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199)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98화(199/412)
#198. 희망 또는 악몽
역시 야구판에서 오래 구른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주호가 예견한 것처럼 오늘 멕시코의 선발로 나선 라파엘 실바의 머릿속은 한수혁을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거지 같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이너리그에서 4년을 벅벅 기어 다닌 끝에 간신히 빅리그로 올라왔고, 빌어먹을 콜업 타이밍 때문에 다시 4년을 최저연봉만 받으며 팀에 봉사하는 중이다.
지난 시즌 10승 5패, 그리고 이번 시즌 상반기 6승 2패.
겨우 60만 달러만 받고 뛰기에는 자신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메이저리그의 규정이 그런 것을.
어쨌든 올 시즌이 끝나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봉조정 자격을 얻게 된다.
에이전트가 말했다.
절대 사고 치지 말고 뭐가 됐든 실적을 쌓으라고.
그렇게만 하면 자신이 구단과 담판을 지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를 안겨주겠다고.
고향에서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단 한 푼이라도 많은 돈을 받아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국팀, 특히 한수혁은 상당히 좋은 먹이감이었다.
아직까지도 이런 저런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난 WBC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슈퍼 루키.
빅리그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KBO에서 4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고, 아시아 홈런 기록까지 갱신한 강타자이자 리그 최고의 투수.
그럼에도 한수혁에 대해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전문가들이 많았지만 적어도 라파엘 실바가 뛰고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만약 그가 포스팅을 신청하면 무슨 수를 쓰던 꼭 잡아야 할 선수.
그렇게 구단에서 최우선 영입 순위로 삼고 있는 슈퍼 루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준다면?
자신의 연봉 협상 테이블이 보다 풍성해지리라는 건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도리도리’
벤치에서 포수를 통해 도망가는 피칭을 하라는 사인을 보내왔다.
하지만 라파엘은 단호한 표정으로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여기서 도망가라니, 누구 좋으라고.
1번 우익수 이찬호
2번 중견수 서형주
3번 유격수 한수혁
4번 1루수 이수영
5번 3루수 김세준
6번 지명타자 안치욱
7번 좌익수 양선우
8번 포수 장덕수
9번 2루수 손재후
오늘 한국팀의 선발로 나온 타자들 중에는 빅리거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KBO에 데뷔한 지도 얼마 되지 않는 풋내기들이다.
저런 녀석들을 상대로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어봐야 연봉협상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타깃은 오직 하나, 한수혁뿐이다.
잡는다, 잡아낸다, 반드시 잡아낼 거다.
선발투수가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자 멕시코 감독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은 생각했다.
한국팀 타자들 중에 경계해야 할 유일한 타자라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선발투수가 저 정도로 의욕을 보인다면 한번 붙어보게 해주는 게 맞다고 말이다.
선입견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지난 WBC에서 한수혁이 미국을 그렇게 박살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안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벤치의 허락을 받은 투수가 힘차게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대한 타격음이 다저스타디움에 울려 퍼졌다.
따아아아아아악!
* * *
슈웅
부웅
“스윙! 아웃!”
“우아아아아!”
한 경기 한 경기가 모두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이번 올림픽에서 첫 번째 경기 선발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임준영.
그가 5회초 투구를 마친 후 천천히 마운드를 내려왔다.
스코어 2 대 0.
멕시코 덕아웃에 앉은 코치와 선수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가득하다.
아무리 한수혁이 있다 해도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국은 이번 올림픽 본선에 참가한 8개국 중 최약체임에 확실하다.
선수단 전원이 빅리거인 미국은 둘째 치더라도, 일본과 멕시코, 네덜란드, 도미니카, 쿠바 역시 전체 선수단의 절반가량을 빅리그 선수들로 채웠다. 심지어 이스라엘에도 전현직 빅리거가 다섯 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팀 선수들 중 빅리거는 류한결이 유일하다. 그리고 오늘 그는 출전하지 않는다.
멕시코 입장에서 한국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상대였다.
한국과 네덜란드를 잡고, 일본과 조 1위를 다투겠다는 멕시코의 전략이 시작부터 큰 암초를 만났다.
“수고했다. 준영아, 어깨는 어때? 한 이닝 정도 더 가능할까?”
“아주 좋습니다, 감독님.”
“좋아, 그럼 조금만 더 부탁하마.”
인천 시절 몇 년간 함께 호흡을 맞춘 구용식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임준영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긴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자, 준영이 좀 쉴 수 있게 공 많이 보고, 저놈들 자꾸 도발하는 거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특히 덕수랑 수혁이, 너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돼. 아니다, 그냥 여기 말뚝 하나 박고 묶어 놓을까?”
“그게 낫겠네요. 흐흐.”
어울리지 않는 구용식 감독의 농담에 선수들 몇이 슬쩍 웃음을 보였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1번부터 5번까지 연속으로 등장하는 빅리거들을 보며 움츠러들었던 선수들이 이제야 여유를 찾은 것이다.
“플레이!”
5회말 한국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고 있던 장덕수가 타석에 들어서 상대 투수를 노려본다.
“덕수 형, 파이팅!”
“파이팅!”
한수혁이 덕아웃 난간에 기댄 채 장덕수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임준영의 머릿속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 녀석을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
한 가지 확실한 건 무얼 하고 있었던 간에 지금처럼 충만한 마음을 가진 채 야구에만 몰두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따아악!
