주려는 거야. 이해했나?”
“감사합니다!”
오늘 1군에 콜업될 거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리고 포수 마스크를 쓰고 한수혁의 공을 받게 될 거라는 걸 알았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시범경기에서 한 번 경험해보긴 했지만 1군 정식 경기에서 한수혁의 공을 잡으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 친구들이 말했다.
주전의 부상을 틈타 맹활약하면 그 자리를 대신 꿰찰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고, 목숨을 걸고 도전해보라고.
전혀,
워리어스 입단 당시 쥐꼬리만큼이나마 있던 자신감은 2군 무대에서 2달을 뛰며 말끔하게 사라졌다.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질, 타자의 실력, 경기의 스피드, 모든 면에서 고교야구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2군 무대가 이 정도인데 자신에게 1군 주전포수를 노려보라고?
그게 가능할 리도 없지만, 설사 자신에게 그런 자리를 준다 해도 먼저 사양해야 할 판이다.
팀과 팬들에게 대역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좋아, 일단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자.’
감독이 말했다. 할 만큼 해보고 정 벅찰 것 같으면 즉시 월터로 교체해주겠다고.
욕심 내지 말자.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건 아주 작은 기회일 뿐이다.
그 기회를 살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다시 2군으로 가서 열심히 경험을 쌓으면 된다.
‘좋아.’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진다.
장비 착용을 모두 마친 박동석이 오늘 자신과 배터리를 이루게 될 한수혁에게 다가가 구십도로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뒤로 공을 흘리지 않겠습니다!”
* * *
누군가 나를 의지하고, 따르는 느낌이 꽤나 낯설고 생소하다.
15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미국에서는 나도 누군가에게 선배 대접을 한 기억이 없고, 반대로 나를 따르려는 루키들과 특별한 관계를 만든 적도 없다.
그냥 비즈니스로 만난 직장 동료, 딱 그 정도 간격을 유지했다.
그런데 난생 처음 후배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불과 한 살 차이에 불과한데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어려워하고 따르는 녀석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눈꼬리 옆에 습기가 잔뜩 고인 녀석에게 말해주었다.
“흘려도 돼.”
“네? 오노! 절대! 네버! 목숨을 걸고 막아내겠습니다!”
“괜찮다니까.”
“제가 안 괜찮습니다!”
“흠.”
“아! 혹시 너클볼용 미트를 준비했어야 하는 걸까요?”
지난 한국시리즈에서 내가 너클볼을 몇 번 던진 후 장덕수와 월터는 그 공에 대한 나름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공을 받지 못해 안방을 내줘야 했던 장덕수는 겨울 내내 너클볼을 던질 줄 아는 불펜 투수와 함께 포구연습을 했다.
큰 실수 없이 내 공을 잡아낸 월터 역시 뭔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얼굴이었다.
뭐라더라, 내가 자기 실력을 못 믿어서 제대로 된 너클볼을 안 던졌다나.
음, 진실이야 어쨌든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너클볼을 던질 생각이 없다.
가끔 써먹으면 확실히 좋은 무기이긴 한데, 투구 매커니즘상 너클볼을 계속 던지다 보면 포심 구속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107마일, 그러니까 172㎞/h를 던지는 거니까.
“아니, 너클볼은 던질 생각 없는데.”
“아앗! 네, 알겠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군기가 든 1년 후배를 앉혀 놓고 연습투구를 시작했다.
벌써 6월이다. 이제 한 달만 지나면 올스타전과 올림픽 브레이크가 시작된다.
지난 WBC에서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조금 무리를 하긴 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국가대표 경기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팬들은 벌써부터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최근 들어 국내 프로스포츠의 국제대회 성적이 영 좋지 못하다.
축구, 배구, 농구 대표팀들이 돌아가며 욕을 먹고 있다. 사실 야구 역시 마찬가지 신세였지만 지난해 WBC 우승으로 면죄부를 받은 상황이다.
