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00)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199화(200/412)
#199. 후회
2017년과 2023년 WBC 두 대회 연속 1라운드 광탈,
금메달이 당연시되었던 2022년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만에게 망신을 당하며 2위.
세계에서 세 번째 규모의 프로 리그를 운영 중인 한국 야구대표팀의 지난 10년간 국제대회 성적이다. 이런저런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만들어낸 낯부끄러운 현실이다.
만약 지난 2027년 WBC에 한수혁이 출전하지 않았다면?
아니, 몇몇 보수적인 야구 원로들의 ‘경험론’에 밀려 한수혁의 출전이 불발되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2027 WBC의 우승으로 인해 한국은 ‘배부른 돼지들이 모인 약팀’에서 ‘다크호스’ 정도로 신분 상승이 된 상태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기는 멕시코의 일방적인 우세가 예상되었지만,
결론적으로 그런 전문가들의 예상을 믿고 멕시코의 승리에 모든 걸 걸었던 도박꾼들이 줄줄이 뒷목을 잡고 뒤로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다저스타디움에서 펼쳐진 A조 1차전 경기, 예상을 뒤엎고 대한민국이 5 대 2로 멕시코 제압] [1회와 5회 터진 한수혁의 투런 홈런 두 방, 승부를 결정짓다] [한수혁과 승부를 벌이다 홈런 두 방을 헌납한 멕시코 투수 라파엘 실바 “타임머신이 필요하다. 과거의 내게로 돌아가 턱을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6이닝 1실점 완벽투 임준영, 빅리그 전문가들 “미국에 진출했어도 충분히 경쟁력 있었을 것”] [PHOTO: 한수혁의 투런 홈런 순간 안전망을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민예린] [왜 안전망을 타지 않았냐는 질문에 “수혁 오빠가 내 퇴장을 걱정하더라”]한수혁의 홈런 두 방으로 5점을 낸 한국은 멕시코를 물리치며 기분 좋은 첫승을 올렸다.
마운드에서는 임준영이 6이닝 1실점으로 완벽한 피칭을 보였고, 김용재와 박도율이 안정적으로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한편 같은 시간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 네덜란드의 경기는 일본의 2 대 1 한 점 차 승리로 끝났다.
당초 네덜란드전 승리를 확신하던 일본은 9회말 간판타자 하마사키 아키노리의 역전 적시타가 터진 후에야 간신히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이 각각 1승, 그리고 멕시코와 네덜란드가 1패씩을 떠안으며 경기 첫날 일정이 모두 지나갔다.
* * *
‘칙쇼…….’
한 경기 한 경기를 모두 결승이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는 건 비단 한국팀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2027 WBC에서 한국에 패하며 3위에 그쳤던 일본은 이번 올림픽에 모든 걸 건 상태였다.
좌타자가 즐비한 네덜란드를 상대로 현재 NPB 다승 1위를 달리고 있는 좌완을 내세워 1승을 거둔 일본은 이제 한국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이 내세운 투수는 다름 아닌 다나카 야마토였다.
일본 대표팀, 그리고 소속팀 시카고 컵스의 에이스인 그는 지난 WBC에서 한수혁에게 당한 치욕을 갚겠다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외부적으로 그랬다는 소리다.
사실 다나카의 속마음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지난 대회에서 만난 타자 한수혁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빅리그에서 뛰면서도 그 정도 위압감을 주는 타자는 만나본 적이 없다.
실력은 둘째 치고, 그 녀석이 내뿜는 그 특유의 기운이 너무 기분 나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무섭다.
‘빠가야로…….’
아무리 스스로를 욕하고, 다그치고, 추스르려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승부하면 얻어맞고, 도망가면 발로 능욕을 당하고,
그래서 무슨 핑계를 대든 이번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으려 했건만.
‘하아…….’
“플레이!”
결국 자신은 이곳으로 내몰렸고, 이제 곧 그 괴물과 다시 한 번 상대해야 한다.
저기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한수혁이라는 괴물과 말이다.
* * *
“수혁…….”
“쉿.”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했지만 이어진 임준영 선배의 목소리와 함께 금세 조용해졌다.
내가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있자 주변이 이상하리 만치 조용해졌다.
알고 있다.
경기를 앞둔 선발투수가 이러고 있으면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눈치를 보게 되는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다른 누군가를 배려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터벅터벅
벤치에서 일어나 마운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야구 인생에 적어도 수백 번은 올랐을 이 길이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진다.
