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98)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97화(198/412)
#197. 그를 따르는 사람들
“다들 여기 모여 있었네. 경기 시작했나? 몇 회야?”
“앗! 형, 이쪽으로 앉으세요. 지금 막 1회말 시작됐어요.”
“그래? 벌써 1회초 끝난 거야?”
“네, 기록 보니까 임준영 선배님이 잘 막으신 거 같아요. 삼진 1개, 볼넷 1개, 병살타 1개네요.”
“역시 대단하시네.”
올림픽이 시작됨과 동시에 프로야구 1군과 2군 리그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1군에 속한 주전급 선수들은 팀 훈련과 개인 훈련을 병행하며 조금은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2군에 속한 선수들에게는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설사 누군가 쉬라고 등을 떠민다 해도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기량과 경험을 쌓아 1군으로 올라가고 싶은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소중했으니까.
무더운 여름 날씨를 피해 이른 아침부터 진행된 워리어스 2군과 육성군 간의 연습경기.
1군에서 잠시 내려온 최마루와 2군 주전포수 자리를 꿰찬 박동석, 테스트를 통해 워리어스의 육성선수가 된 최재민, 그리고 올 시즌 2군에서 혹독한 담금질을 하고 있는 유인철이 대형 TV가 설치된 세미나실 앞에 모였다.
지난 겨울 동안 워리어스 구단에서는 2군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공사를 진행했다.
선수단 숙소를 증축해 모든 선수들이 1인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여기 이 세미나실처럼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모여 야구경기를 보고 전술을 토론할 수 있는 공유 공간도 여럿 만들어 놓았다.
거의 10년 가까이 방치되었던 워리어스 2군 시설이 단숨에 최신식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런 워리어스 2군 숙소에서 선수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뭔가에 집중하고 있다.
어떤 선수들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또 어떤 선수들은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며,
장소는 다르지만 워리어스 2군 선수들의 시선은 모두 한 곳으로 쏠렸다.
한국과 멕시코의 본선 1라운드 첫 번째 경기가 펼쳐지고 있는 미국 LA로 말이다.
“음, 나도 여기서 봐도 될까?”
“아앗! 선배님! 네, 물론이죠! 이쪽으로 앉으시죠. 여기가 제일 잘 보입니다.”
“됐어, 여기 뒤에서 보면 돼. 그리고 이거 하나씩들 받아라. 디카페인 원두 새로 들어왔다는데 괜찮더라.”
“감사합니다!”
최마루와 박동석, 최재민, 그리고 그들보다 1년 선배인 유인철까지 넷이 모여 있던 세미나실에 갑자기 대선배 김주호가 들어왔다.
아주 잠깐이지만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1년 차인 최마루와 박동석, 최재민, 그리고 유인철 간의 나이 차이라 봐야 한 살에 불과하지만 김주호는 벌써 프로에서 15년을 넘게 뛴 베테랑이자 대선배다.
게다가 그는 이번 시즌 1군에서 좌익수와 1루, 3루 백업, 그리고 오른손 대타로 활약하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선수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올림픽 브레이크 기간 휴식을 취했어야 할 그는 자청해서 2군에 내려와 새까만 후배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멕시코 선발이 라파엘 실바네.”
“네, 그러네요. 첫 경기부터 대뜸 빅리그 10승 투수네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김주호가 먼저 입을 열자 유인철이 이때다 하고 나서 그 말을 받아주었다.
“쟤 구속은 빠른데 제구는 영 아니더라. 올 시즌에 폭투가 몇 개더라.”
“작년보다 1마일 정도 평속이 올랐는데, 그 때문인지 밸런스가 흐트러진 거 같긴 하네요, 선배님.”
“으음… 그래도 빠르긴 진짜 빠르네. 우리 애들이 칠 수 있으려나.”
멕시코의 선발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연습투구를 하는 동안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어색했던 분위기가 해소되었다.
오늘 오전 있었던 자체 연습경기에서 최마루는 박동석과 배터리를 이뤄 5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하며 코치진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이번 시즌 팀 사정상 중간계투와 셋업맨으로 활용되고는 있지만 이대준 감독은 장기적으로 최마루를 선발투수로 키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아, 근데 아까 인철이 너 타격할 때 보니까 스윙이 너무 커진 것 같더라. 이틀 전 경기 때보다 눈에 띌 정도로. 혹시 의도한 거야?”
