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02)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01화(202/412)
#201. 누군가의 흔적
“외출? 음, 그래. 잘 생각했어. 기분 전환도 중요하지. 운영팀 직원이 한 명 따라붙을 거고… 통역도 한 명 동행시켜 줄까?”
“통역은 굳이 필요 없습니다, 감독님.”
“좋아,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선수 보호를 위해 조별 라운드와 준결승전 사이 이틀간의 휴식일이 주어졌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몇 명씩 무리를 이뤄 외출을 나갔다.
그리고 구용식 감독이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한수혁 역시 외출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안 그래도 억지로라도 기분 전환을 시키고 싶었던 구용식이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아무리 야구를 잘한다고 해도 그래 봐야 이제 스무 살에 불과한 청년이다.
저 나이 때의 젊은이들이 아무 이유 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변한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단독 외출 허가를 받은 한수혁은 민예린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
“오빠, 부탁하신 거 알아봤는데요. 다들 여기를 추천하더라고요.”
“고맙다, 예린아.”
“고맙긴요, 그럼 출발할까요?”
한수혁과 민예린, 그리고 그녀의 매니저와 KBO에서 파견한 운영팀 직원.
그들이 향한 곳은 LA 외곽에 위치한 작은 화실이었다.
“이분이에요. 다들 이 근방에 이분만 한 화가는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응, 알았어.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네, 그럼 저는 밖에서 커피나 한 잔 하고 있을게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은데 그냥 먼저 가도 돼.”
“아뇨, 기다릴게요.”
민예린의 단호한 눈빛을 본 한수혁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난 한일전이 끝난 후 며칠 만에 지어본 웃음이었다.
그렇게 한수혁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백발의 남자 하나가 들어와 그의 앞에 걸터앉았다.
“몽타주를 그리고 싶다고?”
“네.”
“좋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당부하자면 내 그림 실력도 중요하지만 자네가 얼마나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거라는 거야.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와 그림이 다르다고 해서 환불은 안 된다는 소리지.”
“이해했습니다. 시작하시죠.”
“좋아, 그럼 말해봐.”
“일단 얼굴형은 턱이 약간, 평균보다 아주 약간 얇은 달걀형입니다. 이마의 라인은 약간 높게 위치해 있으면서 완전한 원형을 이루고 있고… 눈썹은 아마 다듬은 것이겠지만 일자보다는 반달형입니다. 얼굴에 비해 눈이 조금 커서 시원해 보이고, 눈꼬리는 살짝 내려와 있고요. 코는…….”
한수혁의 설명에 따라 화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그가 이곳을 찾은 것은 얼마 전 떠오른 그녀의 몽타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민예린에게 부탁해 알아낸 자칭, 타칭 LA 최고의 몽타주 화가라는 남자가 신중한 표정으로 한수혁의 생각을 그림으로 옮겨 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차례 작업을 중단하고 뭔가를 고민하던 화가가 드디어 작업을 끝마친 듯 한수혁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자, 어때? 비슷한가?”
“…….”
그림을 본 순간 한수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기 그녀가 있었다.
두 번의 삶을 거쳐오면서 한수혁의 가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미련, 그리고 후회.
그 모든 것을 남긴 채 이름도 없이 사라진 그녀가 그림 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왜… 마음에 안 드나? 아까도 말했지만 환불은 안 돼. 뭔가 잘못됐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자네 탓이야.”
“훌륭합니다.”
“음?”
“마음에 듭니다. 아니, 아주 마음에 듭니다.”
“흐음… 다행이군.”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한참 동안 그림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한수혁이 다시 화가에게 말했다.
“하나 더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 더? 뭐 일단 들어보지. 페이만 맞는다면야.”
“지금 이 그림 속 여성은 30대 초반입니다. 혹시 이 그림을 토대로 이 사람의 10대 후반 모습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음, 그건 아주 간단하지. 이리 줘봐.”
한수혁에게 다시 그림을 받아 든 화가가 그걸 들고 옆방으로 향했다.
