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03)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02화(203/412)
#202. 한수혁의 미소
성공하는 인간의 유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순수한 자신의 욕망, 욕심, 그리고 이익을 위해 모든 걸 불태우는 인간,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극한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인간.
오늘 도미니카와의 준결승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한 임준영은 명백히 후자에 속했다.
처음 워리어스에 입단했을 때는 자신을 받아준 팀, 그리고 친형처럼 돌봐 주는 선배들,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팬들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다.
그런 친정팀에서 버림받은 후 잠시 충격에 빠지긴 했지만 금세 거기서 빠져나와 인천의 우승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그리고 지금, 임준영은 대한민국 대표팀의 결승 진출을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된 상태였다.
슈우웅
퍼엉
“볼!”
5회초, 양팀이 2 대 2로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
전 타석에서 자신에게 투런 홈런을 때려낸 루이스 오티즈가 유인구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지난 시즌 42홈런, 그리고 올 시즌 전반기에도 벌써 25개의 홈런을 때려낸 타자다.
웬만한 운동선수 허벅지만 한 팔뚝 근육을 가진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타자.
그런 선수에게 투런 홈런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임준영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미리 예방주사를 맞았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내내 계속되었던 한수혁이라는 예방주사 말이다.
분명 무섭고 대단한 타자이지만 이상하게도 한수혁 같은 압박감은 없었다.
지난 시즌, 특히 한국시리즈에서의 한수혁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녀석의 얼굴에 우승에 대한 집념까지 더해지자 그야말로 악마가 따로 없다 느낄 정도였다.
오히려 그렇게 한 번 우승을 차지하고 나니 한수혁의 얼굴에 남아 있던 알 수 없는 집착과 오기, 분노 같은 감정들이 많이 희석된 것 같다.
‘음… 싫은데.’
오늘 포수 마스크를 쓴 건 정대한이 아닌 장덕수였다.
세대 교체에 대한 필요성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이번 올림픽 내내 정대한의 컨디션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게 이유였다.
어쨌든 소속팀에서부터 함께 호흡을 맞춰온 장덕수가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변화구를 요구했지만 임준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승부를 거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원 아웃 주자 2루 상황, 벤치의 판단대로 저 루이스 오티즈를 1루로 보내고 다음 타자를 상대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해보자.’
언제나 그랬듯 임준영은 결코 도망가는 걸 선호하는 투수가 아니었다.
오늘 경기의 중요성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것만큼이나 자신과 팀의 능력을 믿는, 임준영은 그런 선수였다.
스륵
임준영의 등 뒤로 2루 주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으로 주자의 움직임을 묶은 임준영이 포수 미트를 향해 힘차게 공을 뿌렸다.
따아악!
역시 좋은 타자였다.
임준영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정말 잘 던졌다는 생각이 드는 몸쪽 포심을 루이스 오티스가 멋지게 받아쳤다.
글러브를 가져다 댈 새도 없이 투수 옆을 지나 2루 베이스 위로 날아가는 강하고 빠른 직선타구.
팀의 세 번째 득점을 예감한 도미니카 관중들이 이제 막 함성을 지르려던 그때,
터억
“아웃!”
어디선가 나타난 한수혁이 몸을 날리며 노바운드로 그 공을 잡아냈다.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한 바퀴 굴러 자리에서 일어난 후 2루 베이스를 밟아 귀루하지 못한 주자까지 잡아내 버렸다.
“아웃!”
1타점 적시타에 다시 1사 주자 1루로 이어졌을 상황이 순식간에 쓰리 아웃 공수교대가 되어 버렸다.
당연히 적시타일 거라 생각하고 스타트를 끊었던 2루 주자가 얼빠진 표정으로 한수혁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새끼, 저걸 잡는다고?”
그의 입에서 스페인어로 된 욕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그걸 듣고 가만있을 한수혁이 아니었다.
“입 닥치고 들어가서 엄마한테 울면서 전화나 걸어, 개자식아.”
피부색이 노란 동양인의 입에서 갑자기 스페인어가 튀어나오자 주자의 표정이 더욱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그런 주자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한수혁이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우아아아!”
“진짜, 최고다! 최고야!”
“한수혁!”
이제야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한 관중들이 뒤늦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외야에서 뛰어온 서형주가 한수혁의 등에 매달리려다가 하마터면 그라운드에 메다꽂힐 뻔했고, 오늘 3루수로 나선 안치욱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물개박수를 치고 있었다.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장덕수에게 임준영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봐, 내가 승부해도 된다고 했잖아.”
야구는 팀 플레이다.
굳이 내가 타자와의 승부에서 이기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팀이 승리하는 것이다.