“와아아!”
“한수혁! 한수혁! 한수혁!”
“꼭 이겨줘! 부탁해요!”
LA 한인타운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한국어가 더 많이 들리는 것 같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때도 그랬다.
이곳에서 에인절스와 경기가 있을 때마다 저 사람들은 내게 응원을 보내줬던 것 같다.
그냥 내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다.
슈웅
파앙
“좋아! 수혁아, 공 좋다!”
대표팀 안방에 세대 교체의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어제 경기에서는 장덕수가 마스크를 썼었다.
하지만 오늘, 절대 져서는 안 될 상대인 일본과의 경기에는 다시 베테랑 정대한이 선발 포수로 나섰다.
상관없다.
누가 포수이건 그게 뭐가 중요할까.
슈웅
파아앙
컨디션은 좋다. 아니, 너무 좋아서 이러다 나도 모르게 무리를 하게 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연습투구에서 102마일이 넘는 구속이 계속 나오자 관중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또 뭔가가 생각나고 말았다.
그동안 흐릿하게만 기억되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눈에 잡힐 것처럼 선명해졌다.
이 경기장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였다.
그녀가 매일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나는 어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그녀의 얼굴에 심장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그녀의 목소리, 흐릿하게 남아 있던 얼굴, 그녀가 부르던 노래, 말투…….
그 모든 게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다 못해 탱크탑 위로 살짝 보였던 등 한가운데의 점까지도 말이다.
젠장,
젠장,
빌어먹을,
그런데 대체 왜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 건가.
내가 멍청이인가? 아니면 누군가 내게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이렇게 모든 게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딱 이름만 기억이 안 난다고?
“플레이!”
지난 삶에서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해주려 했던 건 그녀가 오직 유일했다.
그런 사람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역겨워 참을 수가 없다.
만약 오늘 내가 선발이 아니었다면, 여기가 야구장이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사고를 쳤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봐, 그만 뜸 들이고 경기 시작해.”
마운드 위 투수가 공을 던질 생각을 하지 않자 주심이 점잖은 목소리로 경기 개시를 지시했다.
그래.
일단 경기부터 끝내자.
이 거지 같은 기분을 푸는 건 나중 일이다.
어쩌면 오늘 이 좆 같은 경기장에서 게임을 하다 보면 뭔가 더 떠오르게 될지도 모르지.
숨이 막힌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저 지긋지긋한 일본 놈들을 박살 내버리고.
슈우우웅
퍼어어엉!
* * *
– 아, 이걸 대체 뭐라 설명드려야 할까요……. 한수혁 선수가 말 그대로 일본 타자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5회말 또다시 일본의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낸 한수혁 선수가 천천히 마운드를 내려가고 있습니다.
– 대단하네요. 이거… 보는 사람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한 피칭입니다. 5이닝 12K, 거기에 지금까지 일본 타자들 중 그 누구도 1루를 밟지 못했습니다.
– 위원님, 이거 하나는 확실해질 것 같군요.
– 뭐죠?
– 오늘 경기 전까지도 한수혁 선수에 대해 검증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몇몇 전문가들 말이죠. 이제는 수긍할 수밖에 없겠군요. 지난 WBC에서의 모습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입증했으니 말이죠.
– 아, 그 머저… 죄송합니다. 그 사람들이야 어차피 메이저리그가 아닌 타국 리그, 특히 아시아 선수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니까요.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아나운서님 말은 맞아요. 이제 이 정도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겠죠.
– 그나저나 오늘 한수혁 선수가 조금 이상한 거 같습니다. 평소 웃음까지는 아니어도 얼굴에 여유가 넘치던 선수가 유난히 표정이 딱딱해 보이는데요. 아무래도 일본전이라 긴장을 끌어 올린 탓일까요?
– 네, 그렇네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정말 중요한 건 오늘 한수혁 선수의 공은 역대 최고라는 겁니다. 사실 1회말 한수혁 선수가 던진 첫 번째 공이 170㎞/h가 찍혔을 때 게임은 끝난 겁니다. 그때 일본 감독의 표정 보셨죠?
– 봤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동정심이 들 정도더군요.
– 맞아요, 그 공 하나에 일본팀에 깃들어 있던 전의가 순식간에 날아가버렸죠. 원래 이런 국제대회 단기전은 기세 싸움이거든요. 제가 장담합니다. 한수혁 선수가 마운드에 있는 한 일본팀은 절대 기를 펴지 못할 겁니다.