영원한 숙적 일본은 고사하고 예전에는 쉽게 이기던 중국이나 대만, 필리핀, 태국 같은 팀에게도 심심치 않게 패배하는, 그래서 한국 프로 스포츠는 배부른 돼지들의 레저라는 인식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단다.
그렇기에 KBO와 KBSA에서는 어떻게든 이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며 선수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대표팀 최종명단에 포함된 선수들에 대한 특별관리는 물론이고, 대회기간 선수단 지원 준비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올림픽에서 우리 팀이 성공할 거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서형주나 안치욱 같은 풋내기들을 이끌어야 하는 게 조금 부담이 되긴 하지만…….
음, 일단은 그 풋내기들은 둘째 치고 저기 저 애송이부터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까닥
내가 손가락으로 부르자 박동석이 꽁지가 빠져라 마운드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쉿, 경기 시작 후에는 조용히.”
“아앗, 네, 네, 알겠습니다.”
“좋아, 사인은 내가 낼 테니까 넌 그냥 그 자리에 미트만 가져다 대면 돼. 혹시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말하고.”
“사인은 선배님이… 미트만 제대로… 네, 이해했습니다.”
“타자가 이상한 소리 하면서 겁주면 참지 말고 그대로 한 대 갈겨버리고 내 쪽으로 도망와.”
“일단 한 대 갈기고, 선배님 쪽으로… 네?”
“쫄지 말란 소리야.”
“아, 네, 이해했습니다.”
“좋아, 시작해보자.”
* * *
지난 시즌 워리어스가 우승을 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무려 14승을 헌납하고 단 2승밖에 거두지 못한 부산 타이탄스였고, 바로 그 다음이 12승 4패를 기록한 서울 파이터즈였다.
처절하게 밀린 상대전적, 시즌 중 있었던 몇 번의 다툼, 구단의 지원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
이래저래 워리어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지만 파이터즈 선수들은 그걸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워리어스에는 장덕수와 한수혁이라는 KBO 벤치클리어링의 쌍두마차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꾹꾹 눌러 두었던 파이터즈 선수들의 분노가 조금씩 고개를 디밀고 있었다.
한 손으로 사람을 들어 올려 마운드에 심어버리는 괴물이 부상으로 덕아웃을 비웠다.
거기에 또다른 괴물은 오늘 선발투수다.
저놈을 직접 자극하면 곧바로 머리통으로 170㎞/h 공이 날아올 것이기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말하면 선을 넘지 않은 한 녀석도 퇴장당할 짓은 하지 않을 거란 소리다.
파이터즈 선수들의 시선이 만만한 먹이감 쪽으로 향했다.
아직 고등학생 티도 채 벗지 못한 1년 차 신인 포수에게로 말이다.
“선배 만났으면 인사부터 안 하냐? 요즘 것들은 빠져 가지고.”
끊임없이 날아오는 타자들의 정신 공격.
슈웅
“허억!”
“볼!”
“우우우우!”
겁을 주기 위한 것이 분명한 빈 볼.
차라리 대놓고 괴롭혀 벤클이 터지면 그게 더 나을 지도 모르련만,
선을 넘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상대를 압박하는 플레이가 박동석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 눌렀다.
따악
“아웃!”
“헉헉헉…….”
“쯧쯧… 암만 봐도 오늘이 1군 마지막일 거 같다. 방망이가 그래서야 어디 1할이라도 치겠어?”
땅볼타구를 치고도 전력을 다한 박동석에게 파이터즈의 1루수가 감정 섞인 비아냥을 내뱉았다.
하지만 박동석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떨어진 헬멧을 주워 들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파이터즈 선수들은 이 불쌍한 신인 포수를 집중적으로 괴롭혔다.
하지만 박동석은 무너지지 않았다.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그리고 7회.
생애 첫 1군 무대에 오른 신인 포수는 죽을 힘을 다해 한수혁의 공을 받아냈다.