야구 인생 내내 팀을 책임져왔던 임준영은 이제 다른 동료에게 기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 * *
다른 국적의 선수들도 비슷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특히나 야구로 성공하는 것만이 유일한 가난의 탈출구인 선수들이 있다.
중남미 국가들 중에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긴 하지만 여전히 빈민가 탈출을 위해 야구공을 잡는 소년들이 많은 나라 도미니카.
그런 도미니카 올림픽 대표팀에 참가한 선수들 중에는 정말 국가의 명예를 위해 합류를 결정한 선수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이름값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대한민국과 도미니카 공화국이 3 대 3으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9회말 한국팀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2사 주자 없는 상황에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이번 이닝 마운드를 물려 받아 두 타자를 잘 잡아낸 도미니카 투수의 얼굴에 비장함이 떠올랐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도미니카 감독이 포수를 통해 필사적인 사인을 보냈다.
걸러라, 그냥 1루로 내보내라.
하지만 메이저리그도 아닌 자국 리그 출신의 감독에게는 이 자존심과 허영심으로 가득 찬 빅리거들을 컨트롤 할 힘이 없었다.
슈우우웅
따아아아악!
“안 돼!”
한수혁의 배트에 맞은 타구가 45도 각도로 솟아 올라 하늘 위로 사라져버렸다.
누군가의 절규, 또 누군가의 환호 속에 타구가 계속 비행을 이어갔다.
그리고,
“우아아아아!”
“됐다! 됐다! 결승이야!”
“한수혁! 이 미친 놈아!”
끝내기 홈런을 때려낸 한수혁이 다이아몬드를 돌아 홈으로 돌아오자 덕아웃에 있던 대표팀 동료들이 일제히 달려나와 그를 둘러쌌다.
결승전 진출, 최소 은메달 확보.
2008년 이후 사상 두 번째로 대한민국 대표팀이 올림픽 야구 결승전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됐다아아! 됐어어어!”
“서형주.”
“으아아아, 됐… 응?”
“너 같은 놈은 군대를 꼭 보내야 했었는데.”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자식이, 으아아! 됐다아아!”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자신 역시 군대를 가본 적 없다는 사실이 떠오른 한수혁이 피식 웃으며 1루 응원석 쪽으로 걸어갔다.
당장이라도 안전망을 무너뜨릴 것처럼 흥분한 한국 응원단.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민예린이 한수혁을 보고 뒤로 넘어갈 듯 소리를 질러댔다.
“오빠아아아!”
“잘 참았네, 우리 예린이.”
“네! 오빠 말 듣고 꾹 참았어요.”
“잘했다. 좀 있다가 버스 쪽으로 와.”
“버스요? 왜요?”
“이 배트 너 기념으로 줄게. 혹시 받기 싫은 건 아니지?”
“바, 바, 받기 싫다뇨! 그럴 리가! 가보로 삼을게요! 바로 갈게요, 오빠!”
“그리고 응원해주신 여러분, 다들 감사드립니다. 사인 필요한 분 계시면 조금 있다가 저희 선수단 버스 앞으로 오시면 다 해드릴게요. 사람 많으니까 조심하시고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그렇게 자기 할 말을 끝낸 한수혁이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한수혁을 사인을 받고 싶은 교포들과 미국까지 원정 온 팬들이 우르르 한국팀 버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민예린은 너무 행복했다.
올림픽 준결승 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친 배트를 준다는 것도 기뻤지만, 그것보다 난생 처음 한수혁에게서 선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또 하나, 올림픽 내내 축 처져 있던 그의 표정에 다시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민예린은 너무 행복했다.
그녀가 옆에 있던 자신의 매니저에게 말했다.
“오빠, 미국은 총기의 나라잖아. 안 그래?”
“그치, 야, 그런데 갑자기 웬 총기, 또 뭘 하려고? 무섭다. 뭔지 모르겠지만 하지 마.”
“그게 아니라 야구배트가 들어갈 만한 방탄 케이스 하나만 사서 가자고. 분명히 어디선가 팔 거야. 오늘 바로 좀 알아봐줘.”
“방탄?”
“어,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용물을 지킬 수 있는 그런 걸로 부탁해. 우리 집 가보를 보관해야 하거든.”
“…….”
매니저는 생각했다.
‘어디 보석상 같은 데라도 가서 알아봐야 하나…….’