– 그럼 이제 중요한 건 공격이겠군요. 일본이 오늘 한수혁 선수를 아예 없는 선수 취급하며 철저하게 거르고 있으니 나머지 선수들이 분발해야겠습니다.
– 맞습니다. 이제 6, 7, 8, 9, 총 4이닝이 남았습니다. 한수혁 선수가 마운드에서 버티는 동안 어떻게든 선취점을 얻어내야 합니다.
* * *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자유다.
반대로 그걸 받아들이는 쪽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것 역시 그 사람의 선택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래서는 안 됐다.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 한결 같은 응원을 보내주던,
누군가 SNS에서 나를 욕하거나, 혹은 안 좋은 기사가 나오기라도 하면 자기 일처럼 화를 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내가 지독한 허무함에 빠져 있을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채고 기분을 풀어주려 하던,
어깨 부상으로 반쪽 선수가 될, 아니, 어쩌면 은퇴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를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내 기분만을 걱정하던,
심지어 자신이 꼭 아니어도 좋으니 다른 누군가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녀를,
나는 무슨 귀찮은 벌레처럼 취급했다.
주변 사람들이 대체 왜 저런 인간을 따라다니냐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녀를 함부로 대했다.
그런 기억들이 마치 예리한 송곳처럼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몸은 경기장에 있지만 내 마음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야구를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정신이 다른 데로 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오늘 어떤 공을 던졌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다.
“수혁아, 부담 갖지 말고. 저놈들이 내보내면 그냥 나갔다가 얌전히 들어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임준영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내 타석이 다가오고 있다.
배트를 들고 대기 타석에 들어선다.
“아웃!”
3번 이찬호에 이어 4번 이수영이 연속 범타로 물러나며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멍하기만 하다.
하긴, 아무렴 어떨까.
오늘 선발로 나섰던 다나카 야마토인지, 야나카 다마네기인지 하는 놈도 그랬지만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저 왼손잡이 투수 놈 역시 내게 스트라이크를 던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볼.”
“볼.”
예상했던 대로 두 개의 볼이 연속으로 들어왔다.
투수와의 승부에 대한 흥미는 사라진 지 오래다.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려 저 멀리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안다.
이 모든 게 아무 의미 없는, 내 스스로를 좀먹는 행동이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나 자신을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기분을 되살릴 방법을 알지 못했다.
“볼.”
또 하나의 볼이 들어왔다.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공을 던지는 투수도, 받는 포수도,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심판도, 이 뻔한 승부의 결말을 예측하기에 시큰둥하기만 하다.
내 마음은 벌써 1루로 나가 있었다. 임준영의 말처럼 1루로 얌전히 걸어 나가기 위해 그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어 버렸다.
그때였다.
“오빠!”
1루 관중석 중간쯤에 앉아 있던 민예린이 내 이름을 힘차게 부르며 아래쪽으로 뛰어내려왔다.
안전망 바로 앞자리, 그녀가 항상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민예린이 섰다.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관자놀이에서 심장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내 몸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당황스러웠다.
“타임!”
잠시 타임을 걸고 타석에서 물러섰다.
헬멧을 벗고 숨을 한 번 크게 쉬자 아주 약간이나마 정신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뭘까?
알 수 없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다.
방금 전 그 알 수 없는 감정이 무엇때문인지, 그게 민예린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 경기를 빨리 끝내야 한다.
“이제 그만 다시 들어오지 그래?”
심판의 목소리에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벗고 있던 헬멧을 다시 쓰고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내가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일본 포수가 으르렁거렸다.
“시건방진… 네가 아무리 야구를 잘하…….”
“닥쳐, 죽여버리기 전에.”
“뭐?”
포수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마운드 위 투수가 뭔가를 눈치챈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조용히 1루로 걸어 나가려던 내 생각이 바뀌었다.
스르륵
바깥쪽으로 빠져 들어올 공을 때리기 위한 극단적인 클로즈 스탠스로 폼을 변경했다.
최대한 리치를 늘리기 위해 배트의 그립을 조정했다.
포수가 뭔가를 눈치챈 듯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슈웅
투수의 손 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앞으로 한 발을 딛으며 빠져나가는 공을 그대로 후려쳐버렸다.
따아아아악!
억지로 밀어 친 탓에 회전이 강하게 걸린 타구가 우익수 쪽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