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pitcher hides 170km RAW novel - Chapter (205)
천재 투수가 170km를 숨김-204화(205/412)
#204. 뭔가 잘못되었다
“좋았어! 서형주, 나이스! 넌 최고야! 멋있어!”
누군가 해준 말이 아니다.
제법 까다로운 플라이를 잡아낸 후 서형주가 스스로에게 한 말이다.
보통 자기애가 충만한 사람들 중 일부가 3인칭 화법을 사용하곤 한다.
[팬들이 ‘우리는 즐라탄을 원한다’고 외쳤다. 그렇기에 난 팬들에게 즐라탄을 선물했다.]고 말했던 어떤 축구선수처럼 말이다.그런 면에서 볼 때 서형주는 확실히 자기애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아직 연차가 부족해 최대한 그 모습을 감추고 있을 뿐, 그가 본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건 확실하다.
아니, 어쩌면 벌써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감정에 고취되어 저렇게 혼자 난리법석을 피우는 걸 보니 말이다.
다른 팀 고참들의 눈에 서형주의 그런 모습이 곱게 보일 리 만무하다.
이번 대표팀에 선발된 30명의 선수 중 7명이 워리어스 선수다. 그리고 한수혁과 서형주, 안치욱보다 어린 선수는 없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서형주를 아니꼽게 볼 다른 팀 선배가 무려 23명이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서형주의 옆에는 임준영이라는 최고의 커리어를 가진 대표팀 간판 선수가 있고, 연차와 상관없이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장덕수라는 무력캐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선배들이 항상 서형주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코칭스태프가 관리를 철저히 한다 해도 결국 선수들은 연차에 따라 흩어지고 뭉칠 수밖에 없다.
현재 대표팀 내에 자신을 벼르는 선배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서형주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형주가 지금처럼 마음껏 플레이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저 괴물 덕분이지.’
감히 터치하거나 시비를 걸 엄두조차 안 나는, 나이와 연차를 초월해 대표팀 내 오롯이 빛나는 존재인 한수혁.
그가 자신의 동기, 그리고 같은 팀 동료라는 게 너무 고마울 뿐이었다.
“플레이!”
그런 외적인 부분은 차지하더라도, 경기 내적인 부분에서도 그는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었다
방금 전 기습번트 역시 한수혁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타석에 들어서려는 그에게 한수혁이 다가왔다.
‘저놈 아마 초구를 던진 후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될 거야. 투수 쪽으로 기습번트 대봐. 아마 반응이 평소보다 1, 2초는 확실히 늦을 거다.’
‘그래? 그걸 어떻게 아는데?’
‘저거 너랑 똑같은 놈이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겉멋 든 놈이라고. 분명 방심하고 있을 거야. 아, 너 말고 쟤가 말이야.’
‘…….’
조금 기분 나쁜 말이기는 했지만 역시나 귀신같이 적중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저놈은 대체 뭘까 하는 그런 생각.
아무리 재능을 타고나고, 피 나는 노력을 한다 해도 그 사이사이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게 적이 아닌 내 동료인데.
1루 베이스를 밟은 서형주가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국민들이 금메달을 원하는 이상 서형주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1루 주루 코치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푹 떨궜다.
* * *
지난 시즌이 끝난 후 몇몇 프로야구 선수들의 주도 하에 단톡방이 하나 만들어졌다.
‘메잘알’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는 한국프로야구 선수들이 모인 곳이었다.
대전 팔콘스에 이어 LA에인절스의 소년가장이 된 류한결을 비롯 미국 대신 워리어스를 택한 임준영, 애초에 미국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호기심에 가입한 최경재, 7시즌을 마치고 포스팅 신청을 희망했던 이찬호 등이 그 단톡방의 주요 멤버였다.
선수들의 진로가 결정되기 전, 그러니까 보다 정확히 말하면 류한결의 포스팅이 이루지기 전 그 단톡방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 적이 있다.
– 형님들,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 오냐, 찬호야. 말해봐라
– 까불면 죽는다. 류한결. 난 형님들한테 말한 거다
– 흐흐, 뭔데, 말해봐. 찬호야
–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원래는 포스팅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 했는데? 어째 과거형이네? 그럼 안 하려고?
– 아, 포기한 건 아니고, 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아직 생각 중입니다
– 마음에 걸리는 게 뭔데?
– 수혁이 말입니다. 한수혁
– 한수혁이 왜?
– 그런 녀석도 한국에서 뛰는데 제가 뭐라고 미국에 나가나 싶어서요
– 뭐? 야, 그렇게 얘기하면 한결이는 뭐가 되냐? 타자 한수혁한테 죽어라 두들겨 맞아, 투수 한수혁한테는 성적으로 비교도 안 돼, 그래도 꿋꿋하게 포스팅 신청해서 미국 간다잖아
– …그거 참 듣기 섭섭하네요. 성님. 그런데 또 틀린 말은 아니네유
– 그래, 차라리 너한테 묻는 게 낫겠다. 야, 류한결. 너는 대체 무슨 깡으로 미국 가는 거냐?
– 찬호야, 찬호야, 이 어리석은 놈아
– 에이 씨,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 세상에는 주연만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조연을 맡아줘야 이 세상, 아니지, 이 야구판이 돌아갈 거 아녀
– 그러니까 네 말은… 한수혁은 주연이고 우리는 조연이다?
– 뭐, 듣기 좀 거시기할 수도 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자녀. 갸랑 비교하면 우리 인생이 너무 서글퍼져. 내비둬어. 그냥 갸는 혼자 놀라고 하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우리 갈 길을 가면 그뿐이여
대전 팔콘스 역사상,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로 남게 될지 모를 투수와 KBO에서 한수혁을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타자란 평가를 받는 이찬호 사이의 대화였다.