* * *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준결승에서 도미니카 꺾고 2008년 이후 20년 만에 결승전 진출] [임준영의 선발 7이닝 2실점 호투, 그리고 한수혁의 끝내기 홈런, 완벽했던 워리어스 선후배] [2안타 서형주, 1안타 1볼넷 안치욱, 완벽 수비 장덕수, 1이닝 무실점 양기철, 김두영까지, 워리어스 선수들 맹활약] [미국과 일본 간의 준결승전, 메이저리그 올스타급 멤버들 총출동한 미국이 일본을 9 대 1로 완벽하게 제압하며 결승에서 한국과 대결] [미국팀 간판타자 타이 존슨, 한 경기 3홈런 몰아치며 일본 열도를 침몰시키다] [타이 존슨 “한국이 올라올 거라 생각했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도미니카전 끝난 후 한국팀 버스 앞에서 열린 즉석 팬 사인회? 한수혁 “멀리서 와준 팬들을 위해 당연한 일이다” 1시간 넘게 사인해주고 숙소로 돌아가] [한수혁과 함께 즉석 사인회 참가한 서형주 “뭔지도 모르고 끌려왔지만 제 사인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너무 즐겁다.”] [한수혁 “사인회라기보다는 즉석 팬서비스 같은 거다. 참가하지 않은 동료 선수들에 대한 비방은 절대 하지 말아 주길 부탁드린다.”]└저 말이 맞지. 아직 결승전도 남았는데 괜히 선수들 SNS 가서 테러하고 그러지 마라
└올림픽 준결승전에서 끝내기 홈런 치고 1시간 동안 사인해준 놈이 대단한 거지, 거기 빠진 놈이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아무튼 한수혁 쟤는 참 묘해. 세상 지밖에 모르는 거 같으면서도 팬 서비스는 또 좋고, 예상 외로 다른 선수들도 잘 챙기고
└여기저기 기부도 많이 한다며
└거참… 아메리칸 마인드, 뭐 그런 건가?
짧지 않은 한국프로야구 역사 속에서 한수혁은 정말로 이질적인 존재였다.
데뷔하자마자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돌아가던 한국 야구판의 문화를 완전히 뒤엎은 선수.
정도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선배고 뭐고 곧바로 들이받아버리는 그라운드의 무법자.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용병 선수들조차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쩔쩔매게 만드는 강펀치, 그리고 카리스마.
야구판 전체에 공공연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각종 불문율을 하나하나 깨버리면서도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선수.
그런 한수혁이 준결승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친 후 한 시간 동안 즉석 사인회를 가졌다는 소식에 또 많은 사람들이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사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냥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라운드 난입을 잘 참아낸 민예린에게 배트를 주고 싶었고, 그 옆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팬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축하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방방 뛰는 서형주와 안치욱을 잡아 끌고 사인을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임준영과 장덕수, 김두영, 양기철 같은 팀 동료들이 합류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다른 대표팀 선수들 몇이 버스에서 내렸고, 한수혁의 배트를 끌어안은 채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던 민예린까지 끼어들며 정말 즉석 사인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숙소로 이동이 늦어지며 몇몇 고참급 선수들이 불평을 내뱉으려 했지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그걸 꺼내지 못했다.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대역죄인이 될 판이다.
지금 한국 야구계에서 한수혁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을 그대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훈훈하다면 훈훈한 뒷이야기를 남긴 채 한국의 올림픽 준결승전 무대가 끝을 맺었다.
이제 이틀 후 미국과의 결승전이 기다리고 있다.
타이 존슨을 포함해 지난 WBC에서 한수혁에게 개망신을 당한 올스타급 메이저리거들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한국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야, 서형주. 너 메달 땄다고 경기 똑바로 안 하면 내가 한국 가자마자 인터뷰해 버릴 거다.”
“인터뷰? 대체 소리를 하려고?”
“서형주 놈이 은메달 확정되자마자 훈련도 안 하고 피둥피둥 놀았다고?”
“야 이 씨, 농담을 해도 무슨 그런… 사람들이 그걸 믿을 거 같아?”
“농담 아닌데, 그리고 내가 말하면 믿을 거 같고.”
“…….”
“똑바로 하란 소리야. 그리고 안치욱.”
“어, 열심히 할게. 그러니까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돼.”
“뭔 소리야. 지난번에 너희 부모님이 하귤 보내주신 거 감사하다고, 그렇게 좀 전해드려.”
“아, 아, 그거. 난 또…….”
자칫하면 들뜰 수 있는, 얼마 후면 세계 최강팀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1년 차 애송이 둘의 기강을 잡아준 한수혁이 호텔 로비를 나와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 후 끝도 없이 추락하던 기분이 어느새 장난을 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제야 한수혁은 예전 삶에서 자신이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때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장난을 칠 친구도, 위로를 해줄 사람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외로움 따윈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건만, 알고 보니 자신은 이렇게 항상 주변에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게 아쉬웠고,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깨닫게 되었다는 데 감사했다.
한수혁의 입가에 누가 봐도 근사한, 그런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