“네? 아, 아뇨, 아, 그래서 아까 코치님이 그렇게 눈치를 줬구나. 감사합니다, 선배님. 좀 더 신경 써야겠네요.”
“그래,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고.”
최마루, 박동석과 함께 백팀의 유격수로 뛴 유인철은 지난 겨울 동안 스위치 히터로 변신을 함과 동시에 벌크업을 통해 장타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유격수 수비를 위해서는 과도한 벌크업은 지양해야겠지만, 너무 말라서 멸치 소리까지 듣던 유인철로서는 상당히 적절한 판단이었다.
덕분에 그는 올 시즌 상반기 퓨처스리그에서 수비와 타격 모두 한 단계 진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아, 그리고 재민아. 음… 수화 선생님이 식사 중이시지? 에… 그러니까, 너·진짜·소질·있더라·그대로만·하면·돼.”
“어? 주호 선배님, 수화도 할 줄 아세요?”
“아니, 예전에 사회봉사 나갔을 때 아주 잠깐 배운 거야. 솔직히 이게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 경기에서 청팀 지명타자로 나와 4타수 1안타 1홈런을 친 최재민이 선배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청각장애 선수로는 최초로 프로야구 선수가 될 거란 기대를 받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고, 이어진 부산과 대전의 육성선수 테스트에서도 모두 탈락했다.
실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청각장애 선수를 프로에서 뛰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모로 귀찮은 일이 뒤따른다.
수화를 전담할 통역사를 고용해야 하고, 볼카운트를 알려주기 위한 별도의 수신호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경기를 뛰는 동료들의 배려가 필요하다.
아쉽게도 최재민의 재능은 그런 여러 가지 패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뽑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수혁이 나서면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아주 잠시지만 사회봉사 기간 동안 최재민의 스승이 되어주었던 그는 워리어스의 육성 테스트를 주선해주었다.
최재민이 테스트에 통과하자 구단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수화통역사를 붙여주었고, 그를 위해 여러 가지 편의시설들을 설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뜻이 같은 건 아니었다.
워리어스 내부, 그러니까 일부 선수들과 코치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굳이 청각장애를 가진 선수를 입단시킬 필요가 있었냐는, 뭐 그런 불만들.
아무리 최재민이 노력해도, 타석에서 연일 장타를 펑펑 날려대도 그런 불만과 시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제 역시 한수혁에 의해 단번에 해결되었다.
어느 날, 워리어스 자체 방송을 타고 한수혁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혹은 자신보다 야구를 못한다고 해서 차별이나 따돌림을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저보다 야구를 못하는 모든 선수들을 무시하고, 차별해도 되는 걸까요?’
오만하지만 반론의 여지가 없는 발언이었다.
그의 말처럼 단지 야구를 못한다는, 혹은 장애가 있어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차별과 따돌림을 당해야 한다면 한수혁은 워리어스, 그리고 KBO에서 뛰는 모든 선수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한수혁이 노골적으로 최재민을 옹호하자 순식간에 모든 잡음이 사라졌다.
워리어스 내에서 한수혁의 위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쳐 최재민은 육성군에서 계속 훈련을 이어갈 수 있었고, 최근에는 퓨처스리그에 대타와 지명타자로 출전하며 나름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조만간 정식 선수 계약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최재민의 시선이 TV 화면 속 한수혁에게로 향했다.
‘선생님…….’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선배이지만 그와 잠시나마 사제 관계로 얽혔던 최재민은 마음 속으로 한수혁을 스승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직접 기술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켜야만 스승이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한수혁이 했던 말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장애를 가진 녀석을 고작 대타로만 써먹기 위해 1군에 올려도 누구도 찍 소리 못 할, 그런 압도적인 타자가 되라는 그 말.
어쩌면 최재민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목표가 될지도 모를 그 말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
“수혁이는 오늘 컨디션 좋아 보이네.”
“그런데 투수들이 좋은 공을 안 주지 않을까요? 볼만 죽어라 던질 거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안 그럴 거 같아. 적어도 오늘은.”
“왜요, 선배님?”
“방금 찾아보니까 라파엘 실바 저 녀석 서비스타임이 올해로 끝이네.”