잠시 뭔가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가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자, 예전 같으면 내가 또 그림 한 장을 그려야 했겠지만 요즘은 이런 걸 기계가 대신해 주거든. 이게 AI가 예측한 이 그림 속 여자의 10대 후반 모습이야. 어때, 마음에 드나?”
그가 내민 두 장의 그림을 한수혁이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걸 조심스럽게 손에 들고 화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아,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이건 서비스야.”
화가가 준 화구통에 그림 두 장을 넣은 한수혁이 민예린이 기다리고 있는 거실로 나왔다.
“오빠, 다 끝났어요?”
“그래, 먼저 가라니까 정말 기다렸네.”
“어떻게 먼저 가요. 저 배고파요. 오빠,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좋아, 그럼 그럴까? 대리님, 그리고 매니저님. 죄송한데 예린이랑 둘이서만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아, 네, 네, 그럼 음식점까지만 같이 가고 다른 테이블에 앉겠습니다. 그건 괜찮겠죠?”
“감사합니다.”
그렇게 네 사람이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민예린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한수혁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너 파스타 좋아하지? 저쪽으로 가자. 괜찮은 집 있거든.”
“네? 아, 네. 그래요. 오빠.”
이상하다.
이 오빠가 언제 LA에 온 적이 있던가? 왜 이렇게 익숙하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민예린은 굳이 묻지 않고 한수혁의 뒤를 따랐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또다른 한 손으로 화구통을 든 한수혁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 집이야. 카치오페페가 꽤 괜찮거든. 그걸로 시킬까?”
“전 아무거나 좋아요, 오빠.”
음식이 서빙되고, 파스타를 입에 넣은 민예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정말 맛있었다.
공연 때문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현지 셀럽들과 맛집이란 맛집은 다 다녀본 그녀였지만 이 집 파스타는 그중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힐 맛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한수혁이 입맛이 별로 없는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는 거다.
하지만 딱 하나 좋은 점이 있긴 했다.
“잘 먹네. 혹시 부족하면 이거 좀 더 먹을래? 아, 먹던 거라 좀 그런가…….”
“아뇨! 주세요! 저 배 많이 고파요!”
한수혁이 거의 입만 대다 만 파스타가 순식간에 민예린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얼굴이 벌개진 채 파스타 두 접시를 해치운 민예린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던 그때, 그녀 앞에 그림 한 장이 놓였다.
단지 그림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미인임을 알 수 있는, 정말 질투가 날 정도로 예쁘게 생긴 소녀의 얼굴이었다.
“이게… 뭐예요?”
“저번에 내가 부탁한, 음… 찾아 달라고 부탁했던 그 여자 얼굴이야.”
“아… 그래서 오늘 저길 가자고 한 거구나.”
“여자들은 화장이나 헤어스타일 따라 이미지가 확확 변하니까 딱 이 모습일 거라 자신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없는 거보다는 낫겠지?”
“당연하죠! 가수일 거라면서요? 아직 유명세를 타지 못했다고 해도 이 정도면 찾는 데 진짜 도움될 거 같은데요? 제가 바로 탐정사무소에 전달할게요.”
“하나 더 있어.”
“네?”
“어디 사는지도 알 것 같아.”
“집을 아신다고요? 아니, 그럼 왜 진작에…….”
“아니, 집까지는 아니고, 그냥 우연히 기억이, 아무튼 자세한 건 몰라도 여기 오렌지 카운티 어디 살고 있을 확률이 높아. 나중에 이사를 왔을 수도 있지만… 내 예감에는 지금도 여기 있을 거 같아.”
“이 동네에요? 와, 그럼 진짜 일이 쉬워질 거 같은데? 알았어요. 그럼 저 전화 한 통만 급하게, 아니다. 호텔 돌아가면서 그림도 줄 겸 직접 들르는 게 낫겠다.”
“예린아.”
“네, 오빠. 그냥 지금 바로 갈까요?”
“고맙다.”
한수혁의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민예린의 가슴이 또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다.
그런 마음을 들킬세라 민예린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대답했다.
“제가 더 감사해요, 오빠.”
“뭐가? 내가 뭘 한 게 있나?”
“그냥요, 그냥…….”
처음에는 야구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민예린의 마지막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 * *
“좋아, 다들 잘 쉬었나?”