꼭 그때의 대화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국 이찬호는 포스팅 신청을 포기하고 1년 더 한국에서 뛰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동기 부여할 계기도 생겼다.
만년 하위팀 파이터즈에서 우승 도전팀 매지션스로 전격 트레이드 된 것이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매지션스에서 첫 한국시리즈 우승 맛도 보고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거취를 결정하자.
이찬호는 그렇게 매지션스 선수가 되어 우승에 도전하는 중이다.
물론 한수혁의 워리어스 때문에 점점 그 꿈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만.
미국과의 올림픽 결승전,
1회초 무사 주자 1루.
이찬호는 생각했다.
자신의 바로 뒤 타자가 한수혁이다.
저기 마운드에 있는 앤드류 데이비스가 아무리 차세대 미국 에이스라 불리는 선수라 해도 한수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녀석 앞에 주자를 내보내기 싫을 것이다.
그렇다면 승부다.
이찬호는 타자와 승부를 결심한 투수가 초구에 어떤 공을 던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따아악!
“좋아! 나이스!”
“3루! 3루!”
1-2루간을 꿰뚫는 총알 같은 타구에 발 빠른 서형주가 3루까지 내달렸다.
순식간에 무사 주자 1, 3루가 만들어졌고, 이제 문제의 한수혁이 타석에 들어설 차례였다.
이찬호가 1루 베이스를 밟은 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투수와 타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메이저리그 1라운드 지명에 빛나는 천재 중의 천재 투수, 그리고 적으로 만났을 때는 최악, 하지만 같은 편일 때는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타자의 대결.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쥐어질 지경이었다.
‘이런 경기는 관중석에 앉아서 팝콘이라도 먹으면서 봐야 하는 건데.’
* * *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직 얼굴에 애송이 티가 철철 넘쳐 흐르는 투수가 콧김을 마구 뿜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긴, 애송이라고 해봐야 지금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놈이다.
그냥, 내 기억에 남은 녀석의 모습과 지금 저 모습이 도저히 매칭이 안 돼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저 녀석은 알까?
샴푸 모델을 해도 좋을 것 같은 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불과 5년 후면 훌러덩 다 날아가게 될 거라는 걸?
그 콤플렉스 때문에 어디를 가든 절대 야구 모자를 벗지 않게 될 거라는 걸?
흠,
생각해보면 이번 미국 올림픽 대표팀의 선수들 중에는 친근한 얼굴들이 꽤 많다.
마운드 위의 저 애송이도 그렇고, 그 외에도 나와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힌 이들이 꽤나 많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WBC 때 만났던 미국 팀 멤버들이 나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은, 그렇기에 조금은 세대가 다른 선수들이라면 이번 올림픽에서 만난 녀석들은 나와 전성기를 거의 공유한 선수들이다.
저기 유격수 자리에서 주변을 자꾸 흘끗거리고 있는 애송이 유격수.
저놈 이름이 제너드 에반스였지.
데뷔 초반에 하도 나한테 삼진을 많이 당해서, 그 덕분에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뻔했다고 너스레를 떨던 성격 좋은 애송이다.
올스타전에서 한번 말을 섞은 후로 이상하게 자꾸 달라붙던, 친화력으로만 따지면 골든 레트리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착한 녀석이었다.
물론 과거형이다. 아니, 미래형이라고 봐야 하나?
어쨌든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1회초 무사 주자 1, 3루.
시작하자마자 실점 위기에 놓인 투수가 세상 다시없을 심각한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다행이다.
솔직히 조금 걱정했다.
오늘 경기 걱정?
아니,
얼마 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 후 어디로 튈지 나조차 짐작할 수 없게 된 멘탈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오늘 결승전이 열리는 곳이 또 에인절 스타디움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며 간신히 진정된 내 기분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었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늘 훈련을 시작했다.
그런데 괜찮아진 것 같다.
저 녀석의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그때 그 이상했던 기분이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 같다.
“플레이!”
주심의 콜 사인과 함께 루상의 주자 두 명이 다시 투수의 신경을 긁기 시작한다.
내 조언을 받고 기습번트를 성공시킨 서형주, 그리고 자신이 빅리그에서 뛸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낸 이찬호.
언제라도 도루가 가능한 발 빠른 주자 둘이 계속 스타트를 끊자 투수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5년 정도만 지나면 저 멋진 머리카락을 잃는 대신 미국 최고 투수라는 명예를 얻게 될 녀석이지만 확실히 아직은 미숙한 애송이에 불과하다.
고개를 돌려 저 멀리 1루 응원석, 언제나 그녀가 앉아 있던 그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정말 찾을 수 있을까?
내게 몽타주를 받아간 민예린이 정말 자기 일처럼 열심히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지만…….
모르겠다.
한국처럼 좁아 터진 나라에서도 누군가를 찾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여기는 3억 명이 넘게 살고 있는 드넓은 나라 미국이다.
내일 당장 소식이 올 수도 있지만, 어쩌면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그 일에 대한 신경을 끊어야 할 때다. 언제까지 그 과거에 사로잡혀 이런 상태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조금은 기분이 가벼워졌다.
1루를 향해 몇 번 견제구를 던진 투수가 신중한 표정으로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앤드류 데이비스라는 투수가 미국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당연히 100마일을 가볍게 넘기는 포심, 그리고 역대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평가를 받은 커브볼의 위력 때문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 있었다.
웬만한 일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승부욕이야말로 앤드류 데이비스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만루 홈런을 허용하고도 아무 흔들림 없이 자신의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 누구를 상대해도 절대 겁을 집어 먹지 않는 앤드류 데이비스의 손 끝에서 하얀 공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따아아아아악!
그 상태 그대로 마운드 위에 무너져 내렸다.