“그런데요?”
“몇 년째 최저 연봉 받던 놈이 이제 첫 연봉 협상에 들어가려면 테이블에 올릴 무기는 많을수록 좋거든. 그중에서도 한수혁을 잡아낸 투수라는 건 꽤나 괜찮은 타이틀이 될 거야. 내 생각에는 그래.”
“아…….”
“우리나 일본 같은 팀은 국민들 눈치 때문에라도 개인보다는 팀을 위해서 뛸 수밖에 없지만 용병들하고 얘기해봐도 그렇고 중남미 애들에게 야구는 그냥 비즈니스거든. 지금 저 투수 머릿속에는 한수혁을 잡아서 자기 이름값을 높이겠다는 생각밖에 없을 거 같은데?”
“오…….”
자신의 옆에 앉은 선배와 동기들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최재민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 손짓, 그리고 미묘한 입술의 움직임을 종합해볼 때 한수혁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최재민이 조금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 모인 다섯 명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한수혁을 너무 존경해 그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려는 최마루,
1군 경기에서 한수혁의 공을 받은 후 잠꼬대까지 할 정도로 그를 존경하는 박동석,
동기인 한수혁의 뒤를 받치기 위해 전력으로 부딪히는 중인 유인철,
부산 타이탄스에서 나온 후 워리어스를 왜 골랐냐는 질문에 한수혁과 뛰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던 베테랑 김주호,
그리고 그를 인생과 야구의 스승이라 생각하고 있는 자신까지.
그랬다.
이들 다섯 사람들에게는 한수혁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따악
타악
[아웃!]“아이 씨, 아까워라!
“와! 저걸 잡네!”
“쟤가 볼티모어 주전 유격수 맞나?”
“네, 맞네요. 선배님. 와, 확실히 풋워크가 다르긴 하네.”
“근데 뭐… 음, 솔직히 말하자면 수혁이 형님하고 비교하면…….”
“에이, 그건 비교 대상이 잘못됐지. 나는 그냥 일반적인 선수들하고 비교한 거고.”
아마도 그는 모를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후배, 동기, 심지어 선배들까지,
얼마나 많은 야구선수들이 자신을 보며 꿈을 이어가고 있는지 말이다.
최재민은 생각했다.
한수혁이 자신에게 바라는 게 대체 뭘까?
왜 자신을 도와준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한수혁이 직접 밝힌 목표다.
워리어스의 왕조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그가 목표를 이루는 데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선수가 되는 것,
한수혁의 말처럼 적어도 타격 하나만큼은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선수가 되는 것.
따악
“오! 잘 쳤네. 형주 저놈 활짝 웃는 거 봐라.”
“서형주 선배님 나이스!”
“이러면 1사 1루에 수혁 형님 타석이네요.”
“진짜 저 투수, 수혁이랑 승부하려나? 주호 선배님, 진짜 그럴까요?”
“글쎄, 지켜보면 알겠지. 아무튼 나 같으면 승부해볼 거 같은데? 흐흐.”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유가 뭐든 간에 도망만 안 갔으면…….”
지금 이 세미나실에 모인 네 명의 추종자들, 그리고 야구를 보고 있는 수많은 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대기 타석에서 나오며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꺾고, 오른쪽 어깨에 배트를 한 번 얹었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고.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다저스타디움의 공기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한국팀 응원단이 앉아 있는 쪽에서 엄청난 함성이 튀어나왔고, 그 이유를 모르는 미국 관중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최재민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올림픽의 향방이 걸린 가장 중요한 첫 경기,
객관적인 전력면에서 한 수 이상 앞서는 막강한 상대,
그럼에도 조금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수혁이 타석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이미 승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꾸욱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최재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재민아, 어디 가게? 경기 안 보려고?”
‘어차피·이길 테니·나가서·스윙연습·하려고요.’
“응? 뭐라는 거지?”
선수들이 동그란 눈으로 최재민을 바라보았다.
오직 한 사람, 그의 말을 대충이나마 이해한 김주호만 빼고.
“그래, 네 말이 맞네. 나도 같이 가자. 스윙이라도 한 번 더 해야지.”
최마루와 박동석, 유인철을 남겨둔 채 두 사람이 세미나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강렬한 타격음이 TV스피커를 뚫고 세미나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따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