“네! 감독님.”
“오케이, 컨디션 좋아 보이네. 특별한 부상자도 없고… 서형주, 넌 왜 그렇게 들떴어?”
“뭐라도 다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뭐? 하하하, 좋아. 다들 우리 막내 본받아서 파이팅하고, 자, 오늘 경기 꼭 이기고 결승으로 간다. 내 말 이해했지?”
“알겠습니다!”
의욕이 넘치다 못해 넘쳐 흐르는 서형주를 보며 구용식 감독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난생 처음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출국을 앞두고 의무적으로 만나야 했던 야구 원로들, 그들이 한결같이 조언이라 해주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의 감독은 다른 무엇보다 팀의 군기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는, 조언인지 당부인지 모를 그 말들.
그럼에도 아주 무시할 수 없었던 건 그게 아주 근거가 없는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제대회에 출전했던 대표팀, 특히 그중에서도 프로 선수들이 주축이 되는 야구 대표팀에서 선수들의 일탈로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일단 군기부터 잡아라.
어찌 보면 가장 원시적이지만 그만큼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구용식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단 그의 지휘 스타일이 그렇지 않기도 했거니와, 이번 대표팀의 주축인 2년 차 신인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직의 군기를 잡으면 가장 크게 위축되는 건 막내들이다.
그런데 이번 대표팀의 막내들은 예전과 조금 다르다.
병역 면제를 위해 베테랑들의 눈치를 보며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그런 선수들이 아니다.
중견수 서형주는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을 앞세워 대표팀의 주전 중견수 자리를 꿰찼고, 3루수 안치욱은 멕시코전 적시타를 비롯, 활발한 타격으로 하위타선의 윤활유 역할을 해주고 있다.
무엇보다 한수혁, 투타 양면에서 이번 대표팀의 핵심인 한수혁이 그 막내라인에 속해 있다.
그런데 군기를 잡으라고?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일전이 있기 전 고참들과 친하게 지내는 코치를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대표팀 고참급 선수들 중 일부가 한수혁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전과 달리 선배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막내들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혹시 나 몰래 애들 집합이라도 시켰나요?’
‘집합은요. 말만 그런 거지. 절대 못 건드릴 거예요.’
‘왜요?’
‘어휴, 막내들 집합시키는데 가오 빠지게 한수혁만 빼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걔까지 불렀다가 그게 언론에라도 새어 나가면? 누군가 60홈런 타자에게 기합을 줬다고 알려지면? 걔 아마 한국에서는 야구 못 할걸요? 너부터 똑바로 하라는 욕이나 처먹겠죠.’
그랬다.
자신이 인식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한수혁은 단순한 전력뿐만 아니라, 이렇게 활기찬 팀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도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선배들이 한수혁 하나로 인해 후배들을 함부로 갈구지 못한다.
그렇다고 막내들이 마음대로 구느냐?
그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동기가 솔선수범해서 훈련하고,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경기에 임한다. 오히려 동기들이 함부로 굴 때면 가장 먼저 나서 쥐 잡듯이 잡아버린다.
‘거참… 진짜 어디서 저런 녀석이.’
구용식이 애정을 듬뿍 담은 눈빛으로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문득 이대준 감독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멋진 녀석을 데리고 야구를 한다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일까?
“수혁아, 오늘은 컨디션 괜찮아 보이네. 잘 쉬었나 봐?”
“네, 괜찮습니다. 감독님.”
“좋아, 그럼 굳이 긴 말 하지 않으마. 우리는 이기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끝마쳤다. 이게 얼마 만의 올림픽 4강전이냐. 국가를 위해서, 그리고 너희 스스로를 위해서, 오늘 경기 반드시 잡아내는 거다. 자, 가자!”
감독의 말에 잔뜩 고양된 선수들이 하나둘 덕아웃을 나가 그라운드에 발을 디뎠다.
전문가들이 예선에서 탈락할 거라 예상했던 팀이 전승으로 4강전까지 올라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의 승리를 점치는 전문가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선수들의 표정에는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28 LA올림픽 야구 종목 준결승전, 대한민국과 도미니카 간의 경기가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