“파울!”
“아우! 아까워라!”
“확실히 공 끝이 밋밋해졌네. 쟤 내려갈 때가 된 거 같은데?”
“안치욱.”
“왜?”
“그런 말을 하려거든 안타라도 하나 치고 하든지.”
“왜 맨날 나한테만… 저기 형주도 있는데.”
“쟤는 오늘 안타 하나 쳤으니까, 운이 따르긴 했지만.”
소속팀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안치욱을 쥐 잡듯이 잡는 한수혁을 보며 임준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친정팀으로 복귀한 후 가장 놀란 건 역시 한수혁에 관한 것이었다.
두말하면 입 아플 야구 실력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리더십, 그리고 포용력.
워리어스라는 팀에서 한수혁은 분명한 리더였다.
그것도 스스로 원치 않아도 나머지 사람들이 알아서 따르는 진짜 리더.
최마루와 박동석, 최재민 같은 후배들은 둘째 치더라도 동기 유인철과 서형주, 안치욱은 한수혁의 존재로 인해 아무 잡생각 없이 야구에만 모든 신경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워리어스에 와서야 알았다.
조성오 선배가 각성한 이유, 이만식 선배가 회춘한 이유, 그리고 다른 팀에서 건너온 양기철이나 김두영 같은 선수들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 말이다.
모두 한수혁 때문이었다.
저 녀석은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주변 선수들의 열정을 불태우게 만드는, 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의욕을 불어넣어주는, 그야말로 팀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건 임준영 자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친정팀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희망을 마침내 이뤄낸 그에게는 이제 단 한 가지 고민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투수 생명에 대한 걱정이었다.
굳이 특정 선수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현대 야구에서 강속구 투수가 오랜 시간 그 기량을 유지하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인간의 육체는 100마일의 공을 던지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지금 100마일을 넘어 105마일을 던지는 투수들은 그야말로 자신의 신체가 갖고 있는 모든 능력치를 한계치까지 끌어다 쓰고 있는 셈이다.
스포츠 과학의 발전은 투수들에게 말도 안 되는 강속구를 가능하게 만들어줬지만, 그에 따른 대가는 오롯이 선수들의 몫이었다.
비록 100마일은 던지지 못하지만 임준영 역시 기본적으로 구속과 구위로 먹고 사는 투수다.
언제 갑자기 부상이 오고, 기량이 저하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어렵게 돌아온 친정팀에서 되도록 오래 현역으로 뛰고 싶다.
남은 야구 인생의 목표를 거기에 맞춰 놓은 임준영에게 부상과 기량 저하는 악몽 그 자체였다.
그래서 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공을 던지는, 그리고 보디빌더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철저하게 몸을 관리하고 있는 한수혁에게 말이다.
임준영의 고민,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들은 한수혁은 이렇게 대답했다.
‘결국 정답은 없는 거 같아요.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인간인 이상 결국 그런 날은 올 테니까요.’
자신과 달리 이제 막 야구 인생을 시작한, 아직은 올라갈 일만 남은 파릇파릇한 신인이 마치 은퇴를 앞둔 베테랑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정말 자신보다 한참 선배인 선수에게 조언을 듣는 그런 기분이었다.
‘제 생각은 그래요. 할 수 있는 걸 다 하되,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기르자? 뭐, 그런 마음으로 매일매일 애쓰는 중입니다.’
‘그럼 만약에 너 같으면… 그럴 일은 없을 것이고,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지금처럼 빠른 공을 던질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할 것 같은데?’
‘남은 것들을 추슬러서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 노력해보겠죠. 음… 예전에는 불가능했을 거 같지만, 그래요,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혹시 이 녀석이 고등학교 때 부상을 당한 적이 있던가?
예전에는 불가능했다는 말이 뭔가 이상하게 들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부상이나 기량 저하가 와도 남은 것들을 추슬러 다시 일어서겠다는 말,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새까만 후배의 말 한 마디에 임준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이 맞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심지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놓고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깨달았다.
슬프게도 인간은 항상 불안정한 존재다.
그리고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그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닥치게 마련이다.
할 수 있는 걸 한다, 그 말 한 마디에 임준영의 고민에 대한 모든 해답이 들어 있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선배님 어깨에 이상이 생기면… 너클볼이라도 가르쳐드릴까요?’
‘뭐? 하하하.’
그날 이후 임준영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수혁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서형주 파이팅! 형주야! 수혁이 앞에 밥상 좀 차려봐라!”
누군가의 힘찬 고함 소리에 임준영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벤치에 앉아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한국팀의 8, 9번 타자가 범타로 물러나고, 1번 이찬호가 안타로 출루해 있었다.
선배들의 목소리를 들은 서형주가 콧김을 내뿜으며 상대 투수를 노려보았다.
임준영은 안다.
서형주가 동기 한수혁을 얼마나 따라잡고 싶어 하는지,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동기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 말이다.
따악!
“좋았어! 나이스!”
“저놈 오늘 날아다니네.”
벤치의 응원에 호응이라도 하듯 서형주가 1회에 이어 또 한 번 안타를 뽑아내며 2사 1, 3루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임준영을 상념에 빠뜨렸던 존재.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지만, 상대하는 이들에게는 악몽에 가까운 선수.
우드득 우드득
한수혁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타석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