2군에서의 두 달간 주전포수로 뛰며 나름 경험을 쌓았다고는 했지만, 1군 무대에서 한수혁의 공을 받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고 구속 170㎞/h에 달하는 공을 받을 때면 손바닥에서 시작된 짜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존 안으로 들어오던 155㎞/h짜리 고속 슬라이더가 밖으로 휙 꺾여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축축해진다.
‘타자들이 못 치는 게 당연한 거구나. 잡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150㎞/h가 넘는 스플리터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놀랐지만 2군에서 배운 대로 침착하게 몸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헉헉…….”
모든 에너지를 오직 한수혁의 공을 잡아내는 데만 쏟아부은 탓에 타석에서는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세 번째 타석에서 어이없는 삼진을 먹었을 때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 몇 년은 2군에서 올라올 일이 없겠구나. 나 진짜 야구 못하네.’
조금 분하긴 했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기에 더욱 이를 악 물고 뛰었다.
당분간 올라올 일 없는 1군 무대, 그리고 한수혁의 공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테니까.
“좋아, 수고했어. 여기까지 하자.”
“헉헉… 감사합니다.”
워리어스가 5 대 0으로 앞선 7회초, 한수혁이 3명의 타자를 깔끔하게 막아내자 이대준은 배터리를 한꺼번에 교체해주었다.
한수혁 대신 김두영이 마운드에 오르고, 박동석을 대신해 월터 스미스가 포수 마스크를 이어받았다. 지명타자 자리에는 김주호가 들어섰다.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 야, 박동석. 수고 많았고, 가서 샤워하고 유니폼 새 걸로 갈아입고 와. 감기 걸리겠다.”
“아, 넵! 감사합니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수혁아, 아이싱부터 하고, 그리고 쟤 좀 챙겨줘라. 괜히 흥분해서 다치지 않게.”
“알겠습니다, 코치님.”
“좋아, 오늘 둘 다 수고 많았어.”
온몸이 땀에 절은 박동석이 한수혁의 뒤를 졸졸 쫓아 라커룸으로 향했다.
갈아입기 위한 언더웨어와 새 유니폼을 챙기던 박동석이 물었다.
“선배님, 저 앞으로 1군 올라올 일은 없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오늘 너무 한심했던 것 같습니다.”
“흠.”
한수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 대한 대답은 라커룸이 아닌 덕아웃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때? 네가 보기에는?”
“형님이 딱 원하는 스타일이네요.”
“덕아웃에서는 형님 말고 감독님.”
“아차차, 네, 감독님이 원하는 딱 그런 포수네요.”
“맞아, 실력이야 열심히 가르치면 늘겠지만… 일단 참을성은 확실히 있어 보이지?”
“흐흐, 오늘 그 자리에 덕수가 앉아 있었으면 파이터즈 애들 서넛은 병원으로 실려갔을 겁니다.”
“음, 좋아. 저런 녀석이 필요했어. 상대가 도발을 하건 말건 흥분 안 하고 자기 할 일을 하는 녀석 말이야.”
“확실히 우리 팀에 시한폭탄이 많긴 하죠.”
“맞아, 지금 우리에게는 쉽게 흥분하지 않고 벤클에 휘말리지 않을 그런 포수가 필요해. 오케이, 앞으로 저 녀석 2군 경기 결과랑 영상 계속 나한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형님.”
“감독님.”
“네, 감독님.”
3타수 무안타 2삼진, 그리고 수비에서 포일 하나.
기적은 없었다.
주전의 부상으로 인한 작은 기회가 박동석에게 찾아왔지만 그가 연타석 홈런을 날린다든지 하는 만화 같은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작은 기회에서 종종 위대한 업적이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박동석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 단 한 번도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한 박동석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감독의 눈에 드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2년 이상은 2군에서 굴려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전력 구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신인 하나가 차기 백업